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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접 재앙을 믿는다면 (계 16: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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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 재앙을 믿는다면 (계 16:12-21)  

땅에 쏟아 붓는 대접 재앙은 계속 된다. 지난 시간 두 번째 천사에서 다섯 번째 천사가 대접을 쏟을 때 극렬한 재앙이 땅, 바다, 강, 해, 짐승의 보좌에 임했다. 여섯 번째 천사가 쏟는 대접 재앙은 유브라데 강에 쏟아진다. 유브라데 강은 로마 제국과 그 동쪽에 있는 파르피아 제국의 국경을 이루는 강으로 구약에서 유브라데스는 약속의 땅과 동쪽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라 여겼다. 이스라엘의 적들을 말할 때 상징적으로 유브라데스 강 저편의 민족들이라고 표현했다. (사7:20, 8:7, 렘46:10)

이 유브라데 강에 재앙의 대접을 쏟을 때 강물이 마른다. 그것은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다. 강물이 마른 것은 인류 최후의 전쟁을 위함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동방의 왕이 그리스도인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강물을 마르게 하여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 한다. 즉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적인 로마를 무너뜨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이 땅에 실현된 것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1. 일곱 대접 재앙 중 이 여섯 번째 대접 재앙은 내용이 조화되지 않는다.

동방의 군대가 구원의 군대가 되도록 강을 마르게 한다면 축복을 가져오는 대접이기에 그렇게 보기 어렵다. 즉, 계16:13~14에 나오는 온 천하 왕을 모아 하나님께 대적하는 내용과 조화되지 않는다. 이 동방의 왕은 어린 양과 그 충성된 종들에게 도전하는 왕일뿐이다.   

2. 동방의 왕이 또 그리스도인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유브라데를 넘어온다는 것은 단11:30~45의 내용과도 조화되지 않는다.

다니엘은 북방 왕의 군대를 동북의 군대가 격멸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의 재앙을 일으키는 동방의 왕이지 구원의 군대가 아니다. 굳이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동북의 군대를 중국과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군대로 예측한다면 그들이 유브라데 강을 넘어 모여드는 것이다. 

그럴 듯 하지만 오히려 주석가 박윤선 박사는 이를 적그리스도 나라와 마치 그 연방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침략한다는 비유라고 하였다.  

3. 습3:8의 예언을 볼 때도 동방 왕은 구원군이 아니다.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여섯 번째 대접 재앙은 열국들을 모으고 왕들을 모아 소멸시키려는 것이라는 예언과 일치하는 것이기에 동방 왕은 성도를 건져내는 구원군이 아니다. 그들은 아마겟돈 전쟁을 위해 모여드는 것이다. 동쪽에서 오는 왕에 대해 어떤 학자는 창4:16을 근거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 가인의 후예라고 해석한다. 결코 구원군이 아니다.   

동방의 왕들의 길이 준비될 때 요한은 또 보았다. 계16:13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개구리는 더러운 동물이다. 율법에서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 세 더러운 영은 악의 삼위일체다. 용은 사단이다. 짐승은 적그리스도다. 거짓 선지자는 둘째 짐승이다. 그러니 사단의 삼위일체에서 나온 이 세 더러운 영은 미혹하고 꾀고 넘어뜨리는 영이다. 

이 개구리 같은 더러운 세 영은 전 세계의 왕들을 모은다. 전쟁을 위해 모은다. 그 미혹의 방법은 이적을 행하므로 왕들을 사로잡는다. 그 전쟁의 시기는 전능하신 이의 큰 날, 최후 심판, 재림의 때에 일어난다. 개구리 같이 더러운 세 영은 이 각 국의 왕들을 어디로 모으는가? 

계16:16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이 아마겟돈은 히브리어로 ‘하르므깃도’다. 즉 므깃도란 ‘도살의 산’이란 뜻인데 평야에 둘러싸여 있다. 이 므깃도는 과거 드보라가 적장 시스라를 멸한 곳이다.(삿5:19) 아하시야 왕이 예후의 화살에 죽은 곳이다.(왕하9:27) 또 유대 왕 요시야를 죽인 곳이다.(왕하23:29) 

즉 우리는 이 므깃도가 전쟁을 위한 특별 요충지임을 알고 있다. 이곳은 그 유명한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이 전쟁의 최적지라 언급한 곳이다. 그런데 오늘 요한계시록은 이 므깃도가 하나님과 그 대적자들이 싸우는 마지막 전쟁의 상황을 묘사하지 않고 뒤로 미룬다. 

계19:17~21, 주님의 재림 이야기로 미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전쟁은 천하 왕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군대와 예수님을 따르는 군대와 일전을 치른다는 사실이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치르는 마지막 최후 전쟁이다. 물론 주님은 입에서 나오는 칼로 싸운다. 즉 ‘말씀’이란 무기다. 

이처럼 므깃도 전쟁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의 므깃도인데 사실 악의 모든 세력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다. 말씀에 비추어 멸망을 당하고 심판을 당하는 그 장소가 므깃도가 된다고 추측된다. 그러니까 어린 양의 군대와 적그리스도 군대의 최후 전쟁터로서, 전쟁이라기보다 주님 앞에 심판되고 마는 온 세상이 므깃도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므깃도가 인류 최후 전쟁이든, 아니면 주님 심판의 장소이든지 여하튼 다시 한 번 깨어 일어나야 한다. 그 최후의 전쟁이 주님이 오시므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다리고 대망해야 한다. 주님은 곧 오실 것이다.

계16:15을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라고 하였다. 주님은 도둑 같이 갑자기 오신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서 자기의 부끄러운 수치가 드러나지 않도록 옷을 지켜야 한다. 계3:18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라는 말씀처럼 확실한 옷을 입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수치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 모습이다. 오늘의 현대 교회는 술 취한 자처럼 벌거벗었어도 벗은 줄 모르고 지난다. 주님이 오시면 숨을 곳이 없다. 

사61:10을 읽어보면 옷은 구원을 의미한다.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라고 하였다. 만약 교회는 다니지만 구원의 옷을 입지 못했으면 이런 수치와 불행이 어디 있는가? 우리 모두 구원의 옷을 확실히 입었는지 깨어서 점검하자. 라합이 약속의 붉은 줄을 붙잡았으므로, 그것을 붙잡고 심판을 기다리므로 하나님의 군대와 여리고 도성의 군대의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것처럼 우리가 옷을 찾아 입고 깨어있어야 한다. 

내가 구원론의 책 「아버지와 아들」을 쓴 것도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다. 주님의 오심은 도적 같으시다. 어느 날 오시는 것이다. 허나 옷을 입어야 한다. 옷을 입은 사람은 기다리는 것이다. 자신 있게 기다리는 것이다. 부끄러울 것 없다.   

드디어 마지막 재앙으로 일곱 번째 천사가 일곱 대접을 쏟는다. 그때 큰 음성이 들려온다. “되었다”라는 음성이다. 여기 “되었다”는 말 ‘기노마이’는 계21:6의 “이루었다”와 함께 완료를 뜻한다. 즉 형벌 완료에 대한 선언이다. 사실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 19장의 사건은 좀더 분명한 바벨론 멸망의 메시지와 최후 전쟁에 대한 세밀한 소개이기에 여기 일곱 번째 천사의 대접을 공중에 쏟았다는 것은 형별의 종료이다. 

여기 이 일곱 번째 대접 재앙의 내용은 이렇다.

① 번개 소리가 있다. - 심판의 신속성을 말한다. 인자의 임함은 번개와 같다. (마24:27)  

② 음성들이 있다. - 심판의 권위성을 말한다.  

③ 뇌성이 있다. - 심판의 공의성을 말한다.  

④ 큰 지진이 난다. 

지진에 관해서는 계11;13에도 나왔다. 그런데 그때의 성은 예루살렘이었다면 지금은 만국의 성들이 무너진다. 계16:19~20을 보면 바벨론을 포함해서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는 멸망이 이루어진다. 스가랴 서에 보면 스14:4~5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라고 하였으니 땅의 축이 흔들려 사라지고 물러가는 엄청난 지진이다. 온 나라가 초토화되는 재앙이 지진이다.  

⑤ 무게가 한 달란트 되는 우박이 떨어진다.

한 달란트의 무게는 시대마다 다르다. 여기 성경의 난의 주는 60Kg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 이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내린다. 더욱 두려운 것은 사람들에게 그 우박이 내린다. 사람을 때리는 우박 재앙, 정말로 엄청난 일이다. 60Kg짜리 우박이 우리의 머리에 떨어진다. 어떻게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가속의 무게는 수 백 톤이 되어 떨어진다. 재앙의 대접이 공중에 쏟아 부어졌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회개가 없다. 대접 재앙의 일곱 가지 대접이 쏟아질 때 한결 같은 것은 완악함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재앙을 이기지 못함이 분할 뿐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비방하는 전혀 구원 받을 수 없는 데까지 떨어져 버린 이들이다. 그들은 모두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마귀의 미혹에 속아 심판의 그날, 재앙이 다 되었다고 종료 선언이 있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대적자로 서 있을 뿐이다. 자신들이 그 재앙을 피하지 못하고 바꾸지 못함을 분통해 할 뿐이다. 아, 어찌할꼬

지금 예수께로 피하면 삶이 바뀌는데, 지금 예수께로 나오면 미래가 바뀌는데, 심판도 생명으로, 재앙도 안전함으로, 사망도 생명으로, 절망도 소망으로 바뀌는데 회개가 없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대접 재앙의 계시가 알려졌다. 마지막 전쟁과 천지가 개벽하는 종말이다. 그날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재앙과 심판만이 진행되는 것이다.   

사순절에 요한계시록을 읽는 우리의 목마름은 예수를 바라보는데 있다. 나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내 구주로 모시는데 있다.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곧 믿기만 하면(요1:120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피를 믿기만 하면 내 영혼이 구원의 옷을 입은 하늘 백성이 된다. 주를 영접하는 것보다 더 급한 문제가 없다. 영접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문 뒤에 숨지 않고 환영하는 것이다.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여러분의 집에 갔는데 숨고 나오지 않으면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뛰어나오고 집으로 들이면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함은 이와 같은 것이다. 내 마음의 방으로 기쁘게 모시는 것이다.
“기다렸어요, 주님! 나의 구원의 주님!”

그 영접이 오늘 일어나야 한다. 내일이면 늦을 수도 있다. 
“내 마음에 주님으로 오세요.”

모두 다 시인하고 외치기를 축원한다.
(김철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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