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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기가 좋사오니 (마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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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좋사오니 (마 17:1-8)


요즘 우리나라 뉴스는 한반도에 날마다 전쟁 난다는 이야기를 톱뉴스로 계속 전하고 있어서 불안감 조성이 되고 있는데 내일부터 20만 명의 군인이 참가하는 키리졸브 훈련이 있어서 이제 그것을 핑계 삼아서 북한이 도발할지 모른다는 예상들을 하고 있으니 내일부터 일주일이 매우 중요한 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런 문제가 만날 때마다 늘 이렇게 생각을 정리합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우리 생각에는 불안스럽게만 느껴지지만 우리가 많이 기도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 중에 이러한 일도 있어야 되는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주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 보면 절대 권력은 절대 멸망합니다. 북한은 아마 지금 세상에서 남아있는 절대 권력의 마지막 주자라고 생각이 되는데 이런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또 이런 인간들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대로 잘 정리가 될 것으로 믿고 그렇게 계속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신 기록이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오늘 말씀이 그 중의 하나이고 겟세마네에서 밤새워 기도하실 때도 이 세 사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를 살리기 위해 시체가 들어있는 방에 들어가실 때도 이 세 제자만 데리고 들어가신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이 조금은 불평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가 객관성 있게 판단을 했을 때 상식적으로 ‘예수님도 편애를 하시나?’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가는 제자들은 마음이 무겁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엿새라는 시간이 나오지 않습니까? 엿새 전에 혼났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제 올라가서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이다.” 그런 선언을 하셨기 때문에 ‘오늘 죽으러 가시는 게 아닌가? 우리도 죽어야 되는 게 아닌가?’ 베드로는 더욱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일주일 전에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사탄 소리를 들은 상태라서 오늘 말 잘못했다가 큰 책망을 받을 것 같아 영문을 모른 채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 전체는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신비적 사건 중의 하나가 됩니다. 과학적 사고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기록에 속합니다. 여기 보니까 “예수님의 얼굴이 별안간 변형되었다.”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굴이 해같이 광채가 나는 모습으로 변했다.” 산꼭대기에서 별안간 그런 일이 벌어지니까 제자들이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이 입고 계신 옷도 빛이 나는데 얼마나 희어졌느냐 하면 다른 복음서에는 “세상에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더라.” 

그런 모습으로 변했고 더 이상한 것은 모세와 엘리야가 그곳에 와서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기준으로 봐서 모세가 죽은 일은 1400년이 지났고, 엘리야가 승천한지는 850년이 지났는데 하늘나라에 간 그들을 제자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게 그 자리에 어떻게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했는지 신비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름까지 빛이 나서 황홀한 신비적 사건이 벌어지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는데 제자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본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깊은 관계입니다. 

또, 구약 성경에도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다 산에서 이루어진 고산지대 신 개념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시작이 되었고,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 역사 때는 방주 건축의 장소가 가장 높은 산인 아라랏산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던 장소도 모리아산이고,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이 시내산이고, 엘리야가 불을 내린 곳은 갈멜산이고, 이스라엘 왕국의 기준은 시온산이고, 예수님의 팔복 설교도 산에서 하셨다고 하고, 밤새 철야기도 하신 곳도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하고, 갈보리산에서 돌아가시고, 산에서 승천하시고, 오늘도 높은 산이라고 했습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인간들은 하나님의 숨결을 찾으러 산을 찾아가서 하나님 만나기를 즐겨했기 때문에 수도원이라든가 기도원은 모두가 시장 한복판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산 속에다 마련하는 문화가 생긴 것입니다. 산은 거짓이 없고 거룩하며 신성이 있고 생명력이 있어 이 산을 찾아간다는 의미는 어느 면에서 세속을 잊어버리는 하나의 훈련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갈 수만 있다면 산을 자주 가는 것은 건강과 영혼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삼림욕이라는 단어까지 생겼습니다. 숲속을 많이 걸어 다니면 이 삼림들에게 목욕이 되어서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내외분은 은퇴하셔서 지금 강원도 깊고 깊은 산속의 별장을 지으시고 자연 속에서 지내시며 매주일 여기 나오십니다. 저도 몇 번 거기 심방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동네에 암 투병중인 목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내 인생은 얼마 안 남았구나. 그러면 내가 조용한 산 속에 가서 조용히 지내다 하나님께로 가자.” 그래서 조용한 집을 마련하고 텃밭을 하나 마련해서 도시 안 나가고 거기서 물과 흙과 더불어서 날마다 숲속에서 생활하셨는데 암이 어디로 갔는지 깨끗하게 치유가 되셨습니다. “저기 저 집이 그 목사님 댁입니다.” 그러시며 저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가신 이유는 제자들에게 신비한 체험을 보여주어서 이들에게 사명을 주시려는 영적 수련의 작업입니다. 여기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못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가장 큰 힘을 두 가지에서 찾습니다. 하나는 율법이고 하나는 예언자입니다. 국가적인 헌법도 따로 없습니다. 율법이 그냥 헌법입니다. 율법은 곧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작용까지 생겼습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라고 생각될 만큼 그들이 순종하라는 율법이 어떡해서 주어졌느냐? 모세를 통해서 제일 먼저 십계명을 통해서 주어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세 율법이라는 말이 생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입니다. 그 다음에 하늘의 음성을 들려주는 예언자들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광야에 외치는 세례 요한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가 설교를 하니까 성경에 “온 유대 지방과 한 나라 전체가 예루살렘 사람이 다 그에게 나아와서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더라.” 예언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대표적 예언자가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인간 중에 에녹과 함께 유일하게 죽음을 피해서 살아있는 육체로 승천한 예언자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금 여기 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의 해석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구원관이란 예언자를 통한 율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맨 나중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는 간 곳이 없고 오직 예수만 남았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예언자들과 율법에 목적한 초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제자들에게 지금 보여준 것입니다. 

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은 전설 같이만 들어오던 1500년 전 모세와 850년 전 엘리야를 직접 보고 또 그런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왜 그 자리에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예수만 남고 “너희는 이의 말을 들으라.”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 신비한 영적 체험은 바로 율법이 말하고 예언자가 말한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이 이의 말을 들어서 구원관을 확립하라.” 그런 하나님의 축복 언어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비한 영적 사건은 제자들에게 금방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습니다. 그 문제가 바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런 말로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왜 싫어졌느냐 하면 지금까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나는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거 말리다가 사탄이라고 혼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도 죽을 것인데 어떡하느냐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미래 보장이 있을 때 행복하지 않습니까? 자기는 아무 보장이 없습니다. 보장된 생활 대책이 없는 제자들의 공동체, 나라의 최고 권력 실세들이 날마다 못살게 구는 괴로운 현실입니다. 

3년 전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뛰쳐나온 집을 빈털터리 거지가 되어서 다시 찾아들어가기도 자존심이 허락지 아니하고 이렇게 계산을 해도 저렇게 계산을 해도 하나도 자기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귀찮은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현실 도피의 유일한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 예수여! 여기 우리가 초막이라도 짓고 여기서 살다가 이대로 모세와 엘리야가 하늘나라로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세상 다시 갈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들의 소원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렇게 교회 오셨습니다. 아주 좋으실 것입니다. 

노래하고 하나님 말씀 듣고 성가대가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가는 또 색소폰 연주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재미나게 노래나 부르고 예배드리다가 식당가서 국수 먹다가 그냥 이매동에 산이 있으니까 올라가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예배 마치고 세상으로 내려가면 곗돈 내야지, 자식들 말 안 듣고 가출하지, 취직 안 되지 복잡합니다. “예수님! 가지 맙시다.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이 산에서 그냥 엘리야와 모세의 뒤를 따라서 올라가고 맙시다. 이게 훨씬 좋습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요청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나? “그래! 그렇게 하자. 그렇게 하는 것이 너와 나의 목표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장래 우리에게 주어질 세계는 그러한 영광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 세계에 가서 우리가 영광을 누리려면 지금 나는 골고다로 내려가서 십자가를 져야 하고 너희들도 너희들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지금 너와 내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자들과 교회들이 넘어지는 걸림돌입니다. 

오늘 말씀 그 다음절인 9절을 보면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살자고 말하는 제자들을 설득해서 예수님은 마을로 끌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거기서 살다가 그냥 가지 왜 내려옵니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십자가를 져야 할 때다.” 내려오자마자 제일 먼저 하신 일을 보면 귀신 들린 아이에게 귀신을 쫓아내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인간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요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이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불교의 최고 지도자께서 자성의 소리를 하는 말을 제가 들었습니다. 

불교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한국 불교는 산속으로만 들어갔지 민중의 곁으로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민중에게 외면당한 종교가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강의를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모든 아픔을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며 피를 흘려 자기 몸을 번제물로 던졌을 때 거기서 이루어진 구원의 열매가 곧 영생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가끔 산 위에 올라가 영적 신비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신비 체험은 그 체험 속에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체험의 힘을 가지고 마을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구체적으로 그 속에서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골목길을 누비면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1년에도 수십 번씩 그룹별로 수양회를 떠납니다. 경치 좋은 산이나 물을 찾아가서 시설이 좋은 수양관을 빌려서 거기서 기타 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열정적으로 기도도 합니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마음 통하는 사람들끼리 밤새워 이야기도 합니다. 그럴 때 “아! 여기가 좋습니다.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이대로 있다가 이 산에서 그냥 하나님께로 올라가 버리면 가장 좋은 생애가 될 거 아닙니까?” 이럴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수양회의 목적은 거기서 있으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 와서 십자가 고난을 더욱 훌륭하게 지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그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유럽에서 한 소녀가 전쟁 중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잿더미 위에서 굶주렸습니다. 어머니와 그녀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인간으로서 처참한 쓰레기통을 뒤지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굶어죽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녀는 아동구호단체의 도움을 통해서 죽음을 면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 소녀는 그때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여기서 내가 살아남는다면 이 후에 나는 오늘의 나와 같은 어린아이를 위해서 일평생 내가 살겠다.’ 마침내 전쟁은 끝이 나고 그 소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그 고통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와신상담으로, 마침내 그녀는 세계인이 바라보는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부와 명예를 한 몸에 지니고 세계가 바라보는 정상의 산에 아주 우뚝 섰을 때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오늘 내가 이 정상의 산에 신비적 황홀의 세계에 이렇게 서있는 것은 내려가기 위한 것이다. 내가 옛날 굶주렸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자.’ ‘유니세프’라고 하는 아동 구호단체를 위해서 자원봉사자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일했습니다.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이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존경의 인물인지 ‘오드리 헵번’의 얼굴이 있는 기념우표가 발행되었는데 그 우표가 얼마 전에 6억 7천만 원에 팔렸고 그 모든 기금을 그 기관에 전부 기부했습니다. 싫어진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나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바울 사도는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헐벗고 굶주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는가? 사는 자체가 사명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큰일은 하지 못했어도 내게 주어지는 나의 삶으로 인해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사명 완수입니다. 

어떤 학생이 공부를 하다가 지쳐서 죽었다면 그 학생은 자기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소방관이 불을 끄다가 죽었다면 그 소방관은 훌륭한 자기 삶의 마침표를 사명적으로 마친 것입니다. 설교하다가 쓰러져 죽은 목사가 있다면 죽도록 충성한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황홀한 체험을 한 이 세 제자는 산에서 내려와서 무엇을 했습니까? 베드로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운 기초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 1대 교황은 베드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제자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 가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중학교 다니는 학생이 엄마에게 슬픈 질문을 했습니다. “엄마! 왜 우리 집은 다른 집 같지 않고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아야 돼? 내가 봤을 때 아버지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시는 일을 하시는 목사잖아? 엄마도 같이 하잖아?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평생 하는 아빠, 엄마를 하나님이 예뻐해 주고 사랑해주고 복을 주어야지, 엄마! 우리 반에서 내가 제일 못살아. 나같이 가난하고 못사는 아이는 한명도 없어. 

왜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가장 충성하고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는 아버지를 축복해주시지 않지? 이렇게 고생스럽게 하시지? 엄마? 왜 그런 거야? 하나님이 살아계신 거야?” 더군다나 그렇게 어렵게 사시는 목사님은 자녀를 6명이나 낳으셨다고 합니다. “엄마! 왜 그런 거야? 말해봐!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신다는 일을 계속 해야 돼? 아빠도 다른 아빠들처럼 다른 일을 하면 안 돼?” 엄마가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아! 너는 지금 중학생인데 이 세상 살아가는 너의 일생 여정에 이것보다 더 큰 어려운 일을 만날 수도 있다. 그때 그 어려운 일을 네가 잘 극복하라고 하나님이 어려서부터 너를 훈련하시는 거야.” 그는 정말 더 어려움이 왔습니다. 실명을 해서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를 따라 신학을 공부하고 장애인으로 지금 온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열심히 아버지가 주신 사명을 다하는데 고난스러울 때마다 가난한 어린 시절에 엄마와 부엌에서 나눈 이야기 “요한아! 그것은 너의 일생에 하나님이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것을 이기게 하시려고 훈련시키시는 거야.” 그 한마디가 자기의 일생을 지켜준다고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 와서 간증하셨습니다. 안요한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말 뒤돌아서서 세상으로 나아가면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여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을로 내려가자.” “예수여! 지금 사순절인데 오늘 우리 교회에서 그냥 노래 부르고 하나님께 그냥 예배드리고 우리 식당에 가서 국수 한 그릇 먹고 이매동 뒷동산에 올라갑시다.” 이랬으면 좋을 텐데 “그래. 마지막에 우리가 갈 곳은 거기야. 모세와 엘리야를 따라서 우리도 가야 돼. 나도 그렇게 갈 거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마을로 내려가자.” 이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기다리는 마을로 내려가서 사명을 다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이 주는 영적 교훈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옵소서. 내가 이 땅에 왜 이렇게 고난스럽게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영적 힘이 주어지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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