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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억지로 진 십자가 (잠 29:3-5, 막 15: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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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진 십자가 (잠 29:3-5, 막 15:21-23)

“억지가 반절충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패나 손실에 굴하지 말고 초지일관으로 밀고 나가라는 말입니다. “억지가 사촌보다 낫다”는 말도 있습니다. 남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억지로라도 자기의 힘으로 하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꿋꿋하게 고집을 세워 하는 것이 사촌이 도와주는 것보다 좋다는 뜻입니다. 억지로 한다고 하더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좋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는 ‘두 아들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밭에 가서 일하라고 시킵니다. 큰 아들은 가겠다고 대답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거절했지만 뉘우치고 갔습니다. 억지로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31절에는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라고 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극진하게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갔던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가서 일했지만 억지로 한 일도 아버지의 뜻대로 한 일이 되었습니다. 억지 선행도 유효합니다. 
  
우리 오랜 말 가운데 ‘억지 춘향’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리에 맞지 않아 되지도 않을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억지 춘향’이 아니라 ‘억지춘양’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억지 춘양’이란 일이 순리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강제로 이루어지거나 억지로 갖다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춘양이란 경상도 동네에 춘양 소나무가 있습니다. 이 소나무는 좋은 재목인데 춘양목이 아닌데도 아무거나 춘양목이라고 억지 쓰는데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빌레몬서 14절에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자원하여 선행을 베풀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9:7에는 봉헌을 권하면서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5:2에는 장로들에게 권하는 치리의 자세를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교회의 특징은 자발적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합니다. 교회는 강제성이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라는 것은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것이 많습니다.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똑같이 복음서에 구레네 시몬의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와 마가는 “억지로”라는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단순히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라고 하여 “억지로”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구레네는 리비아 서북편 지방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디아스포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온 듯합니다. 유월절을 지키러 왔다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광경을 보게 되었고, 그는 많은 구경꾼 속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강제로 징발이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골고다 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신 ‘고난의 길’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sa)에는 14곳에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기념교회를 세우고 지금도 14곳을 기념하며 순례합니다. 빌라도의 법정, 십자가를 지신 곳, 첫 번째 쓰러지신 곳, 예수님이 어머니를 만난 곳,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진 곳,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예수님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고 전해지는 곳 등입니다. 10처에서 14처까지는 성묘교회 안에 있습니다. ‘고난의 길’의 제5처가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을 만나 대신 십자가를 진 곳입니다. 밤새 심한 매질과 재판을 받고 기진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힘조차 없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지쳐 쓰러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게 하였습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하며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져야 합니다. 

마가복음 15:21에는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합니다. 시몬이 십자가를 진 것은 전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누구나 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나 십자가를 지는 자입니다. 
  
‘억지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엥가류산’으로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말은 왕의 특명을 받은 전령이나 군인이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강제로 말이나 사람을 차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5:41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하신 말씀은 바로 강제 징집되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징발되어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것입니다. 징발은 그 자체가 억지입니다. 징발이란 인격과 인권이 무시되는 행위입니다. 전혀 자신의 의지와 상관이 없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가 사할린 선교를 시작한 동기가 있습니다. 일제강점시기에 강제 징집된 한인들이 일본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사할린 등지에서 많은 노역과 전쟁을 하였습니다. 특히 사할린지방의 탄광에 징집되어 노역하던 한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란 전쟁을 치르게 되고, 전후에 사할린이 구소련의 영토가 되면서 소련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교회가 사할린에 있는 많은 고려인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곳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은 전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억지에 의하여 지금은 러시아인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게오르규의 ‘25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분들이 보셨을 것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는 자신의 의지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내 삶을 나의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강압에 의하여 살게 되는 요한 모리츠가 바로 내 자신입니다. 세상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억지에 의하여 사는 요한 모리츠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억지로라도 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밥을 먹는 것도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흔히 “입맛이 없으면 밥맛으로 먹으라”고 합니다. 왜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까? 먹어야 삽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밥을 먹습니다.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것은 생존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 가운데 인공신장, 인공박동, 산소호흡기 등에 의지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신체 기능을 억지로 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게 하는 것들은 억지로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억지로라도 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져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생존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을 보세요. 돈이 떨어졌습니다. 친구도 다 떨어졌습니다. 먹을 것도 없어졌습니다. 결국 그 아들은 돌아옵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기가 바람직하지는 못합니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는 이기적인 동기에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동기가 자의가 아닌 억지입니다. 자기필요에 의해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동기에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돌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어디까지나 개인적입니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믿어줄 수 없으며, 믿음의 행위도 대신 해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도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믿음을 요구합니다. 병자 자신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억지로라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해야 기적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힘들지만 억지로라도 내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야 낫습니다.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하시면 손을 내밀만한 힘이 전혀 없지만 억지로라도 내밀어야 손이 고침을 받습니다. 38년이나 걸어본 적이 없이 병들어 고생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으면 억지로라도 들고 걸어가야 낫습니다. 억지라도 믿음으로 행해야 기적은 나의 것이 되고 성취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 좋은 것만 할 수는 없는 세상입니다. 때로는 남을 위해 내가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합니다. 때로는 남을 위해 죽는 일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을 위해 하는 일들도 알고 보면 다 자기를 위한 일이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우리가 억지로라도 해야 할 일들이 있는 까닭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진짜 자기 십자가를 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레네 시몬을 위하여 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지신 십자가는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시몬은 자기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항상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2세기의 영지주의 이단이었던 바실리데스(Basilides)는 예수님의 신성만을 인정하고 강조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서 예수님 대신에 죽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착각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주장은 예수님은 신이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는 가설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런 이단설을 ‘가현설’(假顯設)이라고 합니다. 

이와 정반대의 이단설이 있었습니다. ‘양자설’(養子設)이라는 이단입니다. 이 이단은 예수님의 인성만을 주장하고 강조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신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어릴 때 삶을 보니 너무 착해서 하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하여 양자를 삼으셨다는 이론입니다. 가현설과 양자설이 다 초대교회의 이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매고 갔지만 대신 죽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구속의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이 일 외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와서 억지로라도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억지로라도 기도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은 우리의 영적 삶입니다. 봉헌하고 봉사하는 일도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이 다 우리의 영이 살기 위한 일입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알고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면 예수님이 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성경은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합니다. 분명히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분명히 예수님의 것이지만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가 진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0에는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인데 하물며 예수님께 한 것은 얼마나 대단한 축복입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고 크나큰 축복입니다. 
  
어떤 분이 쓴 글에 보니 구레네 시몬에게는 그 날이 ‘재수 없는 날’, 시몬은 억세게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구레네 시몬이 재수 없는 사람이며, 그 날이 구레네 시몬에게 재수 없는 날일까요? 사람의 눈에 볼 때는 재수 없는 날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재수 있는 날입니다. 영광스런 날입니다. 축복의 날입니다.  
  
우리 옛말에 ‘궁인지사번역파비’(窮人之事飜亦破鼻)라는 말이 있습니다. 안 되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반대말이 있습니다. “잘되는 분은 넘어져도 산삼뿌리 앞에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넘어진 것은 좋지 않은 것이지만 넘어지고 보니 산삼뿌리 앞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운이 좋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징발되어 그 무거운 십자가를 졌다는 것은 운이 없는 것일 수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며 복입니다. 
  
구레네 시몬에게는 재수 없는 날이 아닙니다. 구레네 시몬은 재수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넘어지고 나서 보니 산삼 밭이었고, ‘대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같이 거들기만 해도 영광인데 대신 지다니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런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져야 합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시몬은 구레네에서 예루살렘까지 유월절을 지키러 왔다고 봅니다. 서북단 아프리카에서 예루살렘까지 유월절을 지키러 왔다면 대단한 믿음이며 정성입니다. 이런 믿음이 이미 복을 받을 일입니다. 이런 복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는 영광과 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먼 길을 멀다 않고 예배하러 오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대부분이 다 멀리서 교회에 와서 예배하게 됩니다. 아마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 가운데도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잠시 걸어서 오신 분들은 몇 분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준비된 마음으로 참석하는 자는 덤으로 신앙의 대박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성경을 기록한 것으로 봐서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알렉산더와 루포는 교회 안에서 잘 알려진 유력한 인물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므로 아들들이 교회의 유력한 인물들이 되고 구원의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아버지의 수고로 가문이 복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은 가문의 영광입니다. 
  
로마서 16:13에는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합니다. 

루포라는 시몬의 아들은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낼 때에 로마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구레네 사람인 것으로 봐서 루포도 어릴 때에 구레네에 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었고, 집안이었지만 바울은 그의 집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어머니인 시몬의 아내에 대하서는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진 십자가는 그의 아내와 아들들인 알렉산더와 루포에게 무한한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었습니다. 
  
신라 내물왕 때에 고구려와 왜국이 강한 나라여서 신라의 왕자들이 볼모로 잡혀 갔습니다. 내물왕의 큰 아들 눌지가 왕이 되어 큰 잔치를 베풀게 되었는데 잔칫상에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동생들이 볼모로 잡혀간 지 어언 20년이 지났건만 아직 데려올 수 없으니 죽기 전에 동생들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이 말을 들은 충신 박제상은 “목숨이라도 바쳐서 구해오겠습니다”라고 왕에게 고하고 고구려를 향해 떠났습니다. 고구려는 눌지왕에 대하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터라 복호 왕자를 신라로 보내주었습니다. 신라에 돌아온 박제상은 왕에게 “제가 왜국으로 떠나면 나라를 배반하고 도망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트려주십시오. 미사흔왕자도 무사히 신라에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서 집에 들러지도 않고 배를 타고 왜국으로 떠났습니다. 그의 아내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바닷가로 갔더니 이미 배가 떠나고 있었습니다. 

박제상은 아내에게 “나랏일을 위해 적국으로 가는데  어찌 살아오길 기대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왜국에 도착한 박제상은 거짓으로 왜국에 항복하였습니다. “눌지왕은 내가 고구려에 가서 복호 왕자를 데려왔는데 상은커녕 반역자로 몰아 죽이려 하였습니다. 너무나 억울하여 도망하여 왜국에 왔습니다. 왕께서 저를 신하로 맞아주시면 충정을 다 하겠습니다”. 

왜국의 왕은 박제상을 믿고 그의 곁에 두었습니다. 왕의 신임을 받게 된 박제상은 미사흔 왕자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다에 안개가 자욱한 날 밤, 박제상은 왕자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자신이 왜국에 온 목적을 소상히 말하고 빨리 도망하라고 하였습니다. 미사흔 왕자는 둘이 함께 가자고 하였지만 둘이 함께 도망하기는 위험하니 혼자서 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이미 신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왕자는 어둠을 틈타 도망하였습니다. 한나절이 지나 왕자가 도망한 것이 발각되었고, 박제상은 잡혔습니다. 

왜국의 왕은 “내가 그대를 믿었는데 왜 배반하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본래 신라 사람으로 왕자를 구하러 왔습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을 다 했으니 죽이시오.” 왜국의 왕은 자신의 신하가 되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박제상은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고문을 당하고 결국 죽었습니다. 눌지왕은 미사흔 왕자가 돌아오자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박제상이 왜국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의 가족에게 벼슬을 내리고 박제상의 딸을 미사흔과 결혼시켰습니다. 박제상의 부인은 치술령이란 고개에 올라가 남편을 생각하며 통곡하였습니다.

그의 딸은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그의 부인은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박제상의 충성과 죽음은 그의 가족들, 자녀들에게 큰 벼슬을 얻게 하였습니다. 부모의 은혜가 자녀에게 전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수고는 그의 가족들, 특히 그의 아들들에게 큰 축복이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의 그 아름답고 순전한 믿음은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의 덕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조상의 믿음을 잘 전수한 것입니다. 조상의 믿음과 희생이 후손에게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과 주님을 위한 희생이 우리 자손들에게 큰 축복과 은혜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피츠버그의 조그마한 가구회사의 점원이었던 클레멘트 스톤은 어느 날 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한 할머니를 발견하고 상점 안으로 모셔 차 한 잔을 따뜻하게 대접하였습니다. 얼마 후 강철왕 카네기로부터 초청장이 왔습니다. 뒤늦게 안 사실은 그 할머니가 카네기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입니다. 

스톤은 그 어머니의 스코트랜드 별장에 가구 일체를 주문 받아 제작하여 일대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그 후에 클레멘트 스톤 상점에 가구 주문이 쇄도하여 일약 거부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베푼 약간의 친절의 대가는 그 아들로부터 오는 엄청난 부였습니다. 우리가 베푼 주님을 위한 작은 희생이 우리 자손들에게는 엄청난 은혜와 부의 축복이 함께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2:12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대신 해 십자가를 지는 고통, 억지로라도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 아무리 힘들지만 교회를 사랑하여 섬기는 이 모든 일에 대한 상을 하나님은 행한 대로 주실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지는 십자가의 은총은 나뿐만 아니라 후손이 함께 누릴 축복입니다. 이 귀한 십자가를 지는 자에 대한 축복의 대물림이 우리 모든 가정에 풍성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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