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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4) : 눈이 열린 시각 장애인 (마 20: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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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난 사람들(4) : 눈이 열린 시각 장애인 (마 20:29-34)

크리스천 유머연구소장 전영호 집사님의 글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삶에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그처럼 힘든 일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언젠가 그 잘나가던 방송일을 접으면서까지 주님일 만하겠다고 거룩한 고집을 피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매일 밀착 교제를 나누던 사람들과 단절하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든 일이었답니다. 성경공부, 기도, 교회일 봉사 등 열심히 주님 안에서 시간을 메워나갔지만 그래도 남는 시간들은 온 몸이 떨려올 정도로 허무하고 지루했답니다. 그래서 바둑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워낙 초보다 보니 상대해줄 사람이 없어 나 홀로 바둑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주님 일은 뒷전이고 나 홀로 바둑에 쏘옥 빠졌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께서 심방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방을 '급습'하였답니다. 바둑 두는 모습을 보고 목사님이 혀를 차며 “아니 혼자 두는 바둑이 그렇게 재미있습니까?”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머리를 긁으며 “예, 성경 말씀대로 하니까 재밌던데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성경 말씀대로요?”라고 하자 “마태복음 6장 3절 말씀대로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했더니 정말 재밌던데요.”라고 했답니다. 목사님이 한숨을 쉬며 “자,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은 주 여호와 하나님, 여기 오늘도 주님 안에 뜻을 세우지 못하고 방황하는 형제가 있습니다…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했는데 자신은 아멘 대신 “아다리!”라고 했답니다. 

머릿속에 온통 바둑알 밖에 안들어 있으니 '아멘' 대신 '아다리'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다 나은 행복한 삶을 위해 다이어트 계획을 세우고, 금연 계획을 세우고, 시간 계획을 세우지만 작심삼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공적인 변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 “스위치(칩 히스, 댄 히스 지음)”라는 책이 있습니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여대생의 이야기에서부터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간단하지만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낸 사례 뒤에는 공통의 패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심과 후회의 지긋지긋한 쳇바퀴에서 벗어나는 데는 어떤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 적인 변화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시험을 했답니다. 미국 시카고 교외의 한 극장 앞에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음료수 한 병과 맛없는 팝콘 한 통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조건은 영화 관람 후 잠깐 남아서 구내매점에 관한 설문조사에 응해달라는 것이었답니다. 관객 중 일부는 중형 용기에 담긴 공짜 팝콘을 받았고, 일부는 대형 용기를 받았답니다. 

이 실험은 "더 큰 통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먹게 될까?"였답니다. 실험 결과는 “큰 그릇에 먹는 사람들이 더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답니다. 영화팬들이 펜실베이니아 사람들이건 일리노이 사람들이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어떤 종류의 영화를 보여주든 문제가 되지 않았답니다. '더 큰 그릇 = 더 많은 섭취'라는 공식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사람들이 팝콘을 덜 먹게 만들고 싶으면 해결책은 더 작은 용기를 제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변화는 종종 사람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상황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상황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애연가들은 금연하는 것처럼 환장할 정도로 다루기가 힘든 변화를 위해 상황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 책에서는 코끼리 비유를 통해 성공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법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기수가 코끼리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갈 때를 상정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명료한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기수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Direct the Rider). 이성은 부정적인 면을 보기 좋아하기 때문에 '밝은 점', 긍정적인 면을 보게 하고 모호성을 없애고 명료하게 단순화하라는 것입니다. 슈퍼마켓에서 맛을 테스트하고 음식을 사게 만들 때 32가지를 놓아두면 소비자는 선택의 고민으로 8가지 때보다 더 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코끼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라는 것입니다(Motivate the Elephant). 이성과 달리 감정의 영역은 설득으로 변화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코끼리는 자기 정당화의 전문가여서 담배가 건강에 해로운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한다고 합니다. 코끼리가 걷게 하기 위해서는 보고 느끼게 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세차장에서 세차할 때 두 그룹으로 나누어 고객 카드를 나눠 주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8개 칸에 모두 도장을 채우면 무료 1회 세차권이 주었습니다. 둘째 그룹에는 이미 2개를 찍어준 10회 세차권을 주었습니다. 두 그룹의 고객들이 달성해야 하는 '목표'는 동일했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그룹과 이미 목표의 20퍼센트를 달성한 그룹입니다. 

몇 개월 후, 여덟 칸짜리 카드를 받은 고객 가운데 무료 세차권을 얻은 사람은 19퍼센트에 불과한 반면, 열 칸짜리 카드를 받은 고객 가운데 무료 세차권을 얻은 사람은 34퍼센트였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룹이 10개 칸을 모두 채우는 속도가 더 빨랐다고 합니다. 행동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한 가지 방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이미 목표 지점에 더 가까워져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지도를 통해 가는 길을 구체화하라고 말합니다(Shape the Path). 
상황을 바꾸어주면 사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 방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바뀌려면 인생의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 만나면 인생은 극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오늘 시각 장애인으로 불행한 인생이 복된 인생으로 극적으로 바뀐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만나 극적인 변화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우리가 고난의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야 합니다(47,52). 

오늘 성경에 보면 2명의 시각 장애인이 나옵니다. 이름도 없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에는 한 사람의 이름이 바디매오라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자기 이름도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선천적인 장애인지, 후천적인 장애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같은 경우는 대부분 후천적이라고 합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등록장애인의 수는 약252만명(2011년12월 현재)으로 총인구 대비 약 5.0%의 비중이라고 합니다.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장애발생의 90% 이상이 사고나 질병 등에 의한 후천적 원인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예비 장애인으로 누가 언제 어디에서 장애를 입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가장 많은 지체장애인(134만 명)의 53% 이상이 각종사고 등으로 발생되었답니다. 이 중 시각장애인은 약 22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시각장애인도 93%가 후천적 원인으로 발생했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장애가 다가옵니다. 정신 지체 (지능지수 69 이하)를 당할 수 있고, 청각 장애를, 지체장애를, 정서장애(행동 장애, 부적응 행동, 미숙아)를, 언어 장애를, 특정 학습 장애를, 복합 장애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경제적 장애를 당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그 상황에서 변화되고 싶고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시각 장애인들은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합니까? 
그 장애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3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눈은 보지 못하지만 듣는 귀는 있었습니다. 자신의 옆에 나사렛 예수가 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유월절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 곁에 지나가는 기회를 포착하였습니다. 자신의 이 천형같은 고통을 벗어 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뿔쌍히 여기소서." 그는 그의 장애 때문에 예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장애가 없었다면 예수님께 그렇게 간절하게 부르짖지 않았을 것입니다. 

2) 그는 자신을 불쌍한 존재인 것을 인정했습니다(46).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코 예수를 구주로 만나지 못합니다. 베드로처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처럼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인식의 한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앎이나 능력이 얼마나 미약합니까? 그런데도 극한 상황을 당하기 전에는 인간들이 아주 교만합니다. 그런데 이 장애인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리로 낮아지고 낮아지니까 자신이 긍휼이 여김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3) 장애로 인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그들이 듣기는 나사렛 예수라고 들었습니다. 나사렛이란 천하게 쓰임 받는 이름입니다. 인간 예수님을 비하하여 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자연인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소경은 대조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이사야 35장 5절에 보시면 메시야가 오시면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을 보시면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서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 분이 당신입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이 열리고 귀머리가가 듣고 있다"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이 시각장애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입니다. 억지 해석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은 10장 5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고백을 믿음으로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각종 장애가 다가 옵니다. 신체적 장애, 정신적 장애, 경제적 장애, 인간관계의 장애 등 각종 장애가 나가 올 때 그것으로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내 자신의 무능력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내 인생의 장애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는 사실을 믿고 장애물 때문에 오히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

리 주님께 가지고 나오면 우리는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장애인들이 얼마나 많이 치유를 받았습니까?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이 치유를 받습니다(요9:1-41). 간질에 걸린 아이가 치유를 받습니다. 중풍으로 누워 있는 자가 치유를 받습니다. 선천적 지체장애인의 치유(행3:1-4:22)를 받습니다. 

18년 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던 여인(눅13:10-17)이 치유를 받습니다. 장애로 인하여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기적을 체험 받았습니다. 장애가 아니었다면 그는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의 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눈이 있습니다. 심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영의 눈이 있습니다. 영안입니다. 육안의 고통이 오면 절만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심안이 열리고 영안이 열리는 축복의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주보에도 써 놓았지만 배재철 교수 같은 경우를 보십시오. 어릴 때 교회에 다니며 교회 성가대로 활동하면서 한양대에 들어가 성악을 전공하였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에 유학을 가 베르디 국립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국제적인 콩쿠르에서 차례로 입상, 유럽 각지에서 주역자리를 맡게 되었답니다. 오페라 계에서 테너로서의 입지를 굳혀가던 어느 날 갑상선 암을 선고받았답니다. 

그 수술로 목소리의 원천인 성대의 신경 일부를 절단해 결국 그는 목소리를 잃었답니다. 장애가 온 것입니다. 이 때 그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삶이 낮아진 것입니다. 성대 복원 수술을 받고 피나는 발성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교회 성가대 연습에 참여하기 시작했답니다. 2년 9개월 만에 공식 무대에 설 때 그는 화려한 오페라의 아리아가 아니라 찬송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였답니다. 그는 말합니다. “목소리를 잃은 후 하나님을 찾았고, 세상의 길을 잃으니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내어 주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인 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며 “소리를 잃고 불완전한 목소리로 부르는 찬양,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서라도 찬양 받으시길 원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곱고 큰 목소리, 그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노래를 불러왔고 그 실력으로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빛나게 되었건만 정작 하나님을 빛나게 하고 그분을 위해 찬양 한 번 제대로 드리지 못하였는데 시련을 통해 찬양을 하게끔 만드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 몸과 마음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제가 드릴 것은 너무도 작습니다.”라고 말합니다. 

2.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 문제를 해결 받는 데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시각 장애인들이 주님께 나아가는 데 장애물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문제를 해결 받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1) 보지 못하는 장애를 소리 지름으로 해결합니다. 보여야 군중을 뚫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머물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소리를 지릅니다. 없는 것만 보고 잃은 것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2) 사람들의 편견을 적극적 태도로 극복합니다.
바디매오가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합니다. 장애인 주제에 왜 소리를 지르느냐는 것입니다. 당시 장애인은 죄인 취급했고 같이 어울려 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너 같은 것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잘 갖추어진 사람만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더욱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해 주십니까? 

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머물렀습니다. 우리의 신음 소리를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고" 우리는 사람들의 편견의 장애 앞에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편견을 가지고 만나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대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시력 장애인 이삭을 축복의 전달자로 사용하였고, 시력 장애를 가진 바울을 세계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고, 지체 장애인 야곱에게 축복의 증거를 보여 주었으며, 언어 장애인 모세를 사용하였습니다. 오른손 지체 장애자 에후를 사용하였습니다. 범죄하고 시각장애자가 된 삼손의 기도를 응답해 주었습니다. 메시야의 작곡자 헨델을 아실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발사 겸 의사였습니다. 그는 아들을 법률 공부를 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헨델을 음악을 공부하였고 25세에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737년 파산한 뒤에 헨델은 중풍과 건강의 악화로 고통을 당하였고 56세가 되었을 때,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 23일간 기도하면서 때로는 음식을 전폐하면서 작곡에 몰두하여 "할렐루야"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는 68세 때 완전히 실명하였지만 좌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며 위대한 음악을 남기고, 장애에도 불구하고 음악 연주회를 지속하였습니다. 그는 루터교 목사님의 딸인 어머니의 신앙의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중풍과 허약한 육체, 시각 장애를 겪으면서도 "내가 나서 자라난 신앙 안에서 살다가 죽겠노라"고 말하며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정열적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실낙원의 저자 밀톤을 아실 것입니다. 밀톤은 1652년 실명하였습니다. 어려움은 계속 닥쳐왔습니다. 아내는 떠나고, 아들은 죽었습니다. 자신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실명한 상태에서 서사시를 쓰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딸로 하여금 한구절 한구절 받아쓰게 하여 "실락원(Paradise Lost)"을 1667년에 완성하였고, 이어서1671년 복락원(Paradise Regained)과 투기사 삼손(Samson Agonistes)을 합본으로 완성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만나 변화된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는데 방해하는 어떤 장애물도 넘어가야 합니다. 사명을 이루는데 방해하는 어떤 인간의 장애물도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디딤돌로 딛고 넘어 가야 합니다. 


3. 우리는 주님을 만나 옛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좇는 복된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앞에 머물러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2절에 보십시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 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33절을 보십시오.

1) 눈 뜨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물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늘 구걸하는 입술이 변하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의 정직한 고백을 듣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구걸하던 입술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인생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해 주실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것을 확인하고 예수님은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그를 불쌍히 여겨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시각 장애를 고쳐 주었습니다. 
그 때 그는 어떻게 합니까?

3) 겉옷을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납니다. 
오늘 본문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에는 소개 되어 있습니다. 겉옷는 그의 전 재산입니다. 소경으로 사는데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기온차가 심하기 때문에 밤에는 그것을 덮고 자야 합니다. 

4) 그들이 보게 되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마가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경은 어떻게 했습니까? 
보게 되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돈을 좇지 않습니다. 명예를 좇지 않습니다. 권력을 좇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좇는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생의 목표가 된 것입니다. 부자는 돈 때문에 근심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이제 과거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삶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난 과거의 종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할 수 있습니다. "과거 너 소경이었지?" 우리가 주님을 좇는 삶에서 그런 과거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너 창녀였지" " 거렁 뱅이였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변했습니다. 얼마나 그가 예수님께 충성하며 제 2의 인생을 살았겠습니까? 기적을 체험하였는데 적당히 살았겠습니까?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했을 것입니다. 이제 시각 장애인이 아닙니다. 거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좇으며 주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세계적인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가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사람입니다. 레코딩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천만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은 단 두장 밖에 없는데 카레라스가 바로 그 두 장의 주인공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인이라고 칭송을 받는 그가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이 41세로 백혈병으로 쓰려졌습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나이, 이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억울한 나이였습니다.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 열정을 다하여 연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사전 연락도 없이 다가온 것은 죽음의 선고였습니다. 그러나 호세 카레라스는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손길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평생 주를 위해 충성하겠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만 하고 앉아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골수 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치료를 받았습니다. 힘겹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은 빠지고 손톱과 발톱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공연 수익금을 모두 이곳으로 보내어 졌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보다 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주님을 좇는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고난없이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인생보다 고난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부함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하고 지옥 가는 사람보다 오히려 가난 때문에 예수님 만난 사람이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지식의 부요 때문에 예수님 만나지 못하고 교만하게 살다 인생 마치는 것보다 오히려 부족하여 예수님 만나 겸손하게 한 평생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없다고 하면 오히려 그 건강은 저주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서 육신의 눈은 떴는데 영혼의 눈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9명의 문둥이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가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도 받고 밥도 얻어먹었지만 예수님을 좇지 않고 예수님과 전혀 관계없이 산 사람도 있고 예수님을 비난하며 대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따랐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만나 육신의 눈이 열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의 눈이 열리고 사명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사명의 눈을 뜨고 사명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세를 부를 때 사명자로 부릅니다. 바울을 부를 때, 아브라함을 부를 때, 요셉을 부를 때 다윗을 부를 때, 베드로를 부를 때 사명자로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이 사명의 눈이 잘 열리지 않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불렀지만 조금 어려워지니까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베드로에게 찾아갑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을 치라"라고 사명을 주며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모세 부름 받은 후 40년 후에 사명의 눈을 뜨게 됩니다. 리빙스톤, 아펜젤러, 언더우드, 토마스, 슈바이처 사명의 눈을 뜨고 예수를 좇는 삶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낮은 배는 종이배도 못 띄우지만 깊은 물은 기선을 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시간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시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을 요구하겠습니까? 그것을 주신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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