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부싯돌같은 구속주의 얼굴 (사 50:4-9)

첨부 1


부싯돌같은 구속주의 얼굴 (사 50:4-9)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3년여의 공생애를 마감하시면서 배척과 모욕을 당하시고 고통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한 주간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기간을 보다 더 경건하게 지내면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주간으로 삼아왔습니다. 우리는 오늘 오후 예배시 성찬식을 가지며 주님의 고난 받으심을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셨던 고난에 관하여는 신약성경, 특히 사복음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처럼, 구약의 예언 중에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이사야서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에 대하여 마치 그것이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실처럼 과거 시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 유명한 ‘4대 종의 노래’(이사야 42, 49, 50, 53장)는 신약성경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사뭇 다른 감동을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4절을 봅시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 자신의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자신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본문은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먼 후일 그리스도에게 일어날 일들을 과거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학자의 혀’를 가지셨습니다. 그는 어떤 교훈을 전할 것인가를 아셨고, 또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아시는 자이십니다. 그는 ‘학자의 혀’로써 연약한 자들과 죄의 무거운 짐에 눌리는 자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교훈을 받는 학자의 귀를 가지셨습니다. 선지자에게는 학자의 혀만큼이나 귀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확하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학생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선생이 될 수 없습니다. 학자처럼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본시 잘 졸고 소홀히 들으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깨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침 시간은 우리의 영혼이 가장 활기를 갖는 시각으로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적절한 시간입니다. 성경에도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갔다고 했습니다(눅 21:38). 그리스도께서는 아침에 가르치셨습니다.

5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라 했습니다. 주님은 어려움과 난관을 예견하셨습니다. 비록 종으로서 고생을 하고 끊임없이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아셨을지라도, 그리고 아주 천한 자리에까지 자신을 낮추셔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망치거나 회피하거나 절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복종하셨습니다. 

6절에는 주님이 당하시는 고난이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당하신 것은 심한 고통과 모욕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모욕을 능동적으로 당하셨습니다. 그는 등을 ‘맡겼고’, ‘얼굴을 가리우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당하셨는데, 이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자신의 의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7절이 계속됩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우리 주님은 자신의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인류 구속의 대업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셔야 했습니다. 굳은 결심을 하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굳은 결심이 어떠하며, 이 결심을 꺾기 위한 마귀의 시험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제자 된 우리도 주님의 굳은 결심을 본받아 성공적인 사역을 하게 되는 계기로 삼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다”고 하심 (= 굳은 결심을 보이심) 

7절=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앞선 4-6절에서는 여호와의 인도하심에 의존한 여호와의 종이 모진 고난을 받는 중에도 전적으로 인종(忍從)한다는 사실을 노래하였습니다. 이제 본절 이하 9절에서는 여호와의 도우심에 의존하는 종이 승리할 것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노래합니다. 

먼저 7절은 그토록 견디기 힘든 치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종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종으로 세우신 주 여호와께서 자신을 돕는다는 확신과 그 여호와께서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 것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종, 곧 예수 그리스도는 극심한 수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취급을 당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기가 당하는 그 고난이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주신 감당해야 할 사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여호와의 도우심과 자신의 사명을 확신한 결과 자기의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 동사(굳게 하다, soom)의 문법적 용례는 ‘자기 스스로 자기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다’는 것을 명백히 합니다.

‘부싯돌’(할라미쉬)은 ‘강퍅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단어로서, 아주 단단한 돌을 의미합니다(신 8:15). 그러므로 본문은 낯이 매우 두꺼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말에서도 전혀 수치스럽지 않게 느끼는 것을 ‘낯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것은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치욕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처지를 전혀 치욕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을 생생하게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부싯돌같이 굳게 한 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니고 그의 얼굴입니다. 주님은 마음으로는 죄인을 긍휼이 여기시며 인내하시고 온유하셨지만, 그의 얼굴은 단호한 결심으로 굳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굳은 결심은 6절의 온유함과 갈 결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셨습니다. 자신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셨습니다.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온유함으로 자신을 지키시며 실수하지 않으셨습니다. 인류를 위하여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는 일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의 현장에서 그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굳은 결심으로 주님은 주저하지 않고 갈보리 십자가 형장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의 상징입니다. 나무에 달리는 것 자체가 저주의 표시입니다. 나무 위에 발가벗겨 달려서, 지나가는 여러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며, 극심한 통증 가운데서 서서히 죽어가는 신세가 된다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나가시면서 굳은 결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눅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눅 13:33=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특히 주님께서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면서 제자들에게 ‘일어나 가자’고 권면하시던 모습에서 그의 굳은 결심이 어떠했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요 14:31).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님은 가장 어려운 때에도 자신의 마음에 품은 결심을 더욱 굳게 하시고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사랑합니다! 


2. 고난과 수욕을 당당하게 이겨내심 (= 많은 시험을 받은 주님의 굳은 결심) 

6절=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의 굳은 결심은 여러 면에서 시험을 받았고,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결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으셨습니다. 6절은 여호와의 종이 당할 극심한 고난과 더불어 그 고난 가운데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다 이겨낸다는 사실을 예언합니다.  

그가 이런 극심한 고통을 인내로 견뎌낸 것은 그 고통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것이요, 그 고통을 통해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를 이루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여호와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여호와의 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굳은 결심은 많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자신의 등을 맡기셨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면서도 무시무시한 채찍질을 감내해야 했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등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라고 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수염은 멋으로 기르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인격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수염을 깎아버리거나 뽑아버린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완전히 깔아 뭉개버린다는 뜻이었습니다. 아울러 이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형벌(느 13:25)로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종은 이런 치욕적인 일, 이처럼 무고한 모독과 형벌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주님은 자기 수염을 뽑는 자들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뺨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오른 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 뺨까지 내어 밀라는 자신의 가르침(마 5:39)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다” 고 했습니다. 여기 ‘모욕’은 주먹과 손바닥으로 얼굴을 맞는 것을 통해 여호와의 종이 느끼는 인격적 상처를 의미합니다(마 26:67). 그리고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는 것은 수염을 뽑히는 것보다 더 드문 일이며 더 굴욕적인 일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종은 그 굴욕을 피하기 위해 저항하거나 얼굴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무기력해서가 아니라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임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부싯돌 같은 얼굴로 극심한 고난과 수욕을 당당히 이겨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결심은 많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엄청난 시험 속에서도 그의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여 모든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그 결심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해내기 위한 속죄 양으로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피를 뿌려 우리의 죄값을 치루어야 하는 것에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주님이 일생을 통해 계속하여 시험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을 때, 세상은 주님을 왕으로 떠받들려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체험한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너무나 위대한 존재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4). 

무서운 시험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의 모습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사랑하는 제자들과 주위사람들, 심지어 그의 가족까지 그의 결정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많은 오해가 있었고, 이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참기 어려운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 7:3,4=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사도 요한은 이 부분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주석을 덧붙였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절).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 말리는 베드로를 향해 주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그의 제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버려두고 도망친 것은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크나큰 상처가 되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3년간의 교육이 허사가 된 듯 보이는 사건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오히려 저들의 안전을 걱정하셨습니다.

주님은 여러 경우에 자신의 사역을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총독 빌라도는 그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주님에게는 천사들을 부리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실제로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십자가 밑에서 사람들은 “어디,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나 보자!”고 하면서 볼성사납게 야유하며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혹 속에서, 죽음에 대한 고통은 말할 수 없이 강렬했습니다. 십자가의 그 고통, 그 목마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 그리고 죽음! 그러나 이것들 중 그 어느 것도 부싯돌 같은 주님의 얼굴을 변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받으신 시험들은 한결 같이 교묘한 유혹이요, 자칫하면 넘어갈 수밖에 없는 함정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미동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사랑합니다. 


3. “나를 정죄하는 자는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하심 (= 부싯돌 같은 승리의 확신) 

8-9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여호와의 종이 외치는 승리의 함성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를 정죄할 수 없다는 승리의 외침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그 종을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데 누가 그를 죄 있다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롬 8:31-39)!

본문은 여호와의 종이 지금 법정의 피고석에 서 있는 상황을 설정하고 그와 다투고 대적하는 자들을 검사로, 그를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여호와를 변호사로 설정합니다. 여기에서 여호와는 단지 변호사일 뿐 아니라 최종 판단을 내리는 재판관의 자격까지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종 가까이 계십니다.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담대한 외침입니다. 이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변호하며 의롭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아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을 정죄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도전하는 내용입니다. ‘다툴 자’(야리브)라는 단어는 법정에서 공방을 벌이는 데 쓰이는 용어입니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여기 ‘나의 대적’이란 여호와의 종에 대해 불리한 소송을 제기한 자를 의미합니다. ‘누가 나를 대적하는 고소장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자가 있다면 멀리서만 떠들어대지 말고 가까이 와서 진실 여부를 한 번 따져보자’고 강력하게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잡히셔서 가야바의 뜰에서 빌라도에게로, 거기서 헤롯에게로, 다시 빌라도에게로 끌려 다니셨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여러 가지 죄목으로 예수님을 얽어매려 했지만, 그들의 정죄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고, 이것은 이방인인 빌라도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서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은 부싯돌 같은 승리의 확신을 가지셨습니다.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아무리 좋은 옷이라 할지라도 오래 입게 되면 낡아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의로운 자를 정죄하는 자들이 아무리 세상에서 형통하게 산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심판대 앞에서 멸망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는 표현은 천에서 기생하는 좀이 먹어 떨어지는 경우를 가정한 표현인데, 이 비유는 의로운 종을 정죄하는 자들이 마지막 날 심판으로 멸망하기 전에라도 생존시에 갑자기 재난을 당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고난의 현장에서 사람들로부터 극심한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순간에도 그것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택하신 자들의 영원한 수치를 벗기기 위하여 수치를 당하심을 확신하셨고, 따라서 그의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여 이 모든 고난을 이기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대적들 앞에서 입증시켜 주셨습니다. 어떻게 입증하셨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입증하셨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려 그의 의로움을 입증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이와 유사하게 장차 우리 성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부활을 통해 입증하신 것처럼 우리의 의,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난 성도의 의를 입증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실 것입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한 주간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서 예수님의 보혈을 묵상하며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세상에서 다함없는 수치와 굴욕을 당하셨지만, 결코 굴하지도 나약해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치욕스런 순간에도 누구보다 의연하셨고 당당하셨습니다. 그 당당함이란 다른 이들이 알아주고 높여주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을 바로 알고 그 일을 행함에 따른 당당함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당당함, 의연함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혹 세상 사람들이 무시하고 조소한다 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포기한다면 그것처럼 수치스런 일은 없습니다. 

15세기 말에 미지의 세계를 찾아 항해에 나섰던 컬럼버스는 결단의 사람이요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반항적인 선원들을 앞에 두고 컬럼버스는 “항진을 계속해! 계속 항진!” 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가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이라면 어떠한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계속 항해하는 용기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굳은 결심을 소유한 사람이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유혹이나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결심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은 부싯돌과 같았습니다. 아무도, 어떤 상황도 그의 결심을 꺾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굳은 결심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접붙임’이고, ‘하나님 안에서의 신앙’ 입니다. ‘성령의 충만’ 만이 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사업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 ‘굳은 결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호한 결단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여러 가지 유혹들과 시험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굳은 결심으로 이 모든 시험들을 이겨왔습니까? 아니면 겟세마네 동산의 준비되지 못했던 제자들처럼 패잔병이 되고 말았습니까? 

성도 여러분! 주님처럼, 참으로 예수님처럼, 마음에 온유한 심성을 가지고 닥쳐오는 모든 시련을 참으며, 내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부싯돌 같은 얼굴로 나아갑시다. 단호한 결심으로 영적 전투의 장으로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같이, 제자 된 우리도 마땅히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겠습니다. 찬송가 461장에 있는 것 같이 주님은 우리의 결심을 확인하십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성도 대답하였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기억하십시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