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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이신 그분과 동행하기 (엡 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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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이신 그분과 동행하기 (엡 4:22-24)

[에베소서 4장 22-24절]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어느 목사님이 교회 건축을 하면서 무척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 어느 원로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는 중에 계속해서 한숨을 쉬었던 모양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원로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묻습니다.
“무슨 걱정이 있는가? 계속해서 한숨을 쉬기에…”
“예, 사실은 교회 건축을 하며 너무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호통을 치십니다.
“어떤 주인도 소에게 주저앉을 만큼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짐은 ‘감당할 수 있는 사역’이야!”
어떤 주인도 소에게 짐을 지우고 외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같이 가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때, 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동행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동행이 무엇인가요?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 다른 하나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입니다. 옛사람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홀로 사는 사람이고, 새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옛사람에 대하여는 [표준 새번역] 성경이 훨씬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God's way”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가 가는 길이 그 목적을 벗어나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산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인데, 우리가 가는 길이 살다가 썩어 없어질 길이라면? 이 둘은 결코 동행할 수 없죠.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에 맞춰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따라오셔야 할까요?
다른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쉬울까요? 어떤 것이 편안할까요?

이렇게 묻는다면 간단한 답이 나옵니다. 우리의 욕망이 움직이는 데로 사는 것이 편안하고 쉬운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옛사람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의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무줄을 잡아당기면, 놓자마자 다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죄의 본성이 늘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긴장”이 필요합니다.

언젠가 제가 결혼 주례를 하는 커플과 식사를 하면서 제가 신혼 때의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제 아내는 날씬한 편에 속합니다. 그 반면에 저는 조금 비만인 편에 속하죠. 농담처럼 한 이야기지만, 결혼하면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살찌는 사람은 한 사람이면 족하니 당신은 50kg을 넘는 일이 없도록….

사실 부부는 가장 편한 사이지만, 서로 관리하지 못하면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상대방을 위해 관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예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병이나 연약함으로 어찌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날 동안 긴장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장 21-24절에 보면 에녹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녹 하면 생각나는 것이 “동행”입니다.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동행했을까요? 아마도 그 이전에는 그렇게 신실한 삶을 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이 ‘창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 의미가 ‘죽음 뒤에는 심판이 온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에녹이 아들을 낳은 후 심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심판을 생각하니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죠.
심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평가를 받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지만,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한 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이 심판 아닐까요? 오늘 죽음 앞에서 당신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세계적인 대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이 프랑스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호텔에 배달된 신문기사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문에는 “알프레드 노벨, 사망”이란 기사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노벨의 형이 사망했는데, 그 이름을 잘못 기록한 오보 기사였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그 기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종일 호텔에 머물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약 이대로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

세계적인 발명가라는 명예와 엄청난 재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명예와 엄청난 재물이 죽음 앞에서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인간 역사에 큰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번영을 위해 만든 다이너마이트가 인간을 마구 죽이는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벨은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습니다. 바로 그 기금으로 노벨상(Nobel Prize)이 만들어졌습니다.

자신이 죽었다는 신문의 오보가, 노벨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자신이 죽었을 때, 어떤 평가를 받게 되겠느냐는 물음이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을 만들었습니다. 에녹의 삶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순간부터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순종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동행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동행은 일치입니다. 무엇과의 일치입니까?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합창단이 멋지고 훌륭한 합창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단원이 일제히 악보와 지휘자의 지휘를 따라서 노래해야만 합니다. 악보와 지휘자에게 맞추어져야만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하여 내 뜻이나 욕심 등의 것들을 일제히 버리는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인격을 닮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동행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라보면서 왜 그토록 사랑스러워합니까? 자녀가 부모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이 타국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면 서로 밥값을 내겠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같은 고향이라고 하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맞춘다는 것, 하나님과 공통분모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누구와 동행하다가 하나님 앞에 갈 것이며, 무슨 일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갈 것입니까?


“동행” 그 점진적 거룩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행복이나 건강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점진적 과정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구체적 과정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24절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을 따라 살지 않는 인간들은 시간이 지나면 야망이 바뀝니다. 주로 환경적인 요인에 따른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목적이 같습니다. 그 목표는 “새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름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시작하지만 “동행”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따라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의”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를 하나님도 인정하실 수 있을까? 이 기준은 늘 “진리” 앞에서 판가름납니다. 우리 나름의 주관적 판단이 아닌,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역자”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이지, 하나님의 뜻을 유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동정심을 핑계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는 그 어떤 행위들도 허용하지 마십시오. 거룩은 당신의 발걸음이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고, 당신의 혀로 더러운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며, 머리로 더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삶의 영역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심사를 거치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나를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늘 정당성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잠깐 타협을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타협이 목적이 되는 경우를 봅니다. 하나님을 뜻을 수행하는 그 어떤 것을 떠난 것도 우리 삶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을 점진적으로 거룩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유혹이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만나 교회를 시작하면서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꿈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모여야 하고, 모인 사람들이 훈련을 받고 흩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이고 나니까, 흩어지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 순간 모여진 교인들도 목적은 알지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목회자인 저도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변을 보면서 참 도전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목회자들이 은퇴할 때가 되면 일을 벌이지 않으려 합니다. 편안하게 은퇴하기 위해서입니다. 솔직하게 우리의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놓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생각이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따라!” 끝까지 의와 진리의 길을 갈 수 없는가?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을 하나 더 소개합니다.
주님의 삶 가운데서 예루살렘은 십자가 상에서 그분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절정에 이르는 장소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그곳까지 가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친구가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주님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핍박받는다는 이유로 어떤 마을들을 급하게 지나지 않으셨고, 그분이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어떤 마을에 오래 머물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감사나 배은망덕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주님의 뜻을 한 치라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구습을 벗고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변화되어서 새사람을 입어야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옛사람 그대로 술 취하고 방탕하고 음란하고 세속적인 사람으로 하나님과 같이 살려고 해도 하나님이 떠나고 같이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려면 주님과 성격이 같도록 하려면 우리가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늘 회개하고 늘 성령 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설교에서 들은 내용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더러워집니다. 매일 같이 세수하지 않아요. 옷도 정기적으로 빨아 입지 않아요. 방도 매일같이 청소하지 않아요. 저는 어릴 때 방 청소는 내 담당인데 우리 형제간이 아홉이기 때문에 언제나 방이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애들이 다 일어나서 그냥 옷도 이 구석 저 구석 던져 놓고 요강에 오줌도 넘치도록 해서 방바닥에 오줌이 흥건하고 뭐 쓰레기가 매일 많습니다.

항상 아버님께서 저에게 청소를 하라고 해서 하루는 청소를 하다가 하도 화가 나서 빗자루를 땅에 확 던지면서 “이놈의 소제 밤낮 해도 무슨 소용이냐?” 해놔도 또 더러워지고 또 더러워진다.
아버님께서 “용기야 이리 오너라!” 가니까
“너 여기 앉아라.”
“뭐라고 그랬냐?”
“아무리 청소해도 자꾸 더러워지기 때문에 청소하지 말고 그대로 살자고 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인생은 밤낮 청소하는 것이다. 밤낮 더러워지면 밤낮 청소하고 밤낮 더러워지기 때문에 때를 또 씻고 목욕하고 밤낮 더러워지므로 옷을 빨래하고 밤낮 더러워지므로 얼굴을 씻고 밤낮 양치질을 하는 것은 늘 더러워지기 때문에 씻어야 하느니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로 산다는 것
우리가 이제 깨달아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의와 진리를 따라 살 때 가능한 것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순간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죠.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기꺼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의와 진리의 길임을 굳게 믿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책의 저자 케이티 데이비드는 그의 사역의 현장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에게 많은 명령을 하셨지만. 내가 알기로 그중에 안전하게 살라는 명령은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안전한 삶으로 부르신 적이 없다. 대신, 위험한 순간에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손안만큼 안전하고 좋은 곳은 없다.

우리는 흔히 의와 진리를 따라 사는 일이 무척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힘든 것은 “결단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결단하고 나면 그 길을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케이티의 고백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역자가 같은 고백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 친구들과의 삶 속으로, 새로운 문화의 한복판으로 한참 들어간 뒤에야 하나님이 나를 둘러싼 패러독스들을 통해 내 시각을 바꾸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내 세상을 거꾸로 뒤집는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하나님은 뒤집어진 내 세상을 똑바로 세우고 계셨다. 미국에서는 100달러로 신발 한 켤레밖에 살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100달러면 굶주린 가족이 몇 달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예전에는 바쁜 하루를 보낸 뒤에는 소파에 쓰러져 청춘 드라마를 보며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우간다에서는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서 예수님께 새로운 힘을 달라고 울부짖는 것 외에는 지친 몸과 마음을 풀 데가 없다.

의와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사실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장소’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아주 멋진 말이죠.
“주님은 모두를 돌보지 않아도 좋으니 ‘딱 한 명만’을 위해 가던 발걸음을 멈추라고 말씀하신다.”
참 희한한 일이죠?
우리는 너무 거창한 일을 꿈꾸며 사소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동행”은 우리 삶의 작은 혁신을 의미합니다.
실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실천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혁신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결단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즘 경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innovation’이라는 말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혁신적 신상품을 내놓는 것이나 사업 모델 혁신이라고 하죠.

미국 네브래스카대학의 석좌교수인 이상문 씨는 ‘이노베이션 3.0’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노베이션 1.0시대는 내부 자원만을 가지고 활용하는 폐쇄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 2.0시대에는 일부 분야에서 기업들이 아웃소싱이나 제휴 등을 통한 경영을 했고, 3.0시대에는 외부에서 자원과 아이디어를 갖다 쓰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자원을 외부에 제공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P&G는 전체 제품의 52%를 외부 아이디어에서 얻고 있다고 하죠. 기저귀 같은 경우 기저귀를 사용하는 아기 엄마들보다 기저귀를 잘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기 때문이라고,

미국 통신회사 AT&T도 새로운 서비스 개발을 위해 아이디어를 공모하면 3만 개씩 몰리기도 합니다.
일라이릴리(Eli Lilly)라는 제약 회사는 연구개발 과정에서 18만 명의 과학자 네트워크를 활용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외부에서 자문하고 채택된 아이디어에 대해선 보상도 합니다.
개그 콘서트라는 코미디프로에서도 소재를 외부에서 얻습니다.
‘애정남’이나 ‘꺾기도’ 같은 프로그램의 소재가 고갈되자 시청자들이 참여해 아이디어를 내고 채택된 것으로 개그를 만드는 것이죠.

이제 일반 사회에서도 잘 아는 것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참 혼자 노력했던 적이 많은 것 같습니다.
“동행”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의 혁신은 최고이신 그분과 동행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는 다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런 상황은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초기 교회에 그대로 해당하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가 안 되고 동의할 수 없으면 결국 떠납니다. 더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처럼 흉내를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런 믿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 떠나게 됩니다. 그 제자가 모두 이기적이거나 세속적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말씀을 어렵다고 느끼는 것뿐입니다. 자신의 세계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부도덕하거나 비상식적으로 운영되어서, 또는 따뜻한 사귐이 없어서 거기에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나는 것은 교회가 반성해야 할 문제지만, 그들이 복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떠난다면 오히려 희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부단히 영적으로 도전을 해야 합니다.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집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충실하든지 아니면 떠나든지 하게 해야 합니다.

동행은 시작입니다.

조건을 딱 맞추고 동행을 시작하려는 것은 어쩌면 동행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을지 모릅니다.
김난도 교수의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많은 미혼자가 남성의 경우엔 경제적 사회적 준비가 덜 갖추어졌다는 이유로, 여성은 과중한 직장생활과 육아 등 가정생활을 병행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결혼을 이루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경험자로서 한 가지 충고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준비나 자신감이 확실해지는 시점이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이다.

회사에 할 일이 잔뜩 밀려 있는데 친구들이 여행일정을 잡으면 무척 부담스럽다. 이번에는 빠졌으면 좋겠는데, “같이 안 가면 죽음!”이라는 친구들의 협박에 출발 직전까지 무리를 거듭해서 겨우 함께 떠난다. 어떻게든 출발해서 차창 밖으로 흔들리는 풍경을 볼 때, 그제야 ‘그래도 떠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이 그런 것 같다. 준비도 자신도 없지만 일단 함께 출발하고 나면, ‘그래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께서, 누군가 결혼을 주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애 낳는 것 연습해보고 시집가는 여자 없다”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마음먹었거든, 실행하라.

그렇죠?
의와 진리를 따라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죠.
동행의 시작입니다.
동행의 paradox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가기에는 버거운 그 길에 주시는 힘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죠.
동행은 “능력을 받아” 가는 길입니다.
동행은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길입니다.
동행의 끝에는 진리가 기다리고 있고, 그 길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동행은 결단입니다.
결단이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결단입니다.
이 세상에 주여, 주여 하는 일들이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동행하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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