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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이신 그분에게 집중하기 (막 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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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이신 그분에게 집중하기 (막 9:14-29)

누군가 나를 집중해 준다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그분을 집중할 때가 아닐까요? 집중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닮고 싶은 열망을 가질 때 말입니다.

지난주에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 아이들이 담임목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닮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답니다.
심지어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할 때 “담임목사님처럼 해주세요!”라고 한다죠.
지난 주일에는 변화산 코인을 4개 모은 아이들을 축하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이가 저에게 와서 속삭였습니다.
“목사님 늙으면 용돈 많이 드릴게요.”
참 기분 좋은 날이었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그분에게 집중하고 그분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갖기를 원하시죠. 우리는 이런 친밀함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한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변화되는 기이한 일을 보고, 예수님께 대한 확신을 하고 내려오게 됩니다. 그곳은 신성한 곳, 황홀한 곳, 그래서 더욱 머물고 싶은 곳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데리고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오자마자 이들이 접한 일이 논쟁이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14절에 보면,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하는 곳은 “세상”입니다. 변화산에서는 다른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주님만 보이고 편안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야 하는 세상은 ‘저곳’이 아닌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 10월 첫 번째 말씀을 열었을 때 눈에 확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집중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집중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후 일어난 사건이 마가복음 9장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표현입니다.

변화산에서 정상의 시간을 보낸 후 우리는 현실로 내려와서 조금도 쉴 틈이 없이 현실의 문제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현실은 아름답지도 않고 시적이지도 않으며 신이 나는 일들도 없습니다.
높은 정상에서 느끼던 희열은 이제 계곡의 지긋지긋한 일들로 메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 계곡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낮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가치를 진정으로 드러낼 수 있고 우리의 충성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 마음속의 의심이 뿌리째 뽑히는 곳은 낮은 계곡입니다.

누가복음 9장의 사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시고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요? 16절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다른 제자가 많은 군중과 서기관과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의 간절한 애원을 들어주지 못하고 곤경에 처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상황을 모르시기 때문에 “무엇을 변론하느냐?” 물으신 것이 아닌 듯합니다.
왜냐하면, 19절 말씀이 보여주지요.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답답하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그렇게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늘 문제에 집중하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 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믿음이니라.”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이 말씀은 꼭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변화산 사건과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온 이야기가 연속되어 나오는 것은 아주 큰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문제와 예수님께 집중해야 하는 순간들은 예배 때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예배를 마치고 삶으로 돌아갈 때 더욱 절실한 것인데, 우리는 반대로 산다는 것이죠. 예배 때는 집중하고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할 것 같은데, 삶으로 들어가면 그 믿음이 어디로 갔는지 실종되어 버리고 맙니다.


집중한다는 것

“집중”이 무엇인가요? 산만하지 않게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것도 여러 종류가 있지요? 아무 생각 없이 멍청하게 바라만 보는 것이 있고, 문제의 본질을 가지고 갈급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 말입니다.

지금 누가복음 9장을 둘러싼 상황을 보세요.
군중이 모여서 지켜보지요. 서기관들이 지켜보며 혹시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는지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지요. 당장 아버지는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하지요. 결국, 제자들이 당황한 것은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하고 집중력이 흩어진 것입니다.

본문 21절에서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아버지의 대답입니다. “어렸을 때부터입니다. 아이가 발작을 하면 불어도 들어갑니다. 거품을 물고 쓰러집니다.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세요.”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단순한 병이 아니라 귀신의 역사인 것을 아셨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아셨으니, 방법도 나옵니다. 하늘의 권세로, 주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귀신은 굴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윌리엄 힌슨이라는 유명한 동물 조련사가 있습니다.
그는 사자에게 다가갈 때 의자를 들고 들어갑니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묻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무서운 맹수에게 들어갈 때는 회초리와 권총 같은 것을 가져가야 할 것 같은 데 말입니다. 그의 설명이 이렇습니다.
“의자의 네 다리를 사자를 향하여 들고 들어갑니다. 그 이유는 사자로 하여금 의자 네 다리에 동시에 초점을 맞추려고 애쓰도록 하면서 일종의 무기력증에 사로잡히도록 하는 것이죠. 결국, 집중력이 분산된 사자는 온순하고 유약하게 됩니다.”

참 재미있죠. 초점이 흩어지면 힘을 모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무기력함을 생각해 보셨나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 가운데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이르는, 아니 헌신된 그리스도인을 칭하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disciple’ or ‘follower’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
뒤따르기 제일 좋은 것은 앞사람을 바라보며 가는 것입니다. 더욱 정확하게 발걸음을 쳐다보고 가면 꼭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어릴 때 학교에서 그런 실험을 해보신 적이 있죠?
볼록렌즈로 종이를 태워본 경험 말입니다. 태양 빛이 흩어지면 종이를 태울 수 없지만, 볼록렌즈를 통해 집중되면 종이를 태웁니다.
무딘 화살은 과녁을 뚫을 수 없습니다. 집중한다는 것은 날카롭게 날을 가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도 집중력이 많은 영향을 준다고 하죠.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집중하고 노력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습니다.

현직 교사인 유미현 씨가 쓴 “넌 죽어라고 공부하니? 난 집중해서 공부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공부는 죽어라고 하는 것보다는 집중해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자는 집중력은 공부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하며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을 비교할 때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집중력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집중이 무엇일까요?
많은 프로그램을 경험하면서 집중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예배에 참석하면서 집중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이 집중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지, 이것 자체가 집중은 아닌 것이죠.

권석 PD의 책 [아이디어는 엉덩이에서 나온다]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예전에 “대단한 도전”이란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때 일이다. 첫 회 게스트로 탁구 금메달리스트 현정화 선수를 섭외했다. 탁구대 한쪽 모서리에 탁구공을 올려놓고 반대편에서 라켓으로 공을 쳐서 단 한 번에 맞히는 것이 도전 과제였다. 아무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 해도 확률적으로나 상식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 아닌가. 현정화 선수도 자신이 없다고 했다. 공정성을 위해 많은 방청객을 스튜디오에 앉혀 긴장감을 더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정화 선수는 단 한 번뿐인 기회를 덥석 잡았다. 방청객들도 경악했다. 당시 MC였던 이경규도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어 한 번 더 맞혀보라고 주문했다. 놀랍게도 또 성공! 현정화 선수 자신도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런 게 킬러 본능이다. 결정적인 순간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해서 확률과 상식을 초월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마이클 조든이 그렇게 위대한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는 그의 활약이었죠. 이승엽 선수가 국민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집중력이었습니다.

성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된 삶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따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일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당장 중요한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2012년 5월 19일 자 Weekly biz에 보면 인간의 기억력과 집중력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안에 대해 모든 정보를 기억하려고 애쓰다. 핵심적인 기억을 전부 놓쳐 버린다. 기억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핵심적인 세 가지만 기억하도록 노력하는 편이 낫습니다.”
경영에 관한 이야기니까,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텐데요. 대개 우리의 문제는 말할 것이 너무 많고, 기억할 것도 너무 많고, 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적 기억과 집중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부하 직원에게나 자녀에게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할 때도, 시간이나 일의 분량을 지시하는 것보다는 가장 중요한 것부터 해야 할 목록을 정해 주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금 설교준비를 하면서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내일 설교를 먼저 확인할 것인가?
읽은 책을 정리할 것인가?
읽다가 만 책을 다 읽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 하는 설교를 계속 준비할 것인가?
그런데 15분 후면 결혼 주례가 있고, 끝나고 한 시간 후에는 회의가 있고, 저녁이 되면 약속이 있습니다.
결국,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대로 남습니다. 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결정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집중한다는 것은 결국, 선택에 대한 문제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기에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집중”하기로 하는 순간 놓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집중하는 것이, 놓치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것이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 주시는 특권 “집중”

최고이신 그분에게 집중한다는 가장 간명한 표현이 있다면 “믿음”입니다.
믿음 역시 선택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믿을 것이냐?”
마가복음 9장에 아주 유명한 말씀이 등장하죠.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애원합니다.
“할 수 있거든 우리 아이를 고쳐주세요!”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오늘 본문 23절의 말씀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구절은 우리가 영어로 외워두어도 좋을 듯합니다.
“If you can? said Jesus "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
예수님의 책망은 예수님께 왔지만, 집중하지 못하고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는 “불신앙적 신앙”에 대해서입니다.
기적은 “불신앙적 신앙이 본질적 신앙”으로 바뀌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듣자마자 아버지가 절규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내가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순간 아버지의 마음이 온전히 집중되어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믿음 없음이 문제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믿음 없음이 드러나게 될까요?
크레이그 그로셀의 책 [크리스천 무신론자]에 나오는 글입니다.
하나님에 관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주님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앤디 스탠리는 “하나님도 남김없이 죄다 이해해야 믿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한다. 

요한복음 9장은 태어나면서부터 시력을 잃고 동냥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내와 예수님이 만나는 장면을 소개한다. 제자들은 남자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게 누구의 잘못인지 알고 싶어 했다. 본인 탓일까? 아니면 부모?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예를 들어, 크리스천 무신론자들은 암에 걸린 이들을 보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리 몹쓸 병에 걸렸을까?”라고 생각한다. 어느 집 안주인이 가출했다는 얘길 들으면, 예배당 문턱만 넘나드는 무감각한 교인들은 중얼거린다. “신앙생활을 좀 더 잘했으면 마누라가 달아나지는 않았을 텐데.” 마음이 완악한 구경꾼들은 반항적인 십 대를 보며 속으로 손가락질을 한다.
“부모가 신경을 썼으면 저 꼴이 됐겠어?”

제자들이 탓할 대상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렇게 선언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9:3)
사내는 오랜 세월 한 줄기 빛도 보지 못한 채 힘겨운 삶을 살았다.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남자의 비극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고난에는 거룩한 목적이 있다.

오늘 본문 23절에 이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25절과 29절입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25절)
문제에 집중하고, 주님께 집중하는 믿음을 가지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교훈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29절)

“기도”의 정의가 무엇인가요?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 비는 것이죠. 우리가 이루기를 원하는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최고이신 그분에게 집중하는 순간 기도의 내용이 변합니다.
참다운 기도는 온전히 문제의 해결을 그분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수학 공식을 배우듯이 신앙과 기도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이렇게 응답됩니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저는 가끔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아이들을 키우는데 왕도는 없습니다. 정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식이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은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갖고자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중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인가? “신앙의 방법”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그분을 잘 믿고 따르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고 암기하는 것이 중요한가? 그분을 따르는 삶이 중요한가?
물론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방법이 아닌 본질이 아닐까요?
“기도”는 최고이신 그분을 따라가겠다는 결단이며, 모든 방법을 그분에게 일임하겠다는 신앙적 위임입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온전히 주님을 믿겠다고 결정하고 고백했을 때, 그다음 일을 행하신 것은 주님의 능력이었습니다. 25절을 볼까요?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어떻게 행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온전히 믿을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귀신이 어떤 귀신인지 알지 못합니다. 단지 귀신의 능력 앞에서 제어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셨습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그분에게 집중하는 것이 왜 믿는 자들에게 특권일까요? 우리의 믿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분에게 집중하고 믿음의 눈을 열면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분에게 집중하고 내린 결정은 이상하게 마음의 평안을 줍니다.
그분에게 집중할 때 목회가 가장 평안하고, 교회가 은혜스럽고 우리의 삶이 풍요롭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풍요와 평안은 가진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주시는 것이죠.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과 같지 아니하니라.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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