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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행 2: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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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행 2:37-42)

최근 한국 교회의 가장 큰 고민은 교회 성장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죠. 그렇다면 교회다운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사회봉사와 구제를 실천할 때 교회는 교회다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유명한 신학자이자 설교가인 마틴 로이드존스는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갖지 못하는 것, 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즉 크리스천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스도인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때때로 하나님과 종교적인 문제들을 생각하고, 얼마간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신약성경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누구이고, 무엇을 믿는 지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왜 그리스도인인지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물론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열매들을 맺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시금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많은 선을 행하고 고상한 생각을 하며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Ⅰ.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7절을 보세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첫 번째로 마음에 찔렸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카타뉘소’인데 이 말은 말발굽에 움푹 파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메마른 땅에 말발굽이 파일 정도의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왜요? 그들이 죽인 예수가 바로 주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 보세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아멘!” 아멘이라고 대답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지 않으시면 ‘아멘’이라고 대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자신들이 죽인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생각을 바꾼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를 죽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죽이는데 직간접적으로 동조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찔리다니요.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조롱하고 비난하고 멸시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왜 예전처럼 분노하거나 조롱하거나 변명하지 않았을까요? 베드로의 설교 때문이라고요?

아니요.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투박한 언어로 전달된 그의 논리가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설득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이 찔렸고 그들의 생각이 바뀌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찔림을 받는다는 것,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고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양심은 무디어질 것입니다. 양심은 굳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 이런 질문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우리가 어찌할꼬, 우리가 어찌할꼬”

그렇습니다. 이 질문이 다가올 때,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진리 앞에서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생각이 바뀐 사람, 아니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이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는 사람, 그 사람을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Ⅱ. 한발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문 리서치 그룹, 바나 그룹의 대표인 데이비드 키네먼이 게이브 라이언과 함께 연구조사해 쓴 책 중에 “나쁜 그리스도인(Unchristia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가?’라는 질문에 이런 답을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진정으로 연민과 보살핌을 느끼지 못한 채 단순히 입으로만 구호를 반복하는 맹목적인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기독교는 진심을 잃어버린 채 마케팅 되고 있으며 두려움을 팔아먹고 사는 미신과 다를 바 없이 변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예수님 때문에 인생이 변화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주일학교 선생님이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지요?”그러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예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고 예전에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는 거에요.”

어린 아이들, 아니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갖고 있는 정확한 지식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으면 이전과는 다르게 산다는 것입니다.

자,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고 생각이 바뀐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어떻게 하라고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즉 침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화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살던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서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타노에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돌이키다’, ‘가던 길에서 돌아서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세례나 침례라는 종교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즉 침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여 우리의 옛 사람, 내가 주인 되어 살던 옛 사람은 죽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과 합하여 새 사람으로 살겠다는 신앙고백이 아닙니까? 그런 신앙 고백이 없이 받은 세례나 침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행위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지금 베드로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회개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찔리는 것으로 그리스도인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생각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하고 세례, 즉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성령충만함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이, 아니 성경이 우리를 가리켜 저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Ⅲ.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찔려 회개하고 세례, 즉 침례를 받은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믿는 사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 보세요.“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신도의 수가 몇 명이 되었다고요? 삼천이나 더했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동조하고 죽였던 사람들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도행전 4장 4절입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그러면 지금 예루살렘에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된 것입니까? 남자들만 8천명입니다. 사도행전 4장 4절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여자들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때이기 때문에 남자의 수만 세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아이들이 둘이라고 생각하고 대충 잡아도 약 4만명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인구의 절반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재철 목사는 그의 책 “사도행전 속으로”에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단, 며칠 사이에 주님을 영접한 그 거대한 군중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이로부터 약 30년 후 바울이 세 차례에 걸친 선교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그를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회심이 없이 군중심리에 의해 감정에 휩싸여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세대의 주된 특징이 무엇이십니까? 이 세상은 생각하지 않으며, 생각할 수 없으며, 군중심리에 휩싸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군중심리에 휩싸여 감정적으로 세례 받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세례 받은 사람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변화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인(Sign)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인이 무엇일까요? 바로 사도행전 2장 42절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무슨 말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일원이 되어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지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 몸을 세우기 위해 함께 모이는 사람이 아닌, 나 홀로 교인으로 사는 사람은 교인일수는 있어도 참된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누구라도 이분을 만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하게 만드는 분이 있습니다. 밀알 선교단 단장으로 섬기시는 이민우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에게 어떻게 밀알 선교단과 알게 되었는지 여쭈어 보니 이분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동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장애인 단체를 섬기면 꽤 우아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일 것 같아서였지요. 하지만 그것은 그분의 은혜였습니다.”

솔직한 그분의 대답에 감동 받으며 그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수많은 간증이 저에게 부끄러움과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민우 단장님은 대기업의 부사장이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30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장애인 단체의 단장이 된 것입니다.

“장애인 단체의 단장은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가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꺼려하는 일인데 어떻게 단장을 맡게 되었습니까?”

그러자 그분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2004년부터 이사로 섬기고 있는데 이사회에서 오랫동안 단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이 제게 이런 마음을 주시는 거에요. ‘네가 하면 안 되겠니?’ 당시 제 연봉은 수억원대였습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렸지요.

“주님, 제 십일조만 해도 몇 천만원입니다. 이곳 단장으로 섬기느니 회사 다니면서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가만히 계시더랍니다. 그런데 며칠 후 한 목사님이 단장님에게 이런 말씀을 하더래요.

“하나님께서 ‘이제 네 얼굴 좀 보자’고 말씀 안 하시던가요?”

단장님은 “주님께서 제 얼굴을 보기 원하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내와 함께 기도하고 결정했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쭈었습니다.

“사모님의 반대는 없으셨나요?”

어느 날 단장님의 아내가 기도하고 나더니 오히려 장애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처럼 살자고 하면서 살던 아파트를 처분했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당시 살던 아파트는 59평이었고 30년 이상 살아온 살림살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장애인들과 함께 살기 위해  수서동에 있는 11평 남짓한 오피스텔로 이사해 사글세로 지냈습니다.

부부는 11평 남짓한 공간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이불 두 채와 당장 입어야할 옷가지, 수저 몇 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살림을 이웃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단장님의 아내는 특히 소파를 끔찍이 아꼈다고 합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국 살 때 상점에 진열된 그 소파를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 재고가 없다는 상점 주인에게 말해 이태리 본사에서 주문해서 6개월이나 기다렸다가 겨우 구입한 것이었기 때문입다. 단장님은 이웃 사람이 그 소파를 들고 나갈 때 아내가 당장이라도 이렇게 말하며 쫓아 나갈 것 같았습니다.

 ‘잠깐만요, 그 소파는 안 되겠어요. 제가 쓸거에요.

 “아내가 그 마음을 지그시 참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얼마나 안쓰럽던지! 얼마나 미안하던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일까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그리스도 때문에 삶을 바꾸고 불편해도 공동체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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