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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슬픔을 축제의 기쁨으로 바꾸는 인생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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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축제의 기쁨으로 바꾸는 인생 (요 2:1-11)


경상도 할머니 세 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할머니가 이야기하기를 "어이, 예수가 죽었단다."  그랬더니 다른 할머니가 "와 죽었다 카드노?"  "못에 찔려 죽었다 안카나."  "어이구 머리 풀어 헤치고 다닐 때 알아 봤다."
이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할머니가 묻습니다.  "어이, 예수가 누구고?"  "몰라 우리 며느리가 아부지 아부지 캐쌌는 거 보면 사돈어른인가 보지 뭐!"  이 할머니의 대답에 다른 할머니가 물었습니다.  "그래 문상은 갔더나?"  "아니 안 갔다."  "왜 안 갔노?"  "갈라 캤더니 사흘만에 살아났다 카드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절망과 좌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 그들의 심령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진실로 사모해야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이 주시는 이 평강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는 부활하신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아니 모든 인생들이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들이 주님 앞에 서는 순간 겸손함 가운데 생명이 소생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  주님 앞에 서는 순간 절망과 좌절 가운데 있던 인생이 희망 가득 찬 새 날을 보게 됩니다.  주님 앞에 서는 순간 원망과 불평을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신 주님의 이름으로 다 날려버리고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이 주님 앞에 서는 순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웃을 수가 있습니다.

흥분과 모험을 찾아 한 평생 온 세상을 돌아다닌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추구한 직업의 다양성과 그가 선택한 주거지의 다양성만으로도 기네스 북에 오를만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운전기사, 투우사, 사냥꾼, 종군기자, 낚시꾼, 권투선수, 사업가, 군인, 작가.  그는 스페인에서는 투우사가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전선에서는 구급차의 운전병으로 일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의 전장에서는 종군기자로 일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사자와 코끼리를 사냥하며 전문적인 사냥꾼의 경지를 경험했습니다.  쿠바에서는 군수 공장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수완을 발휘하며 틈틈이 바다 낚시를 즐겼습니다.  파리에서는 특파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파리와 스페인을 무대로 한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탄 비행기는 두 번이나 떨어졌지만 극적으로 살아 남았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결혼에 실패했지만 네 번씩이나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가 쓴 한 소설 작품의 첫 머리는 이런 의미심장한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 하나가 나둥그러져 있다.  과연 표범은 그 높은 산봉우리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는 마침내 195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62세가 되던 해 1961년 7월 미국 아이다호의 자택에서 그가 애용하던 사냥총으로 자신의 이마를 겨냥하고 당긴 채 쓰러져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작품의 주인공처럼 그는 정상의 산봉우리에서 쓰러져 피 흘리는 표범의 운명이 된 것입니다.  "킬리만자로의 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의 작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 평생 인생의 기쁨과 스릴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소위 찾았다고 생각했던 기쁨이 그의 인생의 장에서 떨어진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이 땅에서 지속해야 할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인생을 비극으로 마무리하고 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본문에는 결혼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고 기쁨을 상실하는 위기에 처했을 때 오히려 그 위기를 더 커다란 축제의 기쁨을 경험하는 기적의 순간으로 바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오늘의 본문을 가르쳐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첫 번째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이 기적은 갈릴리 가나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났던 기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기적은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동일하게 기다리고 있는 기적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쁨대신 온갖 유형의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슬픔과 가슴을 짓누르는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꾸는 희망은 기적 밖에는 없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쁨이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본질이 기쁨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잔치집과 같은 기쁨의 나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이 잔치집과 같이 기쁨이 충만한 삶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의 저와 여러분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 안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잔치집과 같은 기쁨보다는 초상집과 같은 슬픔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 마당에서 초상집 같은 슬픔을 축제의 기쁨으로 바꾸는 기적을 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슬픔으로 낙심된 인생이 축제가 있는 기쁨의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에 예수님을 초청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의 사건에서 무엇보다 먼저 관찰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거기에 계셨고, 거기에 초청함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계속해서 본문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성경학자들 가운데는 이 초청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의 초청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장의 바로 앞부분인 1장 마지막 부분은 나다나엘이 빌립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장면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 2절에 보면 이 나다나엘을 소개하면서 그는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가나 출신인 나다나엘이 자기 마을에 큰 잔치가 열렸을 때 선생님이신 예수님과 동료 제자들을 초청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능한 추측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 혼인집이 아마도 친척지간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이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그냥 남의 집에 참견을 한 것이 아니라 심각하게 그 잔치집의 문제를 끌어안고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보아서 마리아가 잔치를 하는 이 집안과 중요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가능한 추측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거기에 청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나다나엘이 초청했건 마리아에 의해서 초청되었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곳에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저는 그날 대부분의 갈릴리 가나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의 증거에 의해서 예수님이 온 세상이 기다려왔던 그 메시아라고,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그 소문은 요단강 일대에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소문은 갈릴리의 가난한 작은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희망이었을는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마을 사람들의 초청을 기쁘게 수락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 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마을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작은 마을은 더 이상 작은 마을이 아니라 중요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 작은 잔치는 평범한 잔치가 아니라 중요한 잔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은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사건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하는 잔치마다 중요한 잔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청하는 가정마다 중요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청하는 개인마다 중요한 개인이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마당에 예수님을 초청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 예수님을 초청하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을 찾아오시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중요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은 1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그 심령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다면 이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항상 먼저 예수님을 초청하십시오.  예수님을 모시고 계획하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면 그 자리가 좀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그 자리를 포기하십시오.  만일 그 자리에 예수님을 초청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부담이 되거든 여러분도 가지 마십시오.

그러나 힘들어도 여러분이 안 갈 수 없는 자리, 그리고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리라면 여러분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함께 가달라고 요청하십시오.  그는 기꺼이 거기에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함께 가시면 그 자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자리로 기억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의 마당에 기적이 필요하십니까?  환경을 변화시키는 기적이 필요하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셔야 할 일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초청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슬픔으로 낙심된 내 인생의 마당이 축제가 있는 기쁨의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두 번째로, 예수님께 기도하셔야 합니다.

어느 잔치에도 문제는 존재합니다.  어느 가정에도 문제는 존재합니다.  어느 공동체에도 문제는 존재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피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직장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한 청년이 유명한 '적극적 사고방식'의 저자인 놀만 빈센트 필 박사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상담을 했습니다.  상담을 마치면서 청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박사님, 제가 지금까지 다녔던 직장들은 너무나 힘든 직장이었습니다.  문제 투성이의 직장이었습니다.  기왕에 상담하는 차원에서 저에게 제가 지금까지 겪어온 그런 문제가 없는 직장을 하나 소개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청년의 말을 들은 박사는 그에게 "당장 소개하지요" 하더니 그에게 "내 차를 타라"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그의 사무실에서 몇 블럭 떨어진 공동묘지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필 박사는 공동묘지를 가리키면서 이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청년, 이곳이 세상에서 문제가 하나도 없는 유일한 직장이요."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문제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어떻게 다룰 줄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기도입니다.  기도함으로 문제를 다루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잔치집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런 문제조차도 해결하실 수 있는 주님이심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믿었기 때문에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의 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포도주가 없다."  지금 마리아는 있는 그대로 잔치집의 문제를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그것이 기도가 아닙니까?  기도는 자기의 문제, 자기의 아픔, 자기의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내놓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는 훌륭한 기도자의 모범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요청에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본문 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초대 한국교회의 이야기를 보면 한문을 하는 한학자들이 성경을 읽다가 이 부분에서 시험이 들어서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라고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단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가리켜 "여자여"라고 했다는 것은 몰상식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 몰상식한 것은 저들 이단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항상 그 단어의 원래적인 의미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여자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gunai"라는 말로 쓰여졌습니다.  성경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여기서 사용된 단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거 로마의 황제인 어거스투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사용한 최상의 존칭어가 "gunai"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하자면 "woman"이라는 단어보다 더 합당한 단어는 "Lady"입니다.

마리아는 "내 때가 이르지 못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요청이 받아들여질 것을 믿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문제가 있으십니까?  포도주가 떨어지셨습니까?  기쁨이 떨어지셨습니까?  포도주는 유대인들에게 인생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 랍비들이 노래처럼 사용하는 격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포도주가 없다면 기쁨이 없다네."

당시의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기쁨이 떨어졌습니다.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곤란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곤란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도 예외 없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마치 헤밍웨이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배운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직 기도를 배운 사람만이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기적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기적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마당에 슬픔이 왔습니까?  예수님을 초청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에게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하늘을 여는 열쇠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슬픔으로 낙심된 내 인생의 마당이 축제가 있는 기쁨의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세 번째로, 예수님께 순종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기적이 가능했던 결정적인 열쇠는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특별히 하인들의 순종이 돋보입니다.  본문 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오늘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서 하인이라면 어떤 반응을 할 것 같습니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도주이지 물이 아니라고 항의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아귀까지 채우는 순종을 했습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이 상황에서 여러분은 솔직히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아니 물을 갖다 주라니.  물 먹이라구요.  우리가 어떻게 망신 당하라구요."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성경은 이 하인들이 "갖다 주었더니" 라고 했습니다.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철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순종이 가져다 준 기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믿음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했던 하인들은 이 기적이 일어나는 모든 상황의 목격자들이었고, 그 비밀을 간직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은 참으로 흥미 있게 다가옵니다.  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잔치에서 책임을 맡았던 총 책임자도 그 포도주가 어디에서 난 것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인들은 알더라."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잔치를 책임지던 책임자도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잔치집의 주인인들 알았겠습니까?  그도 몰랐습니다.  오직 하인들만이 그 기적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은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적은 순종하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적은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일어납니다.  순종하는 사람만이 기적의 비밀을 간직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기적의 비밀을 간직하는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합리적인 상식과 이성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몰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사람들 때문에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합리적인 이성의 틀 안에만 묶여 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적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성적인 사람보다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순종의 사람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순종으로 기적을 경험하고, 그 기적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순종이 가져온 기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넘쳐나는 포도주의 기쁨이었습니다.  성경학자들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손님이 오면 손을 씻겨주기 위해서 담겨진 이 항아리는 한 개에 20-30갤론의 물을 담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섯 항아리면 120-180갤론의 포도주가 예비된 것입니다.  이것은 학자들에 의하면 한 사람에게 큰 잔으로 열 잔씩 돌아가도 200명 이상이 마시고도 남을 분량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풍성한 기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양적으로만 풍성한 기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이 포도주는 극상품의 맛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맛을 맛본 사람들이 본문에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통 잔치집에 가면 처음에는 좋았다가 나중에는 점점 나빠지는데 이 집은 갈수록 좋아진단 말이야."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교훈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기적은 그냥 평범한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이 기적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어서 이것은 표적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본문 1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여기에 보면 이 사건을 단순히 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그 기적의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교훈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적에는 놀라운 교훈이 있습니다.  어떤 교훈입니까?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는 교훈입니다.  빈 항아리 같은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면 우리 안에서 놀라운 기쁨을 만들어내시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그가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 표적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결정적으로 그가 어떤 분이신가를 믿게 하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인생의 필요를 가까스로 채워주는 분이 아니라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놀라운 분.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이 기적의 결과로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믿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고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가 처음의 제자들을 위해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면 오늘의 제자들을 위해서도 동일한 기적을 행하시지 않겠습니까?
그가 갈릴리 가나의 이름 없는 마을에서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면 오늘 우리의 마을에서도 동일한 기적을 행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름도 알 수 없는 이 혼인집의 주인을 위해서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서도 동일한 기적을 행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름도 표기되지 않은 무명의 부부를 위해서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면 오늘 고난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살아가는 부부들을 위해 동일한 기적을 행하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기적이 필요하시다면 이 기적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먼저 초청하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나아와 내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내려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순종을 결단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는 기적의 축제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기쁨으로 가득 찬 새로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2,000년 전 인생의 마당에서 기쁨을 빼앗긴 채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슬픔과 절망의 원인인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들에게 기쁨을 되돌려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가슴 가득한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삶의 진정한 행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너스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내 삶의 한 복판으로 모실 수가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은 다시 한 번 잔치 마당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이런 잔치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예수님 되게 하라!"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을 나 혼자 다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나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삶에 주인이 되게 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도록 삶의 자리를 내어드리십시오.  그러면 오늘 기적은 시작될 것입니다.  슬픔과 절망은 물러가고 축제 같은 잔치 마당의 인생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축제의 주인으로 모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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