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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생령과 살려주는 영 (창 2:7, 고전 15:4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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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령과 살려주는 영 (창 2:7, 고전 15:45-47)

최근 한국을 방문한 콜린 파월 전 미 국무장관은 대통령에게 가장 필요한 리더십은 낙관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의 전 대통령 가운데 가장 낙관적인 대통령으로 레이건 전 대통령을 꼽았습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원 라이너’(one-liner) 즉 짧게 한 마디 하는 조크를 잘 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장 능력이 있는 전 대통령 중의 한 사람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합니다. 수명을 늘리는 건강법 제1번도 ‘낙천적 사고’랍니다. 
  
기독교는 낙관적인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비관적인 신앙이나 태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낙관론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의 부활과 장차 올 우리의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비관적인 종교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러시아 정교회에는 부활절 다음날에 사람들끼리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부활절은 사탄이 승리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므로 하나님이 사탄에게 결정타를 날린 날입니다. 야구로 말하면 9회 말 투아웃에서 역전을 당한 것입니다. 농구로 말하면 다 이긴 게임을 ‘버저비터’로 역전을 당하고 만 샘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승리에 찬 웃음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부활은 완전히 즐거움을 회복한 날입니다. 부활절이 기독교의 절기 가운데 가장 기쁜 날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기적으로 살린 세 사람이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베다니의 나사로입니다. 이 사람들을 살리신 것은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이기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살려주실 영적 능력이 없으면 아마 살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살린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 제자가 있었는데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시체를 보고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하니 다시 살아 일어났습니다. 다비다가 일어남을 보고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고 합니다. 
  
바울이 살린 유두고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의 드로아에 가서 말씀을 전할 때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았다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바울이 가서 이 청년을 다시 살렸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고 합니다. 다시 살았다는 것은 기쁨이며, 즐거움이며, 믿음이며, 위로입니다. 다시 사는 것이 슬픔이며, 고통이며, 원망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기쁨이며 웃게 하는 것입니다. 
  
유진 오닐의 연극 ‘나사로 웃다’에서는 살아난 나사로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저 세상에 무엇이 있던가?” 나사로가 대답합니다. “그곳에는 오직 생명이 있었죠. 예수님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 웃음이 제 마음에 들렸답니다. 저는 사랑과 생명으로 거듭나서 ‘맞아요’라고 외치며 주님과 함께 웃고 있었죠”. 부활은 생명이며, 웃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과 더불어 고린도전서의 탁월성을 드러내는 장입니다. 학자들은 부활의 참 의미는 복음서가 아니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얻어진다고도 합니다. 바울은 확신에 찬 필치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명확하게 적고 있습니다. 당시에 죽은 자에게 부활이 없다고 하던 사두개인도 있었고, 죽은 자가 어떻게 살며 어떤 몸으로 오느냐라는 일반적인 회의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생령’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고 범죄하므로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다시 죽은 영이 생령으로 살려주는 영이 되시려고 친히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므로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첫째, 첫 아담은 생령이었지만 죄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에는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라고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창조하신 생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사람이 살아 있는 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살게 하려고 지으셨습니다. 죽게 하려고 지으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려고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7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땅의 흙으로”라고 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기초재료가 땅의 흙입니다. 그리고 “생기를 그 코에”라고 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완성재료가 생기입니다. 
  
성경은 왜 ‘땅의 흙’이라고 했을까요? 흙은 땅에 있는 것인데 굳이 땅이란 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의 조화로 창조하신 것을 밝히기 위하여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생령이 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지만 하늘을 향해 살라고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영으로 사는 이것이 인간이라고 확실하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령으로 만든 사람이 범죄하여 죽은 영이 되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번 죽는다고 하셨으면 죽이는 것이 약속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첫째 아담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습니다. 첫째 아담을 살리기 위하여 둘째 아담이 필요합니다. 죽은 자를 살려야 하고, 죽은 자를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필요하고 예수님이 친히 먼저 부활하신 것입니다. 
  
‘첫 사람’이란 완성되지 못한 초등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에겐 완성시켜 주는 존재, 즉 살려주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둘째 사람인 예수님이 직접 부활하셔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46절에는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라고 합니다. 생령이 생육으로 변하여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사람으로 만드셨는데 죄가 사람을 육의 사람으로 변하게 하였습니다. 신령감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6:3에는 노아 시대에 하나님이 사람을 벌하실 때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죄의 극치가 무엇입니까? 생령이 생육이 된 사건입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육의 사람으로 변하게 되니 하나님의 눈에 어긋나는 것만 골라서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의 생각이 항상 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홍수로 멸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노아 가족 외에 코로 숨 쉬는 모든 생물을 다 죽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습니다. 
  
47절에는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라고 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땅에서 난 사람, 흙에 속한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전도서 12:7에는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합니다. 육은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합니다. 
  
철학자 김형석교수님의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수님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나쁜 이야기를 많이 했나 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욕을 많이 했다고 비난하고, 석가는 욕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교수님은 “맞습니다. 예수님은 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석가는 고통당하는 자에 대하여 책임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석가는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말하면서 늙어서 병드는 것을 당연한 인간의 한 과정의 고통으로 보았습니다. 석가는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해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육신으로는 인간의 고통이나 죽음문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젊게 보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나이 70세에 새로운 비법의 화장술을 동원해서 젊음을 유지하려고 애쓴다면 내 방식대로 내 몸을 미라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몸짱, 얼짱이 판을 치는 사회는 몸을 식민화시키며 사는 사회입니다. 우리가 몸의 주인이 되느냐, 몸이 우리의 주인이 되느냐에 따라 몸은 우리의 친구도 될 수 있고, 적도 될 수 있습니다. 육신이 된 사람들은 육신에만 관심을 가지고 육신을 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 임마누엘 스베텐보리는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은 영체를 말하는 것이다. 육신에는 생명이 없다. 육신은 영체의 그릇이요 도구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육체에 하나님의 생기가 있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영이고 참 사람입니다. 
  
죄는 사람을 육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육체가 된 사람은 육체적 관심만 가집니다. 노아시대 사람들도 “사람들의 아름다움”만 보고 결혼했습니다. 관능미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에 목숨을 겁니다. 세상재미에 푹 빠져 삽니다. 내세 없이 현세만 보고 현실만 따라갑니다. 
  
첫 아담이 생령으로 지어졌듯이 우리가 다시 생령으로 삽시다. 생령으로 사는 삶은 영적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에 관심을 가지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을 복음에 두고 복음전파에 관심을 두고 사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부활의 의미를 알고 부활의 신앙으로 사는 삶입니다. 

  
둘째, 둘째 아담은 죄로 죽은 우리를 살려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 하반절에는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합니다. 첫째 아담의 실패로 둘째 아담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마지막 아담’입니까? 마지막 때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구원하여 완성시키기 때문에 마지막 아담입니다. 
  
히브리서 9:28에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살려주는 영입니다. 살려주는 영이 되시려고 스스로 살아서 부활하셨습니다.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스스로 사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시므로 남을 살려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5:21에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살려주는 역사는 성취됩니다. 자기가 살려고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원하는 자들을 살리려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46절에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47절에는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 합니다. 첫 아담은 타락했습니다. 둘째 아담은 신령합니다. 첫 아담은 땅에서 났습니다. 둘째 아담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첫 아담에게 생기를 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분이 살려주는 영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살 수 없고, 자신에게 생기가 없는 존재가 남을 살 수 있게, 생기가 있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0:14에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고 합니다. 왜 우상은 거짓입니까? 왜 우상 때문에 사람이 수치를 당합니까? 우상에게 생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상에게 왜 생기가 없습니까? 우상은 원래 생명이 없으므로 자신이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기를 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에게 생기를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흙이 살아 있는 생령이 되게 하신 생명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살 수 있고, 남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예수님의 부활로 보이신 것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골짜기에서 마른 뼈가 큰 군대가 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에스겔 37:5에는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주시는 분이시고 생기를 주시겠다는 의지를 말씀하십니다. 

6절에는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주면 살아난다는 말씀입니다. 뼈가 다 말라 있고 살아날 수 없이 완전히 죽었지만 하나님이 생기만 주시면 살아납니다. 9절에는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고 합니다. 이제 생기에게 들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는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넣어주신 결과는 살아나고, 큰 군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은 것도 살게 하시고, 산 것도 죽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의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누가 살려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의 공급자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의 공급자이시기에 예수님은 스스로 살아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살아나셨습니까? 우리를 살려주어 영원한 생명이 있게 하려고 살아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에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를 살려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둘째 열매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요즘에는 생명복제가 가능하게 되어 많은 짐승들을 복제하고 있습니다. 생명연장술도 발달하여 수명을 많이 연장하였습니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하다보니 과학자들의 콧대가 높아져 하늘을 찌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과학적 기술로 생명을 조금은 연장할지 모르지만 생명을 창조하는 일은 하나님 외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흙으로 빚은 물질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체’(living being)로 만드셨습니다. ‘체’(being)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네페시’(nephesh)인데 성경에 750번이나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피조물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을 뜻합니다. 

그런데 ‘네페시’가 사람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우리의 영혼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은 ‘생령’인데 히브리어로 ‘네페시 하야’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만드신 사람에게 주셨던 살아있는 영이 죽은 영이 되자 다시 예수님의 부활로 살아있는 영, 새로운 생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살려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결론 

어떤 환자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여 진찰을 받았습니다. 그러데 꼭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수술대에 누워 간호사와 의사가 수술 준비를 하는 것을 보니 너무 긴장이 되어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제가 수술을 처음 받는 것인 데요. 너무 긴장돼 죽겠어요!” 의사는 환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래요 아저씨, 괜찮아요. 저도 처음이에요!” 첫 경험은 누구에게나 생소하고, 두렵고, 떨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가고 있었지만 몰라볼 만큼 신비한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서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제자들에게는 온몸이 오싹할 정도로 떨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도 생소하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과 부활의 비밀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므로 이 놀라운 사실을 훤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로널드 롤하이저의 ‘일상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이란 책에는 “부활은 우리를 새 생명과 자비, 회복력으로 초대한다”고 합니다. 부활은 살려주는 영으로 우리를 회복시켜주는 힘입니다. 부활을 맞은 우리 모두가 새 생명으로 삽시다. 우리의 영과 육체가 함께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절망과 두려움에서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예수님의 부활의 날을 새봄과 함께 새 생명과 소망으로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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