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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 다시 살아나셨다 (막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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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살아나셨다 (막 16:1-8)
 
한계를 인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어령씨는 그의 책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생각하라 죽음을』에서 한국인들이 죽음을 얼마나 종교적으로 연결하고 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다음은 그의 글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죽는다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말끝마다 좋아 죽겠다고 하고, 슬퍼 죽겠다고 하고, 우스워 죽겠다고 합니다. 배가 고프면 배고파 죽겠다고 하고, 배가 부르면 배불러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 처음에는 그런 동족들이 싫었고 부끄러웠지요. 하지만 죽음은 삶의 극한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메멘토 모리- 기억하라 죽음을’ 이라는 사실을 알았지요.” 

우리 백성은 늘 죽음과 함께 살아온 것 같습니다. 현재의 삶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 죽음으로 가는 데서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의 복음을 그렇게 빨리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알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교만하여 인생의 막장에 이르지 않으면 결코 쉽게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한 번 보십시오. 길 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져야 엄마, 엄마 부르면서 엄마 품으로 달려갑니다. 덩치가 큰 형에게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아빠를 부르며 집으로 달려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니었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 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상처 입은 영혼의 소유자들이라는 점입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져 숨쉬기 어려웠던 절박함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 것을 경험하지는 못했어도 자신이 한계를 가진 실존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생명의 하나님, 무한의 세계 속에 열려 있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는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셨을 때 함께 있던 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일곱 귀신에 들렸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 그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았던 그녀는 그 곳에 있었습니다. 다음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이 높은 자리에라도 올라가면 내 아들들도 함께 떵떵거리며 살기를 바랐던 그녀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살로메라는 여인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함께 현실에 대한 절망이 끊임없이 교차되는 밤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그렇게도 사랑했던 예수님의 죽음을 현장에서 목격했습니다. 가장 참혹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며 고통 속에서 부르짖으며 죽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무력함을 탄식하며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 버렸습니다. 절망뿐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다리와도 같습니다. 철회와 번복이 불가능한 마지막 지점입니다. 죽음 앞에서 “안 돼, 죽으면 안 돼”라고 아무리 소리쳐 보아도 더 이상 변화는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아프게 쏘아대는 막강한 힘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메라를 한 대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요사이는 동영상까지 찍을 수 있는 카메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영상 기능이란 것이 참 멋집니다. 한 번 찍은 것은 보고 싶을 때마다 되돌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음이란 그렇지가 않습니다. ‘재생 불가’라는 딱지가 붙어 있습니다. 따뜻했던 손을 다시 마주잡을 수가 없고, 보고 싶어도 다시 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큰 소리 치고 살았던 대통령도, 혹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평민들도 죽으면 빠른 시간 안에 땅 속에 묻히게 됩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혹, 그럴듯하게 미라를 만들어 보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저 허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곧 그분이 말씀하시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끝났다는 표지였으며, 그토록 기대했던 메시아 왕국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는 증거였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절망과 슬픔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들에게는 따뜻한 사랑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상처 나고 찢겨진 사람들을 보듬던 그 손을, 차가워졌다 해도 다시 만져보고 싶었습니다. 힘들고 외로운 자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셨던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셨는데, 그 마지막이라도 잘 보내드리고 싶은 따뜻한 사랑이 여인들의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에 마지막 향유를 바르고 고별인사를 하기를 원했습니다. 

여인들의 마음에는 사모함과 염려가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고 나서 곧 안식일이 시작됐습니다. 안식일은 그 다음날 저녁까지였습니다. 여인들은 이 안식일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안식일 동안에는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법에 의하면 일정 거리 이상을 돌아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또 안식일에는 시신을 만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안식일이 지나가는 새벽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매우 길고 긴 하루였을 것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은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마가복음 16:2) 

‘매우 일찍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무덤가로 갔습니다. 오직 사랑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이 몸까지 움직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 갑자기 걱정이 생겼습니다. 큰 돌로 예수님의 무덤 입구를 닫아놓은 것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러자 사모하는 마음에 근심과 낙심이 교차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마가복음 16:3) 

이제야 서로 질문하게 된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을 굴려 주지?” 급히 오느라 남자 제자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오기는 했지만, 돌을 옮기는 것은 연약한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인들의 근심과 걱정이 해결되었음을 성경은 전해줍니다.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마가복음 16:4) 

여인들은 땅만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하지? 어떻게 해야 되지?’ 근심과 슬픔으로 그저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여인들의 눈을 들게 하셨습니다. 눈을 들어서 보니 이미 돌이 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여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았습니다. “눈을 들어 보라. 이제 땅만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쳐다봐라. 이제 탄식을 멈추고 기대하면서 살라. 의심과 불신앙에서 살지 말고 신뢰와 믿음으로 네 인생을 바꿔 보라.” 부활의 길은 우리에게 그런 소망과 기대를 주는 것입니다. 

사랑과 생명의 경이를 회복하는 것이 부활의 축복입니다. 

걱정하던 돌이 이미 굴려져 있는 것,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에게는 이제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생깁니다. 이미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마음으로 가능합니다. 

사랑하면 눈에 잘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아들, 내 딸이 사랑스러우면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보입니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함께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내 아들, 내 딸이 한 눈에 보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 하늘과 땅의 아름다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조선 정조시대 문장가였던 유한준은 인식론에 있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사랑하면 보이고, 듣고, 깨닫고,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들이지만, 사랑하게 되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이 여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아주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받게 될 더욱 큰 충격의 전조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무덤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는 천사와 같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더욱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천사의 말이었습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마가복음 16:6)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본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덤에 가까이 간다고 하면 무덤에 묻힌 죽은 자를 만날까봐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죽은 것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운 것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은 것은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을 거꾸로 살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살아있는 것의 경이로움을 깨닫지 못하고, 죽은 것에 연연해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추운 겨울을 지내고 나면 많은 분들이 봄이 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봄을 좋아하는 분들을 가만히 보면, 연세가 들기 시작한 분들이 많습니다. 청년들은 자기가 봄이고, 생명이고, 청춘이니까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는 것을 그렇게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겨울도 좋고 봄도 좋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게 되면, 마치 죽은 것 같았던 갈색과 회색이 변하여 푸른 싹들이 나는 것에서 가슴이 떨립니다. ‘죽은 것 같았던 것에 생명이 숨어 있었구나.’ 이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설레는 일인지, 새삼 생명의 경이로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게 부활신앙과 생명신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간직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경이로움을 갖고 인생을 바라보는 것, 경이로움을 갖고 하나님을 대하고, 예수님과 성령님을 대하는 것, 그리고 살아있음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이 세상 만물이 생명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놀라고 기뻐하는 것이 생명의 신앙, 부활의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내 안에 경이감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곧 죽어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하나님, 부활하신 그 분을 맛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는 해야 할 말이 생겼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가복음 16:8) 

여기에서 말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할 말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동안 수없이 했던 말들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 생명의 말씀은 인간 언어에 침묵을 선언합니다. 그동안 조잘대던 말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언어, 생명의 언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계시의 언어 앞에서 그동안 내가 자랑하던 모든 말들이 다 무(無)가 되어 밑바닥에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정말 해야 할 말이 가슴에 생겼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 부활의 주님, 내 모든 죽음의 자리에서 그 권세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내 속에 나타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의 말씀이 내 속에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어떤 말도 이 기쁜 소식 앞에서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놀람은 기쁨의 충격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복음 28장 8절에는,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라는 표현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큰 기쁨도 있었던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면서 기쁘고 감사한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함의 경험은, 이 두 가지 감정의 상존입니다. 

우리가 새디스트(sadist)나 메조히스트(masochist)가 되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알고, 그 분이 나 같은 존재 앞에 살아계신 분으로 다가오셨다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면, 소위 종교를 만들어낸 다른 어떤 교주들보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받으신 이야기와 더불어 처참하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특히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를 전체 1/3를 할애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생명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활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죽음의 사실을 그렇게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감사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부활의 기쁨입니다. 

부활신앙은, ‘나는 먼 미래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게 될 테니까 오늘은 대충대충 그럭저럭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한때는 기독교 안에 그런 부활신앙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힘들고 어려워. 그냥 여기 이대로 살자’하며 자신을 묶어둔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칼 막스(Karl Marx)는 “기독교는 아편과 같은 종교다. 현재가 힘들고 어려우면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고 그 속에 주저앉아서 머무르는 종교다. 부활신앙과 미래의 영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인간을 마취시키는 종교다”라며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니 너희도 부활의 기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누리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 내 아내와 남편의 따뜻한 손을 붙잡는 것, 내 친구와 손을 마주 흔들리는 것, 이 아름다운 세계의 생명들을 누리고 즐거워하면서 감사하는 것, 바로 이런 삶을 살아가라고 초청하는 것이 부활절 아침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 속에 처하게 하신 것입니다. 내 아들을 고난 속에 처하게 하였으니 너는 고난을 뛰어넘는 용기를 갖고 이 세상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 아들을 저 음부의 세계, 깊은 하데스의 세계 속에 갇히게 할 테니 너는 천국의 기쁨을 미리 끌어당겨서 지금을 천국처럼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를 가장 잘 변증하는 도구는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일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용기 있게 사는 모습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도대체 너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기뻐하니? 왜 그렇게 감사하니?” 궁금해 하며 그들을 보고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가장 큰 적 또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남의 탓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우울하게 살고, 생명과는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나는 너처럼 예수 안 믿어!”하고 도망을 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생명의 기운을 품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가정에서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 함께 기뻐해야 할 사람들이 마주 앉아서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부활을 통해 주신 축복입니다. 

지금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먼 미래만 바라보고 ‘그 때 가서 되겠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희망과 기대를 끌어당겨서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가자고, 생명을 가지고 나가자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살아있음의 경이로움을 느끼며 생명의 주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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