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예수님이 우신 이유 (요 11:25-35)

첨부 1


예수님이 우신 이유 (요 11:25-35)

지난달 우리 교회에서 목회자 부부 10가정이 모여 기도회를 했습니다. 기도회 후 2부 순서를 갖자고 해서 영화관에 갔습니다. 도착한 시간에 맞는 영화가 7번방의 선물이라는 영화였습니다. 포스터를 보니 교도소 이야기라 집사람이 안 들어간다는 것을 설득해서 같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후 사모님들을 보니 다들 눈이 부어 있었습니다. 다들 우신 것입니다. 영화가 감동이 있어서 울었던 것입니다. 그 영화가 관객 12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최근에 눈물을 흘려 보신 분이 있으신가요? 

눈물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 기뻐서 흐르는 눈물, 감동이 되어 흐르는 눈물, 그리고 속상해서 흐르는 눈물 등, 여러 가지 있습니다. 

제가 겪어보니 너무 아파도 눈물이 나더군요. 얼마 전 필리핀 가서 신학교 강의를 했을 때 식사 중에 뭘 잘못 먹어 이가 금이 갔습니다. 얼마나 아픈지요. 강의를 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아파서 병원을 갔는데 이상이 없답니다. 진통제로 하루를 버티고 나니 좀 진정이 되어 강의를 마무리 하고 귀국해서 병원에 갔더니 이빨이 깨어졌답니다. 너무 아프니 눈물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우리 시대의 비극은 ‘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메말랐다는 것입니다. 

웃고 즐기는 일에는 적극적인데 눈물을 흘리는 일에는 소극적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는 웃음만이 아니라 눈물도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슬픔 때문에 힘들어 하면서도 울기를 두려워합니다. 나약해지기 싫어서,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울음을 참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슬프고 힘들 때는 소리 내어 우는 것이 좋습니다.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눈물을 흘리면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압박감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 과학적 연구의 결과라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다보면 예수님도 우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을 봅니다. 

그런데 어느 때 눈물을 흘렸을까요? 성경에 기록이 없으나 예수님은 태어나시면서 우셨겠지요? 그러나 성경에 예수님이 “눈물을 흘렸다” “우셨다”하는 표현이 몇 번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눈물을 보면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우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눈물은 ‘남을 위해서 우는 눈물’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크게 두 번 우셨습니다. 먼저는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우셨습니다.   

엄밀히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은 죄를 지은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약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구세주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시간 부활절 아침에 왜 예수님이 우셨는지? 
예수님의 그 눈물의 의미를 깨닫고 우리 신앙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왜 우셨나요? 

1.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끔쩍도 안하십니다. 그러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 친구 나사로 잠들었도다 하시면사 나사로 고향으로 찾아 가셨습니다. 동네에 도착하자마자 마르다가 영접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한마디 합니다. 21절 이하를 보세요.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그때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안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하게 부활을 선포하고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묻습니다. 

25절 이하를 보세요.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하고 믿는다고 선포합니다. 27절입니다.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주는 그리스도인 것을 믿습니다. 부활과 생명의 주인인 것도 믿습니다. 그런데 오라버니를 지금 살리는 것은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다시 보세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은 주께서 “여기” 계시지 않고 “저기”계셨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속히 오시지 않았기에 죽었다는 원망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오라비 죽음에 슬퍼하면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그 사람들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의 눈물은 그들이 불쌍해서 함께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눈물을 흘린 것은 메시야인 주님이 그들 눈앞에 있는데도 죽음 때문에 절망하는 그들의 믿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요11:33절을 보세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러분! 왜 예수님이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나요? 

여기서 ‘비통히 여기시고’ 라는 말은 ‘슬퍼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분노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무지, 부활에 대한 불신에 대한 비통의 눈물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비통의 눈물은 그들이 흘린 눈물 때문이 아닙니다. 분명히 주님이 자신은 부활이고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부활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죽음 때문에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부활을 못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믿음 없을 보고 비통의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안타까워하십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은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저기 계셨어도 살리고자 하면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일부러 늦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 마리아 둘 다 똑같이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공간적으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또 나사로의 무덤에 가신 예수님이 “돌을 옮겨 놓아라” 하십니다. 
그때 마리아와 마르다가 말을 합니다. 
“예수님 우리 오라버니는 죽은 지 나흘 되었습니다.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그 말은 뭡니까?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나흘이나 지나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기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시간적으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혹시 죽은 지 하루라면 몰라도, 이미 나흘이나 지나 썩어서 냄새가 나니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능력을 공간이나 시간으로 제한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여 생명의 주인이 되심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통분케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40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주님의 명령대로 돌을 옮겨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명령하시니까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가 수의를 입은 채로 살아서 걸어 나옵니다. 할렐루야!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마르다 마리아 자매처럼 예수님의 능력을 입으로만 믿고 그 능력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 주님은 부활의 주님입니다. 우리 주님은 생명의 주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권능을 믿기만 하면 어떤 문제든지 해결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8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이 뭡니까?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습니다.” 그런 큰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때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선포하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왜 눈물을 흘리셨나요? 


2. 인간의 죄의 고통 때문에 우셨습니다. 

죄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 죄 때문에 당하는 인간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독생자를 사람으로 보내셔서 그 죄 값을 치르게 하셨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제발 죄를 미워하시길 축원합니다. 죄를 멀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 민감하지 못합니다. 여기 이 물 컵에 제가 손가락을 넣었다가 빼도 사람들은 안 먹습니다. 제가 마신 물 컵을 주면 안 먹습니다. 왜죠? 

깨끗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은 조금이라도 오염되면 안 먹으면서 왜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못한 것일까요? 작은 죄라고 해도 민감해야 합니다. 죄는 미워하고 멀리해야 하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은 사랑하십니다. 죄를 미워하시지만 그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신 이유는 이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당하는 그 고통이 너무나 처참하기에 우신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세요. 성자 예수님만 우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셨습니다. 제가 설교 준비하다가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신다는 성구를 보았습니다. 

예레미야서 14장 17절 말씀이십니다.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아픔을 인간이 이해하게 하기 위한 표현인 것은 분명합니다. 神人同性同格的(신인동성동격적)표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죄 때문에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통곡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히5:7절 말씀을 보세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우리 예수님이 육체로 계실 때,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인생들을 보시고 우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분이십니다. 이 땅에 계시면서 우셨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가셔서도 잃은 양을 위해서, 죄를 지으면서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께 눈물을 드립니까? 아니면 기쁨을 주십니까? 

예수를 구주로 믿었으니 기쁨을 드리는 자녀가 되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죄에 끌려 다니고 고통을 당하면 주님은 우리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 예수님의 기쁨은 뭘까요? 
구원받은 우리를 통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한국의 모든 교회가 놀랍게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이 성숙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요, 이것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임을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바냐서 3장 17절을 아시지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할렐루야 

우리 주님은 우리 때문에 슬퍼 우시기보다는 기뻐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아직도 천국이 뭔지도 영생이 뭔지도 모르는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밤낮 눈물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특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교회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부모님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식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 죄를 거두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3.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에 우셨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참 똘똘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는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그다지 큰 문제가 없고 모든 문제는 다른 사람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여러분! 어리석음 중에 가장 어리석은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너무나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냐고요? 이런 사람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죄를 변명하는 사람, 남에게 핑계 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변명은 /회개가 아닙니다./ 책임전가도/ 회개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이런 어리석음 때문에 울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면서, 그 성을 보시고 슬픔에 복받쳐서 비통하게 우셨습니다. 눅19:41~42절을 보세요.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성을 보시고 우셨나요? 그것은 감격스러워 우신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가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의 멸망의 날이 임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심판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를 대적하고 십자가에 죽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어리석음 때문에 우셨습니다.   

구약에 수없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것을 계속해서 예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그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배우긴 많이 배웠는데, 알긴 많이 알았는데,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보고 예수님이 우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 중에는 이런 사람이 없을까요? 

교회에 와서 예배는 드리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는 사람, 우리 속에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그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서 우시고 계십니다. 

왜 유대인들이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요? 그들은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가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치는 달랐습니다. 나사렛 촌구석에서 오시는 예수가 아니고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로마의 압제에서 자기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주님의 은혜는 큰 교회에, 화려한 곳에 있다고 믿고 있지 않나요? 

주님의 임재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곳에 있다고 믿지 않나요? 그러나 주님의 임재는 말씀 속에서 임하고 온전한 예배 속에 임함을 믿어야 합니다. 성도가 몇 명이 모였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화려하냐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영혼구원 사역이 있는 곳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까닭이 있는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사랑의 눈물 때문에 우리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 눈물 때문에 슬픔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 눈물 때문에 죄를 용서받고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늘 부활절입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감사의 눈물을 드리는 성도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죄 때문에 고통당하는 우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아 참된 자유를 누리시는 성도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나 혼자 누리는 구원에 만족하지 말고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친척, 이웃이 구원을 받도록 전도와 선교에 뜨거운 열정을 갖고 시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님의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는 비법입니다. 
(최일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