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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눅 24: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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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눅 24:17-35)  
  
할렐루야!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고 부활했다. 이는 정말 감격해야 할 사건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인들은, 부활절을 맞이해도, 아무 감동도 감격도 없고, 그저 “또 부활절이 되었구나!”하는 식이다. 무감각한 심령들이 되어서, 정말 안타깝다. 
  
마치 예수님이 (마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이 되었어도, 우리의 신앙마저 메말라, 감동과 감격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항상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기 바란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오후에, 두 사람이 어깨가 축 늘어져서, 깊은 슬픔에 잠긴 채, 엠마오로 향해 가고 있었다(13). 그들은 한없이 절망한 상태였다. (17下)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글로바(명성의 아버지), 또 한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18). 이 무명의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읽어보자. (18中-24)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를 기대한 주님이 체포되어, 빌라도에 의해 사형되자, 절망 속에 낙심에 잠겨,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부활의 체험과, 확신 없이, 십자가에만 머물러 있는, 오늘의 종교인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예수님을 3년씩 쫓아다니며 동거 동락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의심하면서, 몹시 갈등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 우리도 교회에 나와 예배하면서, 이들처럼 믿음이 없어, 갈등을 느낄 때가 있다. 부활신앙에 대해 의아해 하거나, 막연해 하는 분이 있다면, 오늘 아침 불확실한 신앙에서, 확신 있는 믿음으로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1. 우리는 생활 속에서, 주님과의 동행을 체험해야 한다(15-16).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下)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두 사람은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예수님이 동행하는데도, 주님인 줄 몰랐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도, 주님을 느끼지 못하고, 걸어가고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을 믿고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교회에서 예배하지만,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을 때, 예수님이 나와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임마누엘을 느끼지 못한다. 어느 날 죄악에 빠졌을 때, 예수님이 내 죄를 이미, 다 용서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영혼의 평안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막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며 예수님이 패역한 세대를, 책망한 말씀이다. 우리가 눈을 가지고도, 주님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가슴이 있어도 주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보지 못하는 이유는, (욥17:7)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했다. 근심에 빠지면 볼 것을 볼 수가 없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앞으로 살아갈 생활에 대한 근심과 염려로,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주님을 몰라보았다. 

(요20:13-14)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너무나 당혹스럽고 슬퍼서, 엉엉 울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주님께서, 마리아의 등 뒤에 서있었지만, 보지 못했다. 너무 슬픔에 빠져도, 눈이 보이지 않는다. 

(요일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미움이 눈을 가리면, 모든 것이 밉게 보이지만, 예쁘게 보이는 사람은, 나쁜 일을 해도 예쁘게 보인다. 그러므로 미움의 감정이 있으면, 밉게 보인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평소에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심의 마음을 가지면, 모든 사물은 올바르게 판단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 분별력을 흐리게 하는, 방해물들은 무엇인가? 

우리의 근심, 걱정, 슬픔, 미움, 범죄, 욕심, 의심들이다. 이러한 것들이, 성령으로 제거되지 않으면 영의 눈이 어두워서 밝히 볼 수가 없다. 우리의 영의 눈이 어두우면, 신령한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없다. 그래서 풍랑에 시달리던 제자들은, 주님이 물위로 걸어오실 때, 유령이라고 했다. 

지금 엠마오로 가고 있는 그들은, 예수님이 함께 하지만, 그들은 몹시 두렵고, 불안한 상태였기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거기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므로 불안할수록 눈을 크게 떠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자. 


2.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19-25)절을 보면, 예수님이 두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느냐고 묻자, 정확하게 예수님과, 지금까지의 사건을 설명했다.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고, 부활했다는 여인들의 말과, 두어 사람이 그것을 확인했다는 이야기를, 정연하게 말했다. 그들은 입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르게 전하면서, 그의 발은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다. 모순이 된다. 

입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면서, 발걸음은 인간 중심적으로, 낙망하고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다. 자기는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서, 말로는 성경을 줄줄, 외우는 사람들이 있다. 행동은 세상 향락에 빠져서, 세상 사람과 같이 행동하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생활은 엠마오로 향해 가면서도, 입술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사람들은, 예수님의 주변이야기는 줄줄 말하면서 그들의 발걸음은 지금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다. 지금도 입으로는, 예수님을 부르면서, 발걸음은 딴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러한 모순, 이중성에서 빨리 탈피하여야 한다. 믿을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데도, 믿지 못했다. (1) 선지자들의 예언이 많이 있었다. (2) 예수님은 죽은 후에, 3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했다. (3) 여인들이 무덤에 가서 보았다고 증거 했다. (4)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증언했다. 

이처럼 충분한 근거와, 증인이 있지만, 믿지 못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충분한 근거와 증인이 있는데도, 믿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말씀만, 믿고 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27)에 영적으로 어둡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어주셨다. 


3.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있어야 한다(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이 열릴 때,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주님이 열어주셔야 한다. 

(1) 성령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마음이 뜨거워져야 한다(32中).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마음이, 뜨거워져야 한다. 속죄의 감격으로 뜨거워져야 한다. 

성령의 임하심으로, 뜨거워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거워져야 한다. 주님이 주신 사명감으로, 뜨거워져야 한다. 

(2) 성령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신령한 영의 눈이 열려야 한다(30-31).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바라 볼 수 있어야한다. 근심과 걱정에 싸여서, 낙심과 좌절 속에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성경말씀을 풀어 설명하여 주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며,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 심령에 성령이 임하여도, 깨닫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심령의 문이 닫혀져 있고, 영안이 닫혀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축사하시고, 주시는 떡을 먹고서야,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았다. 

(3) 성령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변화되어 돌아와야 한다(33上).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했는데, 실의와 좌절에 빠져서,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는 세속의 길이요, 정욕과 낙망, 불신앙의 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은, 신앙의 길이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요, 소망의 길이다. 그렇게도 그립던 고향집을 지척에 두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올라가는 길은, 어려운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순교의 길이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에, 마음이 뜨거워져,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우리도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거했다(35). 이것이 부활한 주님을 만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지켜야 할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벗어나지 말고, 지켜야 한다. 성도의 자리, 신앙의 자리를 지키고, 엠마오로 내려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자리를, 잘 지키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믿음과 신앙이 내려가지 말기를 바란다. 

오늘 교회에 오실 때, 낙심과 실망의 마음으로 오지 않았는가? 예수님 없는, 예배를 드리는 분은 없는가? 오늘부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꼭 붙잡고 가기 바란다. 성령님이 역사하여,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형편, 어떤 이유가 있든지, 기쁨의 예수님, 생명의 예수님, 소망의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날마다 승리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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