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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흩어진 사람들 (행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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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사람들 (행 8:1-8)
  

들어가는 말

우리 사회에 내세울 수 있는 가톨릭의 상징적 인물은 ‘울지 마 톤즈’로 유명한 고 이태섭 신부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돌보다 48세에 숨을 거둔 그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러면 개신교에는 누가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개신교에는 딱히 그런 인물이 없습니다. 
목사로서 답답하고 부끄럽습니다.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거나 핍박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거룩한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감동시킬 만한 메시지, 그 메시지를 삶으로 보여주는 목회자나 평신도를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교회의 영적인 격이 떨어졌습니다. 
교육은 ‘나는 모른다.’에서 시작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죽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확실히 죽어야 확실히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아닙니까? 
A W 토저가 말한 대로 십자가에 물감을 칠해선 안 되고, 꽃 장식을 해서도 안 됩니다. 
십자가는 십자가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도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승리는 십자가 위에서 확실히 죽는 자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한 후(죽은 후) 받은 축복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이여 다스리소서!”입니다.(마틴 부버의 설명)
밤을 새워 벌인 영적 전투를 통해 옛 인간 야곱은 죽고, 새 인간 이스라엘로 탄생한 것입니다. 
새 인간으로 태어난 이스라엘은 브니엘의 아침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해갔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다 사랑하시지만 모든 사람을 다 그의 동역자로 쓰시지는 않습니다.

이제 새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지도력은 야곱형이 아니라 이스라엘형입니다.  
야곱형 지도력과 이스라엘형 지도력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야곱형  인간을 추동하는 힘은 야망입니다. 
야망은 인간의 욕심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야망을 가진 인간은 자신을 파멸시키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패망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개신교의 위신을 추락시킨 원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형 인간을 추동하는 힘은 비전입니다.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신을 살릴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교회를 추동하는 힘은 선교의 비전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① 우리가 복음을 위해 흩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강제로 우리를 흩으신다는 것입니다.
②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곳에는 반드시 큰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1. 우리가 복음을 위해 흩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강제로 우리를 흩으십니다.

1)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찾으라면 그것은 ‘흩어지니라.’일 것입니다.

1절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4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여기서 ‘흩어진다’는 말씀은 헬라어 동사로 ‘디아스페이로(diaspeiro)'인데, 이 말은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손으로 복음의 씨앗 된 성도들을 세상이라는 밭에 뿌리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도행전 8장 1절의 말씀을 실행하신다.”
무슨 말씀입니까?
행1장 8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부탁하신 대위임령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선교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행8:1절처럼 하나님의 흩으심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일을 감당하도록 성령의 능력을 더하셨습니다.
그리고 숫자적으로도 불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루에 3,000명의 그리스도인이 더하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숫자는 자라서 5,000명이 되게 하셨고, 또 더 많은 숫자가 불어났습니다.
원수들이 공격하는 말을 빌리면, 이제 예루살렘은 기독교 분위기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행5:28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그렇다면, 이제 초대교회 성도들은 당연히 그 힘을 가지고 유대와 사마리아로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격려하고, 교제를 나누고 신앙생활 하는데 만족했습니다.
“이 정도면 딱 적당하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다”
“우리들끼리 이해하고, 우리들끼리 사랑하고, 우리들끼리 잘 지내고, 우리들끼리 잘 해보자”

하나님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 축복의 복음을 나누기 위하여 흩어지도록 몰아 붙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박해’라는, ‘핍박’이라는 강권적인 방법을 동원하셨습니다.
핍박은 그 당시 교우들에게는 ‘고통’임이 분명하지만 하나님께는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이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만 합니다.

출애굽 이스라엘 공동체는 오늘 교회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이스라엘 공동체는 예배공동체이면서도 군사공동체였습니다.
구름이 성막을 덮으면 이스라엘은 예배공동체가 되고,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면 이스라엘은 군사공동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면서 영적인 군사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군사 공동체라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영적인 전쟁을 감행하는 선교공동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면서 선교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선교의 열정을 반드시 일깨워야 합니다.
또 교회는 선교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예배를 반드시 세워야 합니다.
예배는 선교를 지향해야 하고, 선교는 예배로 완성됩니다.
교회공동체는 반드시 선교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2)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가지고 흩어졌습니다.

비록 박해를 피하여 흩어지긴 했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명자로 나섰습니다. 
4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5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어떻게 도망 다니는 사람이 가만히 숨을 죽이고, 숨어 있어야지 ‘두루 다닐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복음 때문에 도망 다니는 사람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복음전파에 대한 사명의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큰 감동으로 다가 온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명자는 누구의 명령을 받드느냐에 따라서 그 신분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직장인으로 외국에 파견되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나는 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외국에 간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의 신분, 자긍심은 ‘범부’에 불과합니다.
‘나는 국가의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외국에 간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의 신분, 자긍심은 국가나 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자’가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복음 전파를 위하여 외국에 간다.’고 믿으면 그 사람의 신분, 자긍심은 ‘하나님의 사자’가 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명을 받들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의 크기는 중보기도의 크기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큰 사람이 아닙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이 큰 사람이 아닙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큰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30년을 했지만 기도의 범위가 ‘우리’의 범주를 못 벗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이런 사람은 기도의 수준이 유아기의 단계입니다.
어떤 사람의 기도는 이 나라, 나아가 열방으로 확장된 사람이 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산에 올라가서 민족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고 기도한 신앙의 선조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겔22:30-31절에 보면, 하나님은 중보자를 애타게 찾으십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오늘도 열방을 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설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 이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하나님, 용서하십시오.”라고 열방을 위하여 흩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설 사람들이 우리교회에서 많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흩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강제로 우리를 흩으십니다.

2.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곳에는 반드시 큰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1) 복음을 만난 곳에는 구원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7절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짧은 구절이지만 그 당시 의학으로는 아니 지금의 의학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들입니다.
현대의학이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나요?
현대의학이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나요?
치료가 어려운 질병들입니다.

누가는 특별히 치료가 불가능했던 질병들을 나열하면서 하나님의 큰 능력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불가능을 정복한 승리자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만만히 볼 수 없는 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결코 실패하거나 패배할 수 없는 자!
바로 그 사람이 여러분들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5:7-9)

여러분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2) 본문에 예수 믿고 난 다음에 그 성에 큰 기쁨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8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믿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만나는 개인에게, 집안에게, 민족에게 반드시 큰 기쁨이 있습니다.
'복음’을 희랍어에서는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전쟁을 끝내고 ‘승전보’를 알릴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남정네들이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아낙네들과 아이들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이제나 저제나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남편을, 형제를, 자식을 다시 만날 수가 있습니다.
가족이 모여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전쟁에 지면 성은 불타게 될 것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갈 것입니다. 
행복은 끝나고 참혹한 비극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루에서 “전령이 나타났다”고 소리칩니다.
까만 점과 같은 사람이 언덕에 가려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합니다. 
사람들의 가슴은 점점 더 조여 옵니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고 달려온 그 전령이 입에 손을 모으고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그 소리가 얼마나 복 되겠습니까? 
성중의 사람들은 그 소식을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그 소식을 전해 준 발걸음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래서 사52:7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복음을 전하면 이렇게 기뻐하고, 이렇게 반가워하고, 이렇게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삶에 큰 기쁨을 줍니다.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곳에는 반드시 큰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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