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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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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8)


요한복음은 여러 모로 볼 때에 매우 특이한 책입니다. 이미 공관복음서라고 하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기자는 이 책을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기자는 왜 이 요한복음을 기록했을까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기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 침투한 이단 사상을 퇴치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노시스주의 또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 사상이 교회를 매우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 또한 참 사람이시라는 진리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이 책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원래 20장 29절까지의 기록이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0절, 31절 말씀에서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을 밝힌 것으로 봐도 그런 사실을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그렇게 끝난 것 같았는데 21장 말씀이 추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 우습기도 하고 또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 또한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하여간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호수라고 하는 갈릴리 호수로 제자들을 찾아가 나타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표현은 약간씩 다르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기를 비시고 이어서 그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말씀에 아주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시몬 베드로가 다섯 명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거기서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뭐라고 서로 말을 주고 받았습니까?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요 21:3)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평생 고기를 잡아왔지만 그 밤에 그들은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주님이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없나이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그 말씀대로 했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놀랍게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과연 부활하신 주님은 능력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에서 조반을 잡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당시 교회 안에 침투한 이단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환상이나 환각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엄연한 현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 주고 싶어서 요한복음 기자는 약간은 어색하게 보이는 이 기사를 추가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제자들과의 조반을 마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다 물으시는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 속에 매우 중요한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한 번 물으시고 한 번 대답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도 뭔가 굳게 다짐할 경우 삼세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조금씩 다르게 묻고 대답했지만 결국은 세 번에 걸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주님은 물으셨고 베드로는 직설적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빙빙 돌려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먼저 주님이 베드로를 부르신 호칭부터 생각해 봅니다.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던 도중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한 고백을 들으신 후 그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셨고 그 후로는 쭉 그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베드로라는 새 이름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기 전에 쓰던 이름, 즉 시몬이라는 옛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아마 가슴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세울 반석이 아니라 물고기나 잡던 갈릴리 어부의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왜 그렇게 부르셨습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에 간 것은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쳐 놓고 고기를 잡은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이 시간에는 주님이 사용하신 사랑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들과 베드로가 말한 사랑이라는 단어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왜냐 하면 아가페 사랑이냐 휠리아 사랑이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아가페 사랑을 물으신 것 자체가 무리였습니다. 그 사랑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랑이요 또한 주님의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까? 그 질문을 통해서 주님은 그의 실수를 분명히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실수를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면 결국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기 때문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장담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을 결코 부인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그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때 거기서 어떻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습니까? 

또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세 번씩 부인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제자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습니까?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베드로는 그 십자가 곁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어떤 책에서도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다만 여인들만 거기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에는 사랑하시는 제자만 그 모친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곁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함께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 도망치지 말았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이미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디베랴 호수에서 물고기나 잡겠다고 배에 오를 수 있습니까? 진짜 주님을 사랑한다면...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참 사랑의 회복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더 이상 실수하지 말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셨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울러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맡기신 양을 잘 돌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말뿐인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주님의 양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참 사랑이 요구된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거듭 물으셨던 것이고 그 후에 비로소 주님의 양을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 옛말에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연 그는 더 이상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기꺼이 순교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많은 재물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까? 권력이나 지위나 명예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영광스러운 부활의 현장이 아니라 초라하고 비참한 십자가 죽음의 현장에 과연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비록 지금까지 주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핑계하지 말고 분명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 제가 그 어떤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오직 그 사랑을 가지고 그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결코 굴하지 말고 주님이 맡기신 양을 돌보는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는 참으로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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