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최고의 복음에 반응하기 (요 14:15)

첨부 1


최고의 복음에 반응하기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장 15절]

사랑하면…
어느 부부가 약간 다투고 싸움을 했답니다. 두 사람은 다투어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남편이 내일 아침 회사에 일찍 나갈 일이 있어서 종이에 편지를 썼습니다.
“여보, 나 내일 7시에 깨워줘요”
그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이 일어나니 8시가 넘었습니다. 남편은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메모지가 있었습니다.
“여보, 7시예요. 일어나요.”

부부싸움은 심각한 싸움이 아니고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기려고 하니까 싸움이 되지 지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싸움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혹시 싸우는 순간에도 사랑하는 감정이 여전히 살아 있나요?
우리 신앙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는 복음에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문제는 주님을 사랑할 때가 아니라 그 사랑이 식었을 때이거나 아니면 다른 것에 그 사랑을 빼앗겼을 때가 아닐까요?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한 구절이 들어왔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그렇구나! 사랑하면 반응하는데,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반응하지 못하는구나!
성경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남녀 간의 사랑으로 비유한 것이 참 많은데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순간, 계명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즉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감정이 무엇인가요?

마치 부부싸움을 하고 집을 나가면 매사에 짜증이 나고 일이 꼬이지 않던가요? 싸움에 대한 잔상이 일상을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던가요? 결국, 행복한 부부란 사랑하므로 나오는 반응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능력이 아닐까요?

결국, 문제의 답은 복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반응할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죠.
설교를 준비하며 읽은 어떤 미국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두 여성이 고장 난 차 옆에 서서 고속도로를 급히 달리는 다른 차들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때 메릴랜드에서 목회하는 링컨 목사가 멀리서 그들을 보고 속력을 늦추었다. 차를 몰면서 목사는 곰곰이 생각했다.
'한 시간 안에 교회에 도착해서 설교를 해야 하는데 지체하지 않는다면 겨우 시간 내에 도착할지 모르겠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내가 설교 약속에 늦는 것을 원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

링컨 목사는 발을 브레이크에 옮기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 사람들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내가 어떻게 아는가? 최근에 이 지역에서는 무임승차를 한 사람들이 운전사를 강탈한 일이 있었다.'
그는 다시 발을 엑셀러레이터로 옮기고 속력을 내었다. 그는 그들이 다른 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거울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그날 그의 설교는 실패작이었다. 그는 꼭 필요한 것이 빠져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복음에 따라 사는 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사랑한다는 건” 내가 잘 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합니다.
올 초에 신년집회를 하면서 여러분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팬인가요? 아니면 제자인가요?”

이 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팬은 자신이 열광하는 것에 반응하지만, 일생을 함께 뛰는 선수가 되지는 못합니다. 단지 자신의 기호가 바뀌면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따라갑니다. 자신을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따라가며 번영을 꿈꾸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번영을 약속하시기보다는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명령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명령이 무엇인가요?
누가복음 9장 23절을 보세요.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제야 정확히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차원이 아니라 복음 앞에 반응한다는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면…”이라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가 명령을 절대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한 사람을 부르실 때는 그에게 와서 죽으라고 하신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누구에게 십자가가 가벼운지 무거운지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복음 앞에 서 있는 우리의 건강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십자가는 쉽지 않은 것, 때로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을 예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불림을 받은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들어서 고난 받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4-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첫째로, 어떤 병사도 호화 사치품을 두르고 전쟁하러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죠.
편안한 침대에서 활동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임시로 쳐 놓은 좁은 천막에서, 그리고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가능하도록 야전 침대를 놓고 생활합니다.

병사로 복무하는 이가 이전 생활을 생각하면 절대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병사로 복무하는 기간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부르신 이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생명을 가진 것,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신 이의 사명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이생의 삶은 잠깐이요,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매스컴을 통해 터지는 연예인들의 병역 문제들을 접하게 됩니다. 연예인들과 프로 운동선수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 기간에 자신들이 잊힐까 봐, 또한 실력이 줄어들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그 동안 용기 있게 헌신한 사람들에 열광합니다. 현빈이 스타가 된 것은 연예병이 아닌 당당한 해병대원으로 군 생활을 마쳤기 때문입니다. 천정명이라는 배우가 신병 교육대 조교로 군 생활을 마쳤기 때문에 좋은 이미지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요?
잠시의 고난을 피해 자신이 겪어야 하는 때를 편하게 지낸다면 나머지의 삶이 불행해지는 것이죠. 자신에게도 부끄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났기에 마땅히 져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불림을 받았기 때문에 마땅히 져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순간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병사로 모집한 이를 기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죠.

둘째로, 병사처럼 운동선수도 과업에 집중하고 몰두합니다. 모든 경기에는 상이 있고, 또 경기마다 법이 있습니다. 선수는 ‘법대로’ 경쟁해야 하죠. 여기서 ‘법’에 해당하는 원어는 ‘정당하게’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불림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 법과 계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이 그 법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서 자유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서 유명한 말을 하지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법대로 경쟁하는 정당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익한가?” 누구에게? 바로 우리를 부르신 이에게!

제가 아주 감동적으로 본 영화 중의 “블라인드 사이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마이클 오어’라는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를 그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약물중독에 걸린 엄마와 강제로 헤어진 후 여러 가정을 전전하며 살아갑니다. 어느 추수감사절 전날 밤 차가운 날씨에 반소매 셔츠만을 걸친 채 체육관을 향하던 그를 발견한 부유한 크리스천 가정의 ‘리 앤’은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렇게 그 가정에서 살아가게 되고, 그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는 경기에 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식축구의 룰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가 룰을 알고 경기를 보는 안목이 생겼을 때, 비로소 그의 힘과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유명한 선수로 자라납니다.

우리를 운동선수로 비유한 것이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안에서 누려야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셋째로, 6절에 보니까 농부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예화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수고가 따른다는 것이죠. 먼저 수고한 농부가 열매를 거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가장 신실한 농부는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농사가 참 좋은 것은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천재지변이라는 변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부분들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전도서 11장 4절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환경을 바라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복음을 산다는 것은 최고이신 그분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역시 그분에게 있음을 믿기 때문에 용기있는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이죠.

언젠가 신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습니다.
필립스라는 유명한 전기면도기 회사가 있습니다. 매출이 50%가 늘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면도기는 남자가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좋아하는 디자인과 색상으로 바꿨습니다. 대개 여자들이 남자에게 선물하는 물건 중 1위가 면도기라고 하죠. 그래서 여자들에게 맞춰 바꿨더니 매출이 늘어난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예가 있습니다.
일본의 최대 사과 생산지인 아오모리 현에서 1991년 가을 태풍으로 사과의 90%가 다 떨어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넋을 잃고 있을 때, 그 마을 이장이 나서서 “우리 남아있는 10%의 사과를 활용하자!” 그리고 그 사과를 어떻게 팔았느냐면, “무서운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은 ‘합격사과’라는 이름으로 10%를 열 배 비싼 가격에 판매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 팔렸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위대함은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주변의 환경이나 사람을 따지지 말고 명령을 행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죠. 그러면 거두리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 반응한다는 것!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행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복음에 반응하는 것일까요?
미국 남북전쟁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라는 유명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육탄전까지 치르고 수많은 부상자를 중간에 남겨 놓은 채 쌍방은 후퇴하여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북군 병사 하나가 물통을 들고 달려나갔습니다. 남군에서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병사가 목숨을 걸고 남군, 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광경을 보고 사격은 중단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쌍방은 한 시간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하고 서로 부상자 처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 남군 장교가 이 북군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What is your name?”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My name is Christian.”

그때 그는 자기의 부모가 그에게 준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죽어가는 병사들을 향해 달려가게 한 그 이름을 말했습니다.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결코 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건 이름이었습니다. 전 존재를 건 이름이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렇게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고, 한국 기독교인들은 말 따로 행동 따로 즉 ‘이중인격자’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이유는 우리 가운데 바로 이런 ‘크리스천’들이 많지 않아서입니다. 예수처럼 살려는 진정한 신앙의 경주가 없어서입니다.

이 이야기가 복음에 반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지요. 다시 본문 말씀을 볼까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우리 중에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실수를 하고 누군가를 실망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모하게 보이는 행동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에 반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복음에 반응하며 계명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두시지 않고 인도하시고 교정하시고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복음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죠. 참 힘들기는 하지만 누군가에게 질책을 받고, 꾸지람을 들을 때 그 관계는 살아있다는 것이죠. 한 번 그런 기도를 해 보셨나요?
“하나님 저를 혼내 주세요? 제가 올바로 반응하고 있는지 알려주세요?”

아주 흥미로운 예화입니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과 길을 가는데 길옆에서 한 사람이 소변을 보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를 불러 크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 계속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큰 대로에서 한 사람이 큰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공자가 그에게 불벼락을 내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본척만척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제자들이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은 더 잘못했는데 왜 그냥 지나치나요?”
그때 공자가 말했습니다.
“저 인간은 야단쳐도 들을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네.”

책망도 들을만한 사람에게 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윗사람의 책망을 감사하십시오. 포기한 사람에게는 책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은 책망받을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책망받을 때 정당한 그 책망을 달갑게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신앙은 내 맘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책망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은 잘 다듬어 세상의 빛으로 삼으십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복음에 반응한다는 것을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1. 복음에 반응한다는 것
주님은 절대로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주 강하게 말씀하시지만 절대로 강제로 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된 마음 가운데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자도를 말씀하실 때마다 언제나 ‘만일’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영원한 신분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속에서 주님께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는 비결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규율을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을 명확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주님과 나의 관계가 사랑이라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할 것입니다. 만일 주저한다면 이는 내게 주님 외에 주님과 경쟁 상대인 다른 사랑의 대상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다른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그분께 순종할 수 있도록 돕지 않으시기 때문에 내가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주께 순종할 때 나는 영적 사명을 이루게 됩니다.

결국, 복음에 반응한다는 것은 순종입니다. 그리고 순종은 복종과는 다른 것이죠. 억지로 힘에 눌려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따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는 것이죠. 최고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규율”이 아니라 “기준”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2. “지금”

하나님의 명령은 ‘지금’이지 ‘나중’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논쟁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 당장 하지는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 하지 않으려고 여러 핑계를 찾기 위해 애씁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정상에 오르는 것은 나중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희생은 현실 속에서 드려지기 전에 나의 의지 안에서 먼저 드려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희생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희생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희생 제사를 언제나 경계하십시오. 나의 희생은 질병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달콤한 잔을 주시면 은혜로 마시고 쓴 잔을 주시면 주님과 함께 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의 섭리 가운데 어려운 시간을 허락하시면 받아들이고 견디십시오. 절대로 스스로 순교 장면을 연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혹한 시련을 선택하셨으며 아브라함은 아무런 항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내하며 지나갔습니다.

만일 당신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을 향해 섣부른 판단을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판단하기 전에 그 시련을 다 통과하십시오. 그 시련 가운데서 당신은 하나님을 더 잘 아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목적이 그분의 목적과 하나가 될 때까지 최상의 목적을 위해 일하십니다.

저는 이 부분을 참 의미 있게 읽었습니다.
복음에 반응하는 것은 ‘지금’에 반응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중에 혹 복음에 반응한다는 것은 고난과 순교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반응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일입니다. 달콤한 잔을 주시면 은혜로 마시고, 쓴 잔을 주시면 주님과 함께 마시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반응하면 아무리 하찮은 일들이라도 “거룩”해집니다. 왜냐하면, 최고이신 그분과 함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 “직감적 반응”

하나님과 깊게 하나가 되면 주님께 나를 어떻게 인도해달라고 끊임없이 간구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거룩하여졌다는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이며 자녀라면 불순종을 원하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순종할 것입니다. 불순종을 하면 직감적인 갈등이 생깁니다. 영적 세계에서 이 직감적인 갈등은 성령의 경고입니다.

성령께서 이러한 경고를 주시면 당장 멈추고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여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도 주님께 이렇게 저렇게 나를 인도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경건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사람이라면 지난날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놀라운 섭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저에게 너무나 와 닿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은혜를 받고 나서 깨닫게 된 것은 인도해 달라는 간구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순종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확신하기에,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도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되지요.

2012년 6월 23일 자 weekly biz에 ⌜중국에 뼈를 묻어라. 대륙의 마음을 얻은 ‘이렌 웨이’⌟ 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많은 기업이 중국에 들어가서 어려움을 겪는데 이랜드 차이나가 이례적으로 13만 제곱미터의 땅을 시중 가격보다 70% 싼값에 분양을 받은 것입니다. 이랜드 차이나가 있는 상하이시 민항 측은 “세금을 정직하게 너무 많이 내줘 고맙다.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민항구에 계속 있어 달라”는 부탁까지 하며 1억 위안 (약 180억 원)의 세금을 환급해 줬습니다.

이랜드 차이나는 중국 내 한국 기업들 사이에서 ‘기적을 쏜 기업’으로 불리는데,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에 네 번째를 소개합니다.
“술. 담배 안 하는 이랜드 방식으로 비즈니스 개척”
‘이렌’의 비즈니스 방식도 독특하다. 중국에서 보편화된 술 담배나 금품 제공. 성. 유흥접대 등을 거부하고 ‘이랜드 방식’으로 일관한 것이다.

예컨대 ‘이렌’ 브랜드 입점을 위해 백화점 실력자나 지역 유지들을 만날 때도 ‘이렌’은 향응이나 금품 제공 대신 사업 발전과 관련한 대화를 나누는 답답한 방식을 고집했다. 정부 공무원들에게는 초청 강의를 자주 맡겼다. 한번 만난 공무원들에게는 친필로 편지를 써 친밀감을 보였고 매출. 이익 등 경영 실적을 분기별로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공개하고 걸맞은 세금을 꼬박꼬박 다 냈다.

‘이렌’의 한 관계자는 “민항구 내 13만 평방미터 규모의 토지를 분양받기 위해 2년 6개월에 걸쳐 시 정부 당국자들을 220회 정도 끈질기게 만났다”며 면담할 때마다 최근 한국 연속극 CD 같은 작은 선물을 들고 가는 식으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정을 쌓으려 애썼고 결국에는 이런 진심이 통했다.“라고 말했다. 현지화를 핑계로 중국 방식에 물들지 않고 원칙에 입각한 ‘인내’와 ‘신뢰’로 돌파하는 ‘이랜드 웨이’가 적중한 것이다.

세상 사람에게는 세상의 방법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지금, 직감적으로 복음에 반응하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반응하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결과도 체험도 기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홍해는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쳤을 때 갈라졌고,
요단강은 믿음으로 발을 디뎠을 때 갈라졌습니다.
베드로는 풍랑 가운데 내려왔을 때 물 위를 걸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빵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반응하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김병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