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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의 길로 돌려 (출 13: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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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길로 돌려 

(출13:17-22)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1. 유명한 그림책 작가 도널드 크루스의 그림책 <지름길>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놀다가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지름길로 집에 가기로 합니다. 지름길은 다름 아닌 기찻길입니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는 낭만적이지만, 집에 가려고 지름길인 기찻길을 택한 한 무리의 아이들은 기차 때문에 평생 잊지 못할 공포를 경험하게 됩니다. 

기찻길 옆에 사는 아이들은 날마다 기찻길 가까이 가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지만, 평소 열차가 다니는 시간을 잘 아는 아이들은 익숙한 큰길 대신 그냥 기찻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가기로 합니다. 어른들이 옆에도 가지 말라던 그 길을 아이들은 갑니다. 걷고 있는 철길에 언제 화물열차가 닥칠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자기들 방식대로 눈으로, 귀로 한 번 살펴보고는 기찻길을 갑니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기찻길이 지름길이니까, 기차가 오는지 잘 살펴보면 되겠지! 하지만 화물 열차는 정해진 시간 없이 언제든지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 당장이라도 화물 열차가 모퉁이를 돌아 눈앞에 나타날 수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철길을 따라 걸으며 웃고 장난치고 어깨동무하고 노래도 부르며 기찻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그때 아주 멀리서 아주 작게 들려오는 소리, 그 소리는 점점 선명하게 들려오고 모두가 기차소리라고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건널목을 지나친 지 오래. 건널목으로 되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앞쪽 샛길로 달려가야 할까, 무지막지한 소리를 내뿜으며 달려드는 검은 쇳덩어리가 바로 뒤까지 쫓아왔을 때, “기찻길에서 내려가!” 소리 지르며 앞다투어 기찻길에서 뛰어내립니다. 가파른 비탈의 찔레 덤불이나 뱀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칙칙폭폭 칙칙칙칙 폭폭폭폭 그 앞으로 질주하는 기차! 그 순간 아이들에게 달려드는 검은 공포와 위협에 비하면 날카로운 찔레덤불과 뱀이 우글거릴 것 같은 끔찍한 기찻길 비탈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차의 위협을 온 몸으로 겪은 아이들은 그 뒤로 오랫동안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지름길을 가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가까이 가지도 말라고 했던 기찻길 위에서 기차의 위협을 온 몸으로 느껴본 경험, 그것은 그 어떤 충고보다도 아이들 마음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것입니다. 공포와 위협을 실은 화물열차가 지나간 뒤, 한숨을 몰아쉬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불빛이 보이는 집을 향해 아무 말 없이 걷는 아이들에게 ‘그것 봐라. 내가 그랬지.’ 하는 현실의 어른들 충고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전역에 내린 장자 죽음의 재앙을 당하고 바로 왕은 어찌할 도리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던 곳은 라암셋인데 그곳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은 블레셋의 해안 도시 가사(Gaza)를 통하는 지중해안의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가나안 땅까지 약 4일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이처럼 가나안 땅에 이르는 지름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바꾸어서 애굽으로 되돌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이르는 지름길에는 당시 철기 문화를 배경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호전적인 블레셋 족속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만을 하다가 급히 나온 터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정비가 안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을 치를 군사적인 준비 뿐 아니라 마음의 준비조차도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 다섯 개의 큰 도시 국가들(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로 상호 공수 동맹을 결성한(수 13:3) 막강한 블레셋 군대와 맞부딪치게 되면, 쉽게 낙심하고 출애굽한 것을 후회하면서 오히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소지가 충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따라서 하나님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6배나 먼 광야 길로 그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나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에 취하신 조처였던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호렙 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하여 인도해낼 지도자로 세우실 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3:12입니다.

(출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기 “산”은 시내산을 말합니다. 장차 모세가 십계명을 받게 될 시내산을 두고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라” 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도 지름길로 가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지름길과 반대되는 광야길로 가야만 약속하신 시내산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2.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신 것입니다. ‘광야’는 ‘샘이나 강 등 사람이 쉴만한 곳이 전혀 없는 곳’을 말합니다. ‘광야’는 물과 식물이 없으므로, 주민이 살 수 없는 땅일 뿐만 아니라 또한 황폐하게 되어 버려진 황무지를 뜻합니다. 신명기8:15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광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8: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편안하고 빠른 지름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광야 길, 멀고도 험한 고난의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때로 성도들을 인생의 지름길로 인도하시지 아니하고 광야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 깨닫게 하시지 않으시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름길을 버려두고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훗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길로 돌려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 말씀을 보겠습니다. 신명기8:1-3, 14-16입니다.

(신8:1-3)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14-16)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 길로 인도하신 목적은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단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B.C.539년경 바벨론 벨사살 왕이 귀족 천 명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메대 왕 다리오에 의해 포위되어 경제적, 정치적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은 바벨론 제국의 멸망과 왕의 비참한 최후를 알리는 서곡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벨사살 왕은 그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실 때, 과거 자기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탈취해서 가져온 성전 기구들, 다시 말해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사용하는 기구들을 오게 해서 귀족들의 술잔으로 삼도록 했습니다.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성전 기구들을 술잔 삼아 술을 마셨을 때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왕의 맞은 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잔치를 즐기던 왕의 얼굴빛이 창백해지더니, 공포에 사로잡혀서, 넓적다리의 힘을 잃고 무릎을 서로 부딪치며 떨었습니다. 왕은 덜덜 떨며 큰소리로 외쳐서, 주술가들과 점성술가들과 점성가들을 불러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서, 그 뜻을 나에게 알려 주는 사람은 자색 옷을 입히고, 금 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며, 이 나라에서 셋째 가는 통치자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글자를 읽는 사람이 없었고, 그 뜻을 왕에게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벨사살 왕은 크게 낙심하여 얼굴빛이 변하였고, 손님들도 당황했습니다. 소란과 혼란에 빠져 요란한 소리를 듣고 왕의 어머니가 연회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왕의 어머니는 자기 남편 느부갓네살 왕 통치 시대에 탁월한 정신과 지식과 꿈을 해몽하는 총명이 있어서, 수수께끼도 풀었고, 어려운 문제도 해결했던 다니엘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고 들어온 다니엘이 그 벽에 쓰인 글자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왕이여,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아버지 느부갓네살 왕께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들이 그 앞에서 떨면서 무서워하였으며, 부친께서는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높이기도 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낮추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친께서 마음이 높아지고 생각이 거만해지셔서, 교만하게 행동을 하시다가, 왕위에서 쫓겨나셔서, 명예를 잃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쫓겨나시더니, 그의 마음은 들짐승처럼 되셨고, 들나귀와 함께 사셨으며, 소처럼 풀을 뜯으셨고, 몸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로 젖으셨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부친께서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나라를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을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깨닫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의 아들이신 벨사살 왕은 이 모든 일을 아시면서도,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지 않으시고, 하늘의 왕이시요 주님이신 분을 거역하시고, 스스로를 높이시며,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그릇들을 가져 오게 하셔서, 왕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으로 술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왕은 보거나 듣거나 알지도 못하는, 금과 은과 동과 쇠와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은 찬양하시면서도, 왕의 호흡과 모든 길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손을 보내셔서, 이 글자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기록된 글자는 바로 ‘메네 메네 데겔’과 ‘바르신’입니다. 그 글자를 해석하면, 이러합니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계산하셔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리셨는데, 무게가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이고, ‘바르신’은 왕의 왕국이 둘로 나뉘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그 밤에 벨사살 왕은 살해되었고 나라를 두 쪽으로 분단되었습니다.(단5장, 단4:34-37)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여 사람에게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7년을 지낸 끝에 이렇게 겸손을 배워 고백했습니다. 

“(단4: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 왕은 그 아버지가 당한 사건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단련되지 못하여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 누구든 하나님 앞에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이 교만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염려하셔서 광야길로 돌려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겸손하게 단련하기 위해서 광야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마음으로 단련하시는 목적은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신8:16)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그 마음을 연단, 단련하십니다. “불은 은과 금을 연단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연단하십니다.(잠17: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지중해변 지름길에서 돌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겸손하도록 ‘연단’(test)하시기 위해, ‘시험’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의 ‘광야’는 ‘연단’을 위한 ‘도가니’, ‘풀무’, 즉 금을 걸러내는 용광로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 위해 시험하시고자 하는 것은 첫째, ‘낮추는 것’, 즉 겸손이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낮에는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아래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습니다. 또한 밤에는 추위로 말미암아 불기운이 없이는 몇 시간도 견딜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마실 물이나 사람이 먹고 살만한 음식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시고, 밤에는 따뜻한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시지 아니하면 단 하루도 견딜 수 없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동안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하늘에서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반석을 쳐서 그들의 마실 물, 생수를 공급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40년 동안 그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고, 그들의 발까지 하나 부릍지 아니하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이 입고 먹고 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인생을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달프고 험난한 광야 생활 중에서도 의식주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상기시킴으로써 겸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계명을 순종하여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계속되는 신명기 8:17-18을 보겠습니다. 

(신8:17-18)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사람이 배부르고 좋은 집에서 살며 모든 일에 풍부하게 되면 마음이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지난 날 애굽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일, 그 위험한 광야, 곧 독사와 전갈의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그리고 물 없는 땅에서 생수로 마시게 하며 땀흘려 일하지 아니하고도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먹이신 일 등,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잊어버리고 교만할까 염려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사람이 교만한가 겸손한가를 시험하십니다.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부유하게 되었노라며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과 재능, 힘과 환경을 축복하셔서, 한 마디로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되었다고 믿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교훈합니다. 

(렘9:23-2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명철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고 그 하나님을 자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당대에 율법 박사로 빼어난 학문과 학벌을 지녔습니다. 정통 히브리인으로 뛰어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소유한 권세있는 집안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그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겨 몽땅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겨 그리스도 예수만을 자랑했습니다. 야고보서1:9-12을 보겠습니다.

(약1:9-12)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같이 쇠잔하리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이생의 자랑’(요일2:16)을 다 버리고,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고 시험과 연단을 겸손함으로 잘 감당하여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누리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는 이유는 ‘마침내’, ‘마지막’에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낮추시는 것은 우리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광야길'은 연단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 길로 인도하심은 자기 백성을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갖가지 시험과 시련으로 백성을 연단시키어 가나안을 상속받을 만한 성숙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그들을 죽음이 상존하는 광야 길로 내모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간혹 보이지 않는 거칠고 험한 광야 길과 같은 곤혹스러운 환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견디기 힘든 시험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절망하며 죽음을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여 더욱 성숙한 인격과 축복을(고전 10:13)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조처입니다(약 1:2-4)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치른 광야 길을 주심은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증표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인간이 보기에 때로는 고통스럽고 불투명하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영광스런 목적지에 이르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즐겨 추구하는 지름길이 항상 최선의 길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믿고 불평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이 고통스럽고 힘들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수 백, 수 천 km 돌아가도록 하셨지만 그 길이 종국에 가서는 마침내 가나안을 소유케 하는 바른 길이요 유익한 길이었음을 기억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B.C.1410년경,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광야의 길을 걷는 광야 생활이 거의 마감되어가는 때였습니다. 광야 생활 40년이 다 되어가는 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로 눈앞에 두고 광야길 행군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남지 않은 여정이 결코 쉽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고속도로처럼 바로 질러가는 지름길이 있는 에돔 땅을 지나가면 아주 수월한데 에돔 족속들이 이를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민20:14-21) 

할 수 없이 먼 길로 돌아가자니 그만 마음이 상하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상하자 그간 물 때문에 고생했던 일들이 또 다시 생각나기 시작했고, 날마다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주시는 만나마저 “박한 식물”, 다시 말해 보잘 것 없는 양식으로 생각되어 원망 불평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망각하고 원망 불평을 일삼는 이들에게 불뱀을 보내서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민21:4-6)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 불평을 털어놓게 된 것은 ‘광야의 험한 노정에 지름길을 놔두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상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마음이 상했다.”는 말은 ‘안목이 좁아졌다’라는 말입니다. 마음이 상해 안목이 좁아지다 보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만나마저 “박한 식물”,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가깝고 편리한 지름길을 놔두고 그 머나먼 광야길로 돌아가야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다 보니 지난 38년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마저 ‘박한 식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연단하심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하고 원망불평하므로 결국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광야길로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므로 끝까지 감당하여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목적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그 마음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그 험악한 광야길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지 여부를 아시고자, 그리고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 하나님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단련하기 위해 광야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신8:2)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된 지 한 달이 되던 때 광야에서 그간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이 모두 떨어지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애굽에서 종살이했을지라도 그 때는 고기도 얻어먹었고 밥도 배불리 먹었었는데,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고 하던데 차라리 그 때 먹다가 죽게 내버려두지 왜 이 모진 광야까지 끌고 와서 우리를 굶어죽게 만드냐며 원망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출16:4-5)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이제부터 하늘에서 만나를 비같이 내려 일용할 양식으로 날마다 거두게 할 텐데, 제 육일에는 갑절로 거두어 제 칠일 곧 안식일에는 거두지 않아도 먹을 수 있도록 해서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같이 하여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이 하나님의 율법, 말씀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욕심이 생겨 일용할 양식 외에 더 거두어 다음날까지 쌓아두었습니다. 그러자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그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전, 제 육일에는 갑절, 즉 이틀 양식을 거두어 보관했다가 안식일에 먹어도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칠일에는 만나를 내리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만나를 거두러 밖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를 ‘시험’하시겠다고 하셨음에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과연 예수 믿는 성도들이 주일을 성수(聖守)하는지 여부를 시험하시는데 주일을 성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이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는지 여부를 ‘시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세상에 살면서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쓰디 쓴 환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지 여부를 ‘시험’하십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큼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욥1:1,8) 그리고 동방의 거부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시험을 받아 하루 아침에 몰락하는 엄청난 환난을 당했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고 한순간에 모든 자녀들이 압사를 당하는 재난을 당했습니다. 환난 중에 욥이 이렇게 탄식합니다. 

욥기 23:1-12내용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내 발은 오직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만 성실하게 걸으며, 길을 벗어나서 방황하지 않았건만! 그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계명을 어긴 일이 없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늘 마음 속 깊이 간직하였건만!>(욥23:1-12) 

이러한 욥의 탄식 중에 드리는 고백에서처럼 욥은 환난 중에 드리는 기도에 아무런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어긴 일어 없었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항상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환난 중에 욥의 고백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when he has tested me)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환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단련하신다.’, ‘시험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잠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시험)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결국 욥은 이렇게 끝까지 믿음을 지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보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갑절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욥42:10)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 중 때로 욥과 같이 ‘시험’받으실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은 욥 한 사람의 신앙에 대해 무려 42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단련된 마음, 연단된 믿음, ‘증명’된 믿음이 가치가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마음을 끝까지 지키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 말씀을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히8:10)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믿음과 그 믿음대로 사는 신앙생활을 하나님 앞에 증명하므로 마침내 복을 받되 처음보다 갑절의 복을 더 받으며 “(벧전1:7)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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