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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의 평강 (요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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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평강 (요 14:27)

[요한복음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최고의 선물
어느 날 새벽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새벽은 참 저에게 좋은 시간입니다. 홀로 있기에 번잡하지 않기에 묵상하기 제일 좋은 시간이죠. 참 좋은 시를 만났습니다. 김영민 목사님의 [친구]라는 시집에 나오는 글입니다.
“평안하냐!”
주님 부활하시고 첨 하신 말씀
일하라 선교하라
아니 하시고
제자들에게 첨 하신 말씀
“평안하냐!”

오늘 [주님은 나의 최고봉] 시리즈를 마감하면서, 최고이신 주님을 사랑하고 사명에 충실하며, 복음에 반응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이 있다면 바로 ‘평안’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말씀을 나누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것은 “평안”이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요한복음 14장 26절의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은 “관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생각나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과 우리가 함께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입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상관없이 진실로 주님께 당신 자신을 완전하게 맡겼는가 하는 말입니다.

‘평안’하면 늘 저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매우 좋아서 여러분과 참 많이 불렀던 찬양입니다.
무디와 함께 사역했던 평신도 스패포드(Spafford)가 시카고 대 화재에서 재산을 잃고, 여행 중이던 자식들을 바다에서 다 잃고 나서 그 죽음의 바다에서 고백했던 찬양 말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최고이신 그분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도, 큰 풍파로 무섭고 험해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평안하지 않은 우리가, 번잡스러운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최고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평안하뇨?”

그런데 오늘 본문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안을 원하고 평안을 이야기하지만, 세상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과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안은 다른 것이죠.

오늘 본문에,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주는 평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겠죠.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은 무엇인가요? 아마도 우리의 평안을 깨뜨리는 “근심거리”가 사라지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근심거리는 해결되어도 또 생긴다는 것이죠. 또 하나, 우리를 두렵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들을 압도할 수 있는 뭔가를 얻으면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일정한 자리에, 풍부한 돈에, 원하는 사람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압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그 무엇이 어느 날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세상은 우리가 믿고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구와 배신의 상처 가운데 우리의 평안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결국, 평안은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성령님과 함께할 때 찾아오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하시고 겸손한 자를 좋아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기를 원한다고 말입니다.
겸손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죄’의 문제를 정당화함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하지요.

지난 주간에 오래된 곽선희 목사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곽 목사님의 고향은 이북이지요. 그래서 아마 실향민들과 많이 상담할 기회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분단이 10년 20년 지나면서 가족을 기다리다 지쳐가던 사람들 가운데 다시 결혼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다 목사님을 찾아온 분이 있었답니다.
“목사님, 전쟁이 끝나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제 아내가 북에 살아 있을까요? 다시 통일이 될까요? 기약 없이 기다리느니 그냥 결혼을 해도 될까요? 이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면 죄가 될까요? 안 될까요?”
이 물음에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분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이 무엇일까요? 목사에게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라는 선언을 듣고 싶지만, 그렇게 선언한다고 사실이 달라지나요?
결혼하려면 죄책감을 감당하고 하는 것이지 뭘 그렇게 구차하게 묻습니까?
“평안을 찾으려는 것이죠.”

우리는 종종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변명할 때가 많습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않는 것,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정당화해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기쁨과 평안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는 순간 우리는 이기적인 자아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너희가 계명을 지키리니”

정당성의 원리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아마도 이번 시리즈 말씀을 통해 가장 많이 등장한 성경 구절 중의 하나가 바로 누가복음 9장 23절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이 말씀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평안을 느낄 수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절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입니다.

우리에게 문제는 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하려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과 자기주장이 바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러야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최고의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연적인 인간의 본성으로 볼 때 멋있고 좋고 우아한 것들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으며 살아온 것 같지만, “평안”을 잃어버린 삶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사역과 사명을 넘어선 “평안”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일 중독에 빠졌던 그레이그 크로셀은 그의 책 [크리스천 무신론자]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되짚어보면 그렇게 해서 인정을 받고 싶었거나 무가치한 존재라는 느낌을 떨쳐버리려 했음이 틀림없다. 이처럼 건전하지 못한 욕구는 일을 제외한 삶의 여러 영역을 간과하게 하였다. 중독은 일종의 우상숭배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필요를 다른 데서 찾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님에게서 존재 의미를 찾는 대신 성과를 올리는 것으로 가치를 입증하려 들었다.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노력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여기에 제 모습도 역시 들어 있습니다. 제가 누리지 못하는 평안은 늘 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지 못하고 말입니다.
지난 부활절 예배를 드리면서 참 평안했습니다. 두 번 설교를 하고 나니까 저에게도 이렇게 주일이 평안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왜 이렇게 우리는 예배를 많이 드려야 할까? 물론 예배드리는 시간을 통해 누군가를 배려하려는 측면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 교회의 성도를 더 많이 수용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지 않을까요?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평안”을 생각하며 말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14장 26절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우리가 그 가르침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왜 그럴까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안함의 반대는 서두름이 아닐까? 조급한 사람은 평안함을 누릴 틈이 없습니다.

피터 언더우드가 쓴 [First Mover]라는 책에 나오는 한국인의 서두름입니다.
몇 년 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인 빨리빨리 베스트 10’을 뽑은 적이 있다. 이 결과를 살펴보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외국인의 눈에 얼마나 경이롭게 보이는지를 알 수 있다.
1.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가 나오고 있는데 손을 집어넣어 컵 잡고 기다리기
2.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가 출발하면 뒤따라 뛰어가면서 추격전 벌이기
3. 화장실 들어가기 전부터 지퍼 미리 내리기
4. 삼겹살이 다 익기도 전에 먹기
5. 엘리베이터에서 2초도 못 참고 ‘닫힘’ 버튼 누르기
6. 3분 기다려야 하는 컵라면 3분도 되기 전에 뚜껑 열기
7. 영화관에서 엔딩 자막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 나가기
8. 화장실에서 볼일 보면서 양치질하기
9. 웹 페이지가 3초 안에 안 열리면 닫아버리기
10.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구매한 뒤 먼저 마시고 계산하기.

우리는 참 기다리기 어려운 세상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도 뒤처지는 것 같고, 바보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늘 말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게으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죄이듯이, 서두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게 하는 “죄”입니다.
서두름은 늘 “지금”이라는 눈으로 늘 “자기중심적”이라는 생각으로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계획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 지금 내 삶이 만족스러운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44장 2절을 보세요.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사야 55장 8-9절 말씀,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으로 얼마나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다 알 수 없다면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 아닐까요?
평안을 잃어버리고 두려워하며 서두르는 이유, 그래서 내가 뭔가를 바꿔보려는 욕심과 사명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고 몸부림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죠.

말씀을 준비하다 아주 흥미로운 예화를 하나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탈리아에서 유럽 성악계에 새로운 태양처럼 떠오르는 한국 여성이 한 명 있습니다. 푸치니가 작곡한 나비부인의 주인공입니다.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한 극장에서 주연으로 발탁된다고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분이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수년 동안 성악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직 빛을 못 보는 것은 내 눈 때문이구나! 쌍꺼풀 수술을 해야겠다.' 하고는 남편을 겨우 설득시켜서 허락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제일 좋은 병원에 예약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쌍꺼풀 수술 세계적인 권위자는 다 한국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모 성형외과에 어머니가 예약을 했습니다. 보통 예약을 하면 1년 뒤에 할 수 있는데 어머니가 빽을 써서 날짜를 받았습니다. 그 여인이 수술 날짜가 결정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날 로마 한인교회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목사님 설교 내용이 "왜 주어진 것을 감사하지 않느냐 왜 여자들 쌍꺼풀 수술하느냐 쌍꺼풀 수술했다가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누구냐? 나는 너한테 쌍꺼풀 안 주었는데... 네가 누구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설교를 들으면서 '이것은 내 문제구나! 나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이구나!'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나 쌍꺼풀 수술 안 하겠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어머니가 화를 내면서 어렵게 받은 날짜니까 꼭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수술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수술하기로 결정되어 있던 그날에 열리는 콩쿠르에 참석했습니다. 그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 콩쿠르 현장에 독일의 유명한 극장의 극장장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비부인으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조연도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주연을 하려니까 얼마나 실수가 많겠습니까. 그래서 극장장에게 어느 날 물었습니다.
"나처럼 서툰 사람을 왜 처음부터 주연으로 뽑았습니까?"
그 극장장 대답이 네 눈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나비부인은 일본 여인이지만, 일본 여인들의 가창력은 한국 여자보다 떨어진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인정을 못 받는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여자는 전부 쌍꺼풀 수술을 했답니다. 그래서 일본 여자를 무대 위에 올려놓으면 유럽 관객이 볼 때 일본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 같은 가창력을 가진 사람으로 쌍꺼풀 없는 동양 여자를 처음 봤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그분은 무대 위에서 나비 부인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쌍꺼풀 때문에 생긴 인생의 불만, 그것을 만들지 않으신 이유를 발견할 때 찾아오는 평안함과 사명이 있죠. 왜 우리가 성형을 하죠? 사실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성형이 발전해야 하는 이유는 잘못된 것과 불편한 것을 고치려 함이지, 누군가에게 내가 만족을 주려고 한다면 참 불행하지 않을까요?
케이티 데이비드가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라는 책에서 쓴 글이 참 평안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곳에서 나는 선교사도, 구호 기관의 일원도 아닌 그냥 엄마다.”
“엄마.” 맞다. 그 아이는 내 아이였다. 엄마란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왜냐하면, 엄마는 영원하니까.
엄마란 이름은 정말 대단하다. “엄마”란 말은 ‘당신을 믿어요.’라는 뜻이다. “엄마”란 말은 ‘당신은 나를 보호해 줄 거예요.’라는 뜻이다. 엄마는 다급할 때 외치는 이름이고 기쁠 때 함께 웃어 주는 존재다. 엄마는 슬플 때 기대어 울 수 있는 존재이고 창피할 때 뒤에 숨을 수 있는 존재다. 엄마는 상처를 호호 불어 주고 아픈 마음을 달래 준다. 엄마의 품은 포근하고 안전하다. 엄마는 가족이다.

의심과 불안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기 어려울 때가 있죠?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고, 불의한 일이 아닌데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실 때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니 그분이 나의 아버지임이 확실할 때 우리에게 평안이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 가장 고난을 많이 당한 인물을 든다면 주저함 없이 욥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욥기를 지혜서라고 말합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귀로 들은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았던 욥의 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장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기 1장 21절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간다에서 고아들의 엄마로 사역을 감당하는 케이티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살려야 할 아이를 잃었을 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미숙아로 태어난 해피를 위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서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해피가 온전한 몸으로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니 마음이 평안하다. 은혜로우신 주님 감사합니다.
어제는 슬프고 괴로웠다. 해피가 주님 곁으로 가서 슬픈 건 아니었다. 해피가 세상을 떠나서 괴로운 게 아니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임을 잘 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해피는 생후 넉 달이 지났는데도 몸무게가 1.8킬로그램도 채 되질 않았다. 해피의 심장에는 9밀리미터 짜리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 줘야 하는 국립병원 의사들은 해피의 심각한 상태를 보고도 엄마에게 돈이 없는 걸 알자 그냥 돌려보냈다. 어떻게 해피의 천사 같은 얼굴을 보고도 그냥 돌려보낼 수 있었을까? 그 병원에는 심장의 구멍을 치료할 수 있는 심장외과 의사가 있었다. 얼마든지 해피를 고통스럽게 떠나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나라에도 해피를 도울 수 있는 의술이 있었다.

어제는 완전히 지쳤다. 몸보다는 마음이 지쳤다. 해피를 안 시간은 고작해야 72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지만, 그 72시간 동안 나는 성심을 다해 해피를 돌보고 엄마를 위로했다. 숨 쉴 힘도 없는 아기가 온 힘을 다해 내 손가락을 쥐는 바람에 나는 그만 해피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왜 변변히 돕지도 못할 사람들을 자꾸만 사랑하게 되는 걸까?

간밤에 침대에 쓰러져 성경을 읽는데 주님이 자꾸만 나를 예수님의 기적 속으로 이끌고 가셨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이 찾아왔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수많은 불치병 환자를 고치고 수천 명을 먹이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이 직접 말하고 있지 않지만 중요한 사실은, 나사로가 결국에는 죽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고쳐 주신 사람들도 살다가 또다시 병에 걸렸을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배불리 먹여 주셨던 사람들도 며칠 뒤에는 또다시 굶주렸을 것이다. 그래서 가시적으로 드러난 예수님의 권능보다도 그분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 예수님이 이 사람들을 위해 권능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을 먼저 깊이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고통으로 들어가 그들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사랑을 쏟으셨다.

세상 구원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 단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수님의 몫이다. 우리는 단지 마음을 다해 사랑하면 된다. 이웃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사랑을 쏟아 주면 된다.
어쩌면 괜히 내가 나서서 해피의 고통만 며칠 더 늘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해피를 사랑했다. 지금 그 아이는 내 마음속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마음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해피와 보낸 며칠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다. 언젠가 해피를 다시 만나 너 때문에 내 마음이 변했고 진정한 사랑을 배웠다고 말해 줄 수 있어서 기쁘다. 며칠 사이에 의사와 간호사, 친구와 낯선 사람들로부터 돕겠다는 이메일과 전화통화가 수없이 날아왔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지난밤과 오늘 아침, 나를 도와주던 미국의 의사 선생님들에게서 이메일이 몇 통 왔다. 해피의 사연을 알고 나서 우간다의 아픈 사람들을 도우려는 열정이 더 강해졌다는 내용이었다.
예쁜 해피야, 네가 기적으로 가는 길을 닦고 있단다. 너는 겨우 넉 달을 살면서도 많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고 귀한 교훈을 남겼단다. 귀여운 아가야, 우리가 모두 너를 사랑한다.

순종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나의 조바심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며 행하실 일을 기대할 수 있을 때,
나의 욕심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을 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찾아오는 “평안”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평안함 가운데 우리는 자유함을 얻습니다.
늘 동행하기 때문이고, 우리의 가장 평범한 일상이 거룩한 삶으로 변하게 됩니다.
평안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과 가르침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서울 예고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입니다. 사흘 동안 정말 제 눈에 거슬리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물론 억지로 예배를 드리는 학생에게 쉬운 시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사흘 동안 고의적으로 떠들고 무시하는 태도 속에서 설교를 하는 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첫날 집회를 마치고 다음날 새벽을 맞이하며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아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를 볼 때, 미운 마음보다는 안타까운 마음, 성령께서 일하시기를 바라는 기대가 생겼습니다.
제가 참 평안하게 설교를 했던 것 같습니다. 성령님께서 행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안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뜻을 꺾고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자에게 평안히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이 생깁니다.
주님을 최고봉으로 삼고 살아가는 당신에게 최고의 질문입니다.
당신은 평안하십니까?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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