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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담 자손의 계보 (창 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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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자손의 계보 (창 5:1-32)


지난 주중에 구역장 세미나를 가졌는데, 그 중 여자 구역장 세미나가 진행되던 목요일 저녁에 좀 특이한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역장 각자가 지금 추락하고 있는 비행기 안에 있다고 가정을 하고 가족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를 써 보게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가상적인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이제 자기 목숨이 몇 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여자 구역장들 중에 남편과 자녀들에게 '더 잘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나중에 천당에서 만나자.'라고들 하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울먹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하게 된다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지나간 인생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스쳐 흘러가면서 평생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온갖 감회가 생길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여자 구역장님들은 그 '충격적인 프로그램' 덕분에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돌이켜 볼 수 있는 의미 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단 여자 구역장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그야말로 딱 한 번밖에 없는 기회입니다. 
즉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절대로 잘못 되어서는 안 될, 실로 소중하기 짝이 없는 인생인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나 창세 때의 초기 인류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에게는 목숨이라는 것이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죽기 직전에도 그 어떤 후회할 것이 남지 않을 수 있는 바른 인생, 행복한 인생, 성공의 인생을 살게 해 주는 요건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본문에 나타나는 '아담 자손'의 인생을 통하여 그 대답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어떤 가문에서 났느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유업을 이어간다.'는 사실이 기독신자 인생의 근본입니다. 

1절부터 5절에 기록하기를 "1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5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고 했습니다. 

아담은 우리가 다 잘 아는 가인과 아벨,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셋을 낳았지만 그 외에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자식들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아들들은 아담의 딸들 즉 자기의 자매들이 없었더라면 결혼할 상대가 없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비록 성경에 아담의 딸들의 이름이 한 명도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에게 딸들이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열성유전의 위험성 때문에 근친결혼을 금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유전형질이 아직 순수했기 때문에 형제자매가 결혼한다 해도 아무 문제는 없었습니다. 

또한 아담은 "셋을 낳은 후"에도 팔백 년을 더 살면서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했으니 분명히 아주 많은 아마 최소한 수십 명, 어쩌면 수백 명까지 될 아들딸들을 낳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창세기 5장의 족보에는 오직 "셋" 한 사람만 언급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6절 이하에 계속 이어지는 족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백 몇 십 세가 되어서 누구를 낳았다고 되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육십 몇 세에 누구를 낳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족보에 실린 사람들이 반드시 장자만은 아니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많은 형제들 중에서 유독 한 사람씩만 이 족보에 이름을 올리게 된 조건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담'에서부터 시작해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계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족보는 곧 '셋'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신앙'을 지키고 이어간 가문의 계보인 것입니다. 

아담의 아들들만 해도 그처럼 신앙의 자손이 된 "셋"과 불신앙의 자손으로 떨어져 나간 "가인"이 갈라졌습니다. 
꼭 마찬가지로 셋의 자손들 중에서도 또 곁길로 나간 자손들이 수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처럼 갈라지고 또 갈라지면서도 노아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바로 지킨 계보가 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에서 출발하여 셋을 거쳐서 노아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지킨 집안보다는 불신앙으로 흘러간 집안들이 훨씬 더 많았던 것이고, 그 결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노아 시대에 가서는 온 세상이 죄악으로 관영하고 오직 노아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신자들이 이런 신앙의 족보를 이어간다는 것은 그 얼마나 소중한 일이겠습니까?
장자로 태어났느냐, 아니면 막내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은 이 세상 사회에서는 상당히 따지는 문제이지만 우리 신앙세계에서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아들로 태어났느냐, 딸로 태어났느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결혼을 하고 나면 아내는 원래의 자기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라가게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가 호주가 될 수 없는 법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물론 이런 것들 역시 영적으로 볼 때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오로지 누가 신앙의 대를 물려주는 부모가 되며 누가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는 자녀가 되느냐 하는 이것 하나뿐인 것입니다. 

크게 도표를 그려보면 바른 신앙이 몇 대, 몇 십 대를 잘 이어진 집안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집안은 여러 자식들 중에 겨우 한 자식의 집안으로만 간신이 이어진 경우도 있을 것이고, 어떤 집안은 본인에게서 딱 끝나고 바로 그 다음 대에서 완전히 신앙의 대가 끊긴 집안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6.25 전쟁 당시 순교자였고 아버지가 현직 목사라 할지라도 그 아들은 오히려 종북좌파가 되고 교회를 비난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즉 영적 계보에 있어서는 오직 그 본인이 과연 신앙의 유업을 제대로 이어 받았느냐, 그렇지 못했느냐만 문제가 될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자기 자녀들만 확실히 신앙을 지키게 해도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다 새로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는 집안까지 점점 더 더해지면, 간단한 수학적 계산으로 보더라도 기독교는 지금쯤 절대 다수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바로 그런 신앙의 대물림에서 실패한 집안이 무수히 많다는 뜻이며, 그것이야말로 가문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김씨, 박씨, 이씨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진짜 문제는 우리 가족을 통하여 바른 신앙이 유업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것입니다. 
만약 내 부모가 아직도 불신자이면 만사 제쳐놓고 부모님부터 구원의 확신을 얻도록 전도해야 하며, 다른 사람 전도는 못할지언정 우선 자기 자녀와 손자들만이라도 분명한 신앙의 후손이 되도록 가르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을 통해 얻게 된 최고의 소중한 유업,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본인만 잘 지킬 뿐 아니라 온 가족과 후손들에게도 틀림없이 전수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얼마나 장수했느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다.'는 사실이 기독신자 인생의 축복입니다. 

21절부터 27절에 "21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므두셀라는 일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창세기 5장의 족보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은 바로 '장수'입니다. 
본문에 계속 반복되는 '수백 년'의 햇수가 그 본인의 나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가문이 존속된 기간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억지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시대에는 분명히 사람이 장수할 수 있는 환경과 또한 이유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언급했던 대로 당시에는 우선 유전 형질이 순수했으며 질병도 적었을 것입니다. 
또한 노아 시대의 대홍수 심판이 있기 전의 지구는 '온난다습'이라는 완벽한 생태적 환경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땅에 충만케" 하시기 위하여 그 시대에는 특별히 장수하게 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유독 에녹의 수명은 "삼백육십오 세"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수명은 주로 팔백 년대 내지는 구백 년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장에서 에녹 다음으로 수명이 짧았던 사람이라 해봐야 노아의 아버지 라멕인데 그도 "칠백칠십칠 세"를 향수했습니다. 
직계 가족들과만 비교해 보아도 에녹의 아버지 야렛은 "구백육십이 세"를 향수했고, 에녹의 아들인 므두셀라는 성경에 기록된 최장수 나이로서 "구백육십구 세"나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에녹은 자기 아버지나 자기 아들에 비해서는 겨우 삼분지 일 정도밖에 못 살고 조사(早死)한 사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유명한 에녹이 사실상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단명(短命)의 인생이었으며, 속된 말로는 그야말로 '비명횡사'한 사람 축에 들어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에녹은 결코 불행한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양적으로는 비교적 짧은 인생이었지만 질적으로는 최고로 행복한 인생을 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는 생이었습니다. 

더욱이 에녹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에녹이 마치 모세의 경우처럼 사람들이 시체를 가져다가 장례식을 치르는 '일반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34장 5절과 6절에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장사되었고"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는 말은 '그가 장사하셨고'라고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직접 장사했다면 그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를 리가 없으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의 시체를 장사하셨다는 의미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에녹이 육체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고 바로 천당으로 올라가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뒷받침하고 있는 대로입니다. 

그 어느 쪽이든지 간에 에녹이라는 인생의 종말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써 세상에 있지 아니하게 된' 사실만큼은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소위 '재수가 없어서 일찍 죽은' 불행한 사람의 죽음처럼 들립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며 인생을 산 사람은 죽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데려 가십니다. 
살아 있을 때에도 하나님과 교제하고 세상을 떠날 때에도 하나님께서 데려가 주시는 인생이라면 실로 완전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벽한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세상에서 살 동안에는 그 사회의 어떤 계층에 속해서 사는가 하는 것이 그 인생의 질을 결정합니다. 
상류사회에서 고위층 인사들과 교제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뒷골목 세계에서 조폭들과 관계하면서 평생을 살다가 죽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전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인생은 그야말로 최상류 사회에 속한 최고 수준의 인생이 되지 않겠습니까?
피조물이면서도 창조주와 사귈 줄 알고,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그 하늘 아버지와 한 가족처럼 가까이 지내며 사는 것보다 더 질적으로 우수하고 더 행복한 인생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장수하는 것보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즉 비참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는 행복하게 단명하는 편이 백번 더 나은 것입니다. 
더욱이 그 죽음이 내세의 부활로 이어질 때는 특히 더 그러합니다. 
바로 그 인생의 질, 그것도 금세뿐 아니라 내세에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질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되고 마는 것입니다. 
영적 식물인간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숨만 쉬면서 오래 사는 인생이 아니라, 창조주를 알고 구원주를 따르는 이 차원 높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진정 행복한 인생을 평생토록, 그리고 영원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어떻게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망을 붙잡고 산다.'는 사실이 기독신자 인생의 최고절정입니다. 

28절 이하 32절에 "28라멕은 일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32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라멕"이 아들을 낳은 후에 그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는데 그것은 '안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뜻의 이름을 지은 이유를 가리켜 본문은 라멕이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직후에 "땅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하셨습니다. 
라멕은 지금 바로 그 사실을 상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땅을 그처럼 저주하셨기 때문에 자신 역시 '수고로이 일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는데, 혹시 지금 자기가 낳은 아들이 그처럼 고생으로 점철된 인생으로부터 '안위'를 줄 사람이 아닐까 하고 기대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라멕이 바로 '메시아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그처럼 땅을 저주하시고 인생을 땀의 수고 가운데 살게 하셨을 때 그와 동시에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 역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처럼 아담 때부터 시작하여 셋의 자손에게 이어졌을 것이 틀림없는 그 '메시아의 도래'를 이 라멕 역시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아가 태어났을 때 어쩌면 그 자기 아들이 '수고와 고통'의 저주로부터 자신과 모든 사람들을 '안위'해 줄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그런 이름을 지었던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아들'이란 말은 '자손'이라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이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족보가 모두 다 직계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족보를 근거로 인류의 역사를 정확하게 계산한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며, 또한 이 족보는 그런 정보를 제공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아담 자손의 계보"가 기록된 진짜 목적은 나중에 마태복음 1장이나 누가복음 3장에 기록된 족보에 이어지고 있는 대로, 바로 첫 사람 아담에게 주셨던 메시아의 약속이 결국에 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루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탄생 이후의 족보는 성경 아무 데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이상 전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자자손손이 결국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짐을 확인하는 여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족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며, 예수님의 초림으로써 그 족보는 완벽하게 종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까지 바로 그 '메시아 소망'은 선민과 택자들을 통하여 연연히 이어졌으며 라멕 역시 바로 그런 신앙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기대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가 되기는 했지만 결코 메시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셋의 자손들이 이 라멕처럼 대대로 메시아 소망, 즉 하나님께서 그들의 첫 조상 아담에게 주셨던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소망을 품고 살았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말 안 듣는 자식을 두고 '호적에서 빼버린다.'라고 위협할 때가 있습니다. 
그게 법적으로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식으로서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망 없는 사람은, 이미 생명의 호적에서 빠진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적 족보로 연결이 되어 있어야만 우리는 이 수고롭고 괴로운 죄와 사망의 인생을 살면서도 진정한 구원의 소망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 인류 역사나 개인의 인생사는 본질적으로 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이 어렵고 힘들고 때로는 극히 고통스럽기까지 해도 사실상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특별히 재수가 나빠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하여 타락하게 된 결과로서 그저 당연지사일 뿐인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요건은 자신의 인생이 바로 그 본질적인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단 한 길,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된 메시아로 믿고 영접하느냐 아니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입니다. 
첫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전 인류에게 영향을 끼치는 최악의 실패를 저질렀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즉시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그 완전타락의 상태조차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으니, 실로 이 소망만 확실히 지키면 극복해 내지 못할 인생 문제라는 것은 단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수고로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게 된 사람이지만 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소망함으로써 그 모든 저주로부터 완전히 자유함을 얻고 금세의 '안위'와 내세의 '안식'까지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아담의 후손은 바로 제2세대에서부터 둘로 쫙 갈라졌습니다. 
셋과 그의 아들 에노스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을 지켰고, 그들의 후손은 금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내세에서 영생하는 축복을 받았으며, 그 어떤 인생의 고난 중에도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끝까지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반면에 가인은 믿음이 없는 헛된 예배를 드렸고 첫 살인을 저질렀으며, 그의 후손들은 오로지 세속 문화만을 발전시켰을 뿐 하나님의 구속사와는 전혀 동떨어진 인본주의의 인생을 살았을 뿐이었습니다. 
똑같은 생명을 받아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인생을 사는 방식은 이처럼 창세기 때부터 극과 극으로 나뉘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어느 쪽이 바른 인생, 행복한 인생, 성공의 인생이겠습니까?
자신의 창조주조차 알지 못하면서 끝까지 자기 혼자만 잘난 줄 아는 유아독존적인 인생, 죄인을 불러 당신의 자녀로 격상시켜 주시는 이 놀라운 특권적 교제를 누릴 줄 모르고 오로지 악인들과 어울리고 오만한 자들과 함께 앉는 인생, 구원주로 찾아와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하루하루를 근심과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만 살다가 죽고 나서도 영원한 저주에 떨어지고 말 인생이란 제아무리 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산다 해도 실상은 '완전히 망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딱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살아서는 결코 안 될 일입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할 줄 아는 신앙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근본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든지 간에 그 생명의 나날을 주님과 동행하고 그 허락된 연수가 끝날 때에 주님께서 당신의 품으로 데려가 주시는 삶이야말로 완벽하게 행복한 인생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이 닥치더라도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면서 살 수 있는 인생은 그야말로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이르는 '셋의 계보'를 통하여 이어진 이 신앙의 삶, 축복의 삶, 소망의 삶을 바로 그 하나님의 구속사를 계승해 가고 있는 이 경향교회를 중심으로 자신의 전 인생을 통하여 평생토록 누리며 또한 각자의 가정을 통하여 대대로 전수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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