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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립의 변화 (요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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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의 변화 (요 1:43-51) 
 
설교의 대가로 유명한 스펄젼 목사님이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신학생들에게 ‘여러분, 여러분이 천국에 대해 설교할 때에는 밝고 기쁨이 넘치는 얼굴 표정으로 설교를 해야 합니다.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람의 기쁨을 성도들이 여러분의 얼굴을 통해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학생들 중에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목사님, 천국에 대해 설교할 때는 말씀하신 대로 하면 되는데 지옥에 대해서 설교할 때는 어떤 표정으로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님은 ‘그거 아주 간단하네. 자네가 평상시에 하고 있는 그 얼굴 표정 그대로 하면  된다네’

처음부터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모습으로 변하느냐는 것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 괴팍하고 고약한 모습으로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밝고 긍정적인 면으로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그들은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때의 모습을 보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 하면서 긍정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커지는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12 제자 가운데 빌립이라는 제자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벳새다 지역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먼저 제자로 부름을 받은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가 이 지역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만나 그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향해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빌립은 자신의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며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따르는 제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형인 베드로를 전도해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요한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형인 야고보를 전도해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립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친한 친구인 나다나엘을 데리고 왔습니다. 전도는 은혜를 받는 사람을 통해 이어집니다. 그리고 전도는 가장 가까운 관계를 중심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전도를 이야기할 때 관계 전도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의 특성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헬라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유대식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빌립만이 유대식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헬라식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가 헬라식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은 아마 그의 아버지의 영향력이 컸을 것인데 그의 아버지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 문화보다는 헬라 문화를 더 동경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빌립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만나 제자로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따르라’는 단어는 ‘아콜루데이’인데 이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잠시도 지체하지 말고 지금 따르라는 말입니다. 결단을 촉구하는 명령입니다. 새로운 변화를 쫓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굳건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따르기는 따르는데 나로 하여금 먼저 정리할 일들을 정리하고 따를 수 있게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대답하는데 공통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먼저’라는 단어입니다. 지금은 내가 할 일이 있고 그 일은 한 후에 기회를 봐서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 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예수님을 만나 그 분이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빌립의 믿음의 장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제자로 부르신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이 삶의 우선순위에 있어서 몇 번째입니까? 하나님은 사무엘상 2장 30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따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삶이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빌립의 단점을 보여주는 곳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 왔습니다. 저녁이 되어도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하면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반응할 것인지를 이미 아시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빌립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단점을 보완하고 훈련시키기 원하셨습니다.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는 말씀은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훈련시키고자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빌립은 새로운 변화와 환경에 도전하고 수용하는 결단력이 뛰어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계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먹을 것을 줄 수 있을까?’라고 물으셨을 때 빌립은 신앙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성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빌립은 매우 계산이 빠르고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을까?’를 물으셨을 때 빌립은 한 눈에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를 대략 파악했습니다. 장정만 오천 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여인들과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만 명이 넘고 많게는 만 오천 명 정도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요기할 수 있을 정도라도 먹을 것을 주려면 적어도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있어야 했습니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말하면 수 천 만원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빌립은 순식간에 계산을 끝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께 그 만큼의 돈도 없고 돈이 있다고 해도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을 구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특히 빌립은 벳새다 출신입니다. 자신의 고향의 경제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상황을 점검하고 계산해 볼 때 예수님께서 제안하신 일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이 상황을 분석하고 계산할 때 한 가지 조건을 빼놓고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상황 분석과 계산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그의 계산 방법에 넣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상황 분석과 판단 그리고 이성적인 계산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계산에 넣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어떤 신앙의 도전과 변화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따랐지만 그 따름이 자신의 판단과 계산에만 머무는 것이라면 진정한 따름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는 ‘너의 인간적인 지식과 생각을 가지고 분석과 판단, 그리고 계산하는 것을 멈추고 그 속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계산에 넣으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주어진 상황 분석과 계산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이 역사하시는 힘을 계산에 넣는 것입니다.   

집사님 한 분이 저를 보고 ‘목사님,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축복을 다 받은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예, 그렇게 보이십니까? 감사하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날 밤에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축복을 다 받으신 것 같아요’라는 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저만큼 한심한 사람이 없고, 저처럼 무책임한 가장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50대 중반의 나이인데 경제적으로는 마이너스 통장을 쓰고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빚을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의 두 아들이 자라서 결혼을 한다고 하면 무엇 하나 해 줄 수 없는 환경입니다. 가정에 큰 일이 하나라도 생기면 그것을 경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50대 중반의 가장이면 전세 보증금 몇 백 만원, 아니면 몇 천 만원이라도 가지고 있을 텐데 저는 도리어 빚을 지고 있는 무능한 가장입니다. 이것저것을 따져보면 저처럼 한심한 가장이 없습니다. 저처럼 미래가 불안한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에 건강이 무너져 목회의 자리에 설 수 없다면 그 순간이 저의 가정이 무너지는 순간일 것입니다. 

이렇게 무능력한 저를 향해 성도님들과 동료 목회자들은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러나 맞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비록 재물은 없고 미래를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불안하고 힘든 것이 있지만 저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식이나 위선이 아니라 진심으로 제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제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씀에 따라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자체가 그렇게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세상의 유혹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다는 자체가 그렇게 감사합니다. 제 삶의 미래를 계획하고 계산할 때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계산법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넣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제 계산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최고의 방법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늘 문제가 되는 것은 돈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돈을 하나님 보다 우선으로 하면 그 신앙에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돈에는 항상 계산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분석과 손익분기점을 따집니다. 돈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빌립의 계산법을 변하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계산에 넣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만드시는 결과는 놀라운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빌립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계산법에 넣는 것을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 되심을 믿으십니까? 그 분이 열어 주실 때 진정한 복이 가득 채워진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진정으로 복의 주인 되심을 믿을진대 그 분의 역사하심을 우리의 계산법속에서 가장 소중한 요소로 고백하며 적용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믿고 고백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하며 살아가는 삶 자체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과 계산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계산속에 포함시켜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진정한 행복을 만들어 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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