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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좁은 문, 협착한 길 (마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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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협착한 길 (마 7:13-14)

<고식지계(姑息之計)> 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임시변통으로 당장에 편한 것만 취하는 꾀” 를 일러서 하는 말입니다. 약아빠진 현대인들의 당장 눈앞의 일, 코앞의 일에만 아름아름하는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대인에게는 몇 가지의 병든 철학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편리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안일주의라고도 하는데 편하게만 살려고 하는 삶의 자세가 마치 철학처럼 굳어져서 인간과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누군들 편리하게 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문명의 이기라는 것은 대체로 우리를 편리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잘 이용하면 유용하게 삶에 보탬이 됩니다. 옛날에는 며칠씩 걸려서 가던 곳을 요새는 단 몇 분이면 갈 수 있습니다. 문명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서 얻어지는 정서는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옛날에는 안부가 궁금하여 편지라도 한 통 쓸라치면 2-3일은 족히 걸려야 도착하던 것이 요즈음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 한통이면 그의 안부를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명절 때가 되면 어머님이 일하시는 부엌에 몇 번씩 들락거리곤 했습니다. 집집마다 며칠 동안 굴뚝에 연기가 사라지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기다려서야 맛있는 조청도 먹고, 감주도 먹고, 보리개떡도 먹고 했습니다. 오래오래 정성스럽게 만든 어머니의 손맛이 일품이었던 것이 지금은 밥, 국, 라면, 심지어는 김치... 어느 것 하나라도 길게는 3분이면 오케이 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그 잠깐의 시간마저 기다릴 수가 없어서 더 빨리 빨리 되는 게 없을까를 늘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시대를 <퀵 서비스의 시대> 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편으로 사람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빠르고 편리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편리주의나 안일주의에 빠지게 되면 거기서 병이 듭니다. 그 속에 소중한 정성, 사랑, 그리고 고귀한 인간미는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현대인을 병들게 하는 두 번째 철학이 뭐냐 하면 상대주의입니다. 요즘 정치, 사회, 경제, 교육을 막론하고 모든 면에서 들려지는 하나의 좌우명이 있습니다. 변화하는 것만 생존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변하지 않는 것은 죽는다는 말이 됩니다. 남은 변하는데 나는 그대로라면 나는 이미 죽은 것이라는 생각입니다마는 자기 발전을 위한 측면에서는 상당히 일리가 있는 철학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 굉장한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변합니다. 변화해야만 살아남는다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고, 궁극도 없이 변화하는 것은 안 됩니다. 목적이 상실 되고 방향이 실종된 변화, 이것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 저가 변하므로 나도 변해야한다는 막연한 상대주의는 얼마나 위험한 것입니까? 저가 도적질한다고 나도 도적질할 것입니까? 그 사람이 사기를 친다고 나도 사기 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나친 상대주의가 철학이 되어서 절대적 진리도 없고 기준도 없고 중심도 잃어버린 그런 세상에서 현대인이 병들고 있는 것이고요, 

세 번째는 실리주의가 현대인들을 병들게 합니다. 모든 일의 결국은 실리, 즉 결과만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방법과 과정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적과 의미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중요한 건 그 결과가 무엇이냐 뿐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 말이 옛날에는 우직하고 성실하며 줏대가 있다는 말로 들렸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약삭빠르고, 거짓투성이고, 자기중심적인 처세의 방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게 정말 어리석은 말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수시로 들려오는 수능시험부정사건이니, 부정 입학이니 대리시험에 조직적 부정행위까지 사회적 이슈가 있었습니다. 이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는 식의 발상입니다. 가당한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공부에 지름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생에 요행 길은 없는 겁니다. 공부는 자기가 해야 되는 겁니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자기가 해야만 되는 것이 공부입니다. 

목사가 되려면 몇 년을 공부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10년을 공부해야 목사가 되는 겁니다. 하루아침에 목사가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죽이는 일을 하는데 하루아침에 될 수 있겠습니까? 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아침에 의사가 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최소 10년 이상은 공부해야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일이지요. 사람의 육체적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일인데 그처럼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오랜 시간이 흘러가면서 깨닫고 수련하고, 훈련받으면서 그 많은 시련 속에서 얻어지는 능력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부를 마치고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빨리 되는 일이란 대부분이 잘못 된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어쩌면 빨리 될 수 있는 일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한 인격이 만들어 지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입니까? 오랜 시간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많은 훈련도 함께 필요합니다. 그런데 거저 되겠다는 데 문젭니다. 이 시대의 또 한 가지 단면이 <오토매틱시대> 입니다.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되기만 바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다림도, 노력도 없이 자동적으로 되기를 원하는 생각이 인격을 모조품으로 만들어가고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병이 신앙에까지 침투해 왔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좀 더 편리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찾아다니게 되고, 교회 안에서도 빨리 무언가가 되기를 원하고,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을 통해서 내가 얻을 실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불신앙적인 요소들이 교회에, 신앙생활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이 시대 우리 믿는 자들 속에 숨어있는 영적인 문제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하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는 말씀이 우리들에게 신앙적 결단을 재정비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왜 하필이면 좁은 문입니까? 예수 잘 믿던 사람들도 이 말씀에 오면 불평합니다. 이 말씀은 좀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고 피해 갔으면 합니다. 

마16:24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생명도, 자기명예도, 심지어 자기목숨까지도 미워하고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때 제자들이 받은 심적 충격은 어떠했을까요? 그런데 오늘 말씀도 역시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의 충격은 어떻습니까? 이 말씀이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때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기적을 바랐고, 복을 바랐고, 형통을 바랐고, 출세를 바라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매일 매일 이어지는 예수님의 교훈을 들어보니까 자기들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 하는 말씀들을 들으면서 점점 그 마음에 깨달음이 오는데 ‘아 이거 아무래도 생각보다 어렵겠는데 과연 몇 사람이나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13장에 보게 되면 제자들과 함께 그 말씀을 듣던 군중 중에 한 사람이 같은 깨달음 가운데 궁금하여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주여, 구원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10%다 20%다 직접적인 답을 하시지 않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한다고 궁극적인 문제를 말씀하시는데 눅13:24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여기서 “힘쓰라” 는 말은 “전력을 기울여 싸우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훈련을 해서 마침내 얻어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 말씀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를 따르겠노라 결심했다면, 영생을 얻겠노라 맹세했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서서 좁은 길로 가야만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좁은 문은 결단입니다. 그리고 좁은 길은 신앙의 훈련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안일하고 편리하게 상대적으로 남과 비교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고독한 나만의 길입니다. 아주 좁습니다. 내게 있는 다른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다 가지고 들어 갈 수 있는 문이 아니요, 많은 짐을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생명만 생각하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은 같은 것입니다. 문은 좁으나 길이 넓다든지, 길은 좁으나 문은 넓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끝까지 좁은 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왔으면서 길은 넓기를 원한다면 잘못 된 것입니다. 

주님 따르겠노라고 교회에 나왔으면 무슨 넓은 것이 허용되길 원하지 말아야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접을 받아야 되겠고, 세상에서와 똑같은 높임을 받아야 되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회사에서 대접받으면 됩니다. 세상에서 높임 받는 것으로 만족하면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온 이상은 마지막까지 협착한 길로 걸어갈 것을 다짐하고 가야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할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협착한 길을 잘 지나서 생명으로 가게 되는 길이 있고, 큰문으로 들어가서 넓은 길을 지나 멸망으로 가게 되는 두 가지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고민하거나 갈등 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길이 곧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오늘도 그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에게 큰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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