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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마 12: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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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마 12:34-37)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은 자유일 것입니다. 행동의 자유, 생각의 자유, 언어의 자유들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러한 자유를 동물과 다르게 누려야하는 데에는 인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에게는 없는 인격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누리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인간은 자신이 누리는 자유만큼의 인격을 가졌고, 가진 인격만큼 자유를 누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행동의 자유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에 교회에 나올 수도 있었고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왔습니다. 왜 나왔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자유로운 가운데서 선택하여 이 자리에 나와 있는 이것이 여러분의 인격입니다. 예배 도중에 나가버려도 붙잡지 못합니다.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인격입니다. 

설교시간에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뒤로 젖혀 앉아서 설교 끝날 때까지 그러고 있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그게 내 인격이요,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내 인격의 모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생각의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 내 느낌은 내 맘대로 입니다. 누구에게도 침해 받지 않습니다. 생각으로야 무슨 일을 못합니까? 대통령도 될 수 있습니다. 생각으로 하루 저녁에도 빌딩을 수채나 지었다 부쉈다 한다잖아요. 뿐만 아니라 미워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밤새도록 그리워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느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무방비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무엇이냐가 곧 그의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언어의 자유는 어떻습니까? 말을 하고 안 하고는 전적으로 본인의 자유입니다. 예배 시간에 찬송을 부르지 않는 것도 자유고 기도 시간에 아멘하지 않는 것도 자유입니다. 누가 잡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예배의 인격입니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언어의 자유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말을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언어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대로 내 인격이 되고 만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행동의 자유이든, 생각의 자유이든, 언어의 자유이든 간에 남용해서 함부로 행동하고, 아무생각이나 마구잡이로 하고,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 내는데 사용한다면 분명히 잘못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언행심사(言行心事)에는 자유가 있으되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행위에는 늘 책임이 따르기에 행동을 잘못하면 감옥에 가는 것입니다. 생각도 그렇지요. 생각의 자유, 상상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있다고 아무생각이나 다 괜찮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생각도 골라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이 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7절입니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적어도 인격자라면 말에 대한 책임만큼은 분명히 질 수 있어야합니다. 이미 뱉은 말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곧 책임입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잘못한 말이 많습니다. 취소하고 싶은 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한 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책임입니다. 그래서 말은 신중하고 진실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언어의 기능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는 정보교환의 기능이 있다고 합니다. “잘 있냐? 잘 있다.” 소식을 주고받고 “언제부터 백화점 세일 하더라.”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둘째는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기능입니다. “기분이 나쁘다.”, “우울하고 슬프다.”, “당신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다.” 는 등을 표현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셋째는 지시적인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함으로 그 사람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함부로 해버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곧바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의 뜻을 움직여 바꾸어 놓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이란 내 말이거나 남의 말이거나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남의 말을 좋게 하는 것이 덕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위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상을 이야기하고, 평범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건을 이야기하고, 편협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 이야기하기를 좋아 한다.” 생각할수록 의미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만나서 하는 이야기 중에 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기가 쉽습니다. 책임 있는 혀가 되어야합니다. 생각 없이 내 뱉는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감정에 씻을 수없는 상처를 남기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있어서는 평생 마음에 한을 남기게 되는 그런 말들도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하나 생각해 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반란을 당해서 시골로 정신없이 피신을 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황당한 마음으로 쫓겨 갔던지 머리를 풀고, 울면서,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유랑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 일행을 뒤쫓아 오면서 온갖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저주를 퍼붓습니다(삼하16:5). 

그때 다윗이 당한 수모와 창피가 어떠했겠습니까? 그걸 보고 옆에 있던 신하가 말합니다. “저 놈의 목을 칠까요.” 그때 다윗이 말합니다. “가만 둬라,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겠지.” 하면서 그 순간을 잘 넘겼지만 두고두고 그 말이 가슴에서 한(恨)이 되어 기억에 남습니다. 나중에 반란이 진압이 되고 다윗이 다시 궁궐로 돌아옵니다. 그때 그 시므이라는 자가 가장 먼저 나타나서 다윗에게 용서를 빕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일 먼저 영접 나왔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삼하19:19) 얼마나 그가 미웠겠습니까? 그때 곁에 있던 신하들이 말합니다. “저 놈의 목을 칠까요?” 다윗은 그때도 “가만 둬라” 합니다. 그리고 그 시므이에게 약속합니다.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보면 다윗은 대장부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이 언제까지 갑니까? 그 한(恨)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윗이 임종이 가까웠을 때 신변정리를 하면서 아들 솔로몬을 불러 말합니다. “시므이가 나를 악독한 말로 저주했다. 그 놈은 죄인이다. 죽이라.” (왕상2:8). 

결국 솔로몬은 다윗이 죽은 후에 시므이를 처형합니다. 보세요. 천하대장부 다윗도 그 저주하는 말 한마디를 소화해내지 못하고 마음에 품고 있다가 결국에 가서는 원수를 갚고 맙니다. 말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말에 대해 교훈하면서 “거짓말은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진실을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 있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의 지혜가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누구나 어릴 때부터 수백 번은 들어서 압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허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곧 말에는 지혜가 있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부인이 대단한 미인이며,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라고 가르친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어디서 지지리도 못난 여자를 골라서 좋다고 쯧쯧쯧...”하거나 “눈이 삐어도 한참 삐었다.” 는 등으로 비아냥거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원래 결혼은 눈이 삐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여간 유대인들은 이렇게 선의의 거짓말을 용납하고 있습니다. 

거짓말보다 못한 진실이 있다는 말을 아십니까? 유대인들은 사람을 해치는 진실은 말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봐도 못생긴 여성 앞에서 진실을 말한다고 “당신 정말 억울하게 생겼소.” 해서 되겠습니까? 누가 얘기를 안고 왔는데 사실 좀 못생겼습니다. 그렇다고 “어쩌면 아이가 괴물 같이 생겼어요.”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아기는 무조건 예쁩니다. 이런 것을 거짓말보다 못한 진실이라고 하는 겁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 역시 말에 대해서 신중할 것을 일렀습니다. <일언전십사(一言前十思)>라 하여 “한 마디의 말을 하기 전에 열 번 생각하라.” 고 충고하였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생각입니다.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마음먹은 것,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것을 모두 종합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전부가 하나의 인격으로 뭉쳐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말은 악한 데서 나오는 것이요, 그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악한 말을 하는 것이라 합니다.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내뱉는 악한 말을 단순한 한 사건으로, 실수로 보시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십시오. 악한 말이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지능적이고 고차원적이요, 습관적이고 체질적으로 축적된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란 우연히 하는 말이나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란 게 없습니다. 쌓여있던 생각과 체질화된 마음이 나도 모르는 순간에 제어되지 못하여 표현된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말할 것입니까? 신앙인으로서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인격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곧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말은 내 삶의 모습입니다. 말은 인격의 열매입니다. 말은 그리스도인 된 표현입니다. <논어> 에 있는 말을 소개해드립니다. “함께 말할 만한 사람인데도 그와 함께 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잃는 것이요, 함께 말할 수 없는 사람인데 그와 함께 말하는 것은 말을 잃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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