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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1:2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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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1:27-12:9)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에 끝까지 고치기 어려웠던 것이 바로 식생활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밥과 김치를 먹지 않으면 식사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도저히 들지 않는 저는 학교에 갈 때에도 거의 매일 김치볶음과 밥을 도시락으로 싸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니 작은 식당 안에서 같이 점심을 먹던 미국 신학생들은 제 도시락에서 나는 특이한 냄새 때문에 아마 꽤 곤욕을 치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 역시 속으로 미안하고 좀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이제 우리나라로 돌아온 이후에는 어떤 '미국식 티'가 드러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또한 저 딴에는 조심하고 있습니다. 
20년이나 거기에 살다 보니 자연히 미국의 문화나 생활습관에 웬만큼 익숙하게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것들 중에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부자연스럽거나 거부감이 생길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주변사회의 생활 습관이나 양식에 맞추어 살아야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야 주위 사람의 눈총도 피할 수 있고 살기도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국식으로 살려고 하면 아무래도 지탄을 받기 마련이고, 반면에 미국에 살면서 한국식으로 살기를 고집한다면 여러 가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변사회의 생활양식을 따르기를 철저히 거부하고 포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살던 사회의 대다수, 아니 전체가 따르고 있던 생활양식과는 아주 다른, 정말 유별난 생활원리를 자기 혼자만 따라서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인류 역사상 돋보이는 찬란한 문명이 본격적으로 발달할 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압도적인 문명의 주류와는 아주 대조적인 독특한 삶이 바로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속적 문화'와는 색깔과 질이 근본적으로 다른, 완전히 새로운 '영적 생활양식'이었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예나 지금이나 수적으로 압도적인 불신 사조를 대항하여 오직 소수의 선민들만이 따르고 있는 참된 신앙인의 생활 원리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절대다수의 범신론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지키는 생활입니다. 

11장 27절부터 32절에 "27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29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30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32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본문에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부터 시작하여 그 집안 가계가 기록되어 있는데, 26절에 보면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란"은 아브라함의 형제 중에서 일찍 죽은 사람의 이름이기도 했고, 또 데라 가족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이사를 갔던 곳의 지명이기도 했습니다. 
데라는 약 130세 전후에 성경에서 '밧단아람'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아브람"을 낳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사도행전 7장에서 밝히는 대로 아브라함은 나중에 데라가 하란에서 죽은 후에 그 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 아브라함은 대부분의 유년과 청년 시절 그리고 결혼 후 상당 기간까지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갈대아 우르'란 오늘의 이라크 즉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하구 지역에 해당되는데, 당시 아주 큰 문명이 발전되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고대 무역 활동이 활발했으며, 큰 도서관의 유적까지 발견되고 있는 곳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당시 사회에서 오늘의 뉴욕과 같은 세계적인 대도시에서 첨단문화를 접하면서 성장했던 것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와 가나안을 잇는 가장 가까운 경로에는 아라비아 사막이 있었기 때문에 통행할 수가 없었고, 그 사막의 북쪽으로 우회를 해야만 했는데 그때 경유하게 되는 곳이 바로 하란이었으며 역시 상당히 발달된 고대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우르나 하란 같은 도시들이 당시 우상 숭배에 있어서도 최첨단을 달리던 곳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라반, 사래, 밀가" 등이 다 월신과 관련된 이름들이며, 특히 "우르"에는 월신 '나나'를 섬기는 신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란 역시 월신 숭배로 잘 알려진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4장 2절에서도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 데라 역시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데라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혹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들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했던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하란'에 도착했을 때 거기서 죽을 때까지 "거하였으며", 오직 아브라함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온 것은 바로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섬기던 '강 저편에 거한 다른 신들' 즉 우상 종교를 떠나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의 걸음이었습니다. 
당대 최고로 발전되어 있던 대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다 따르고 당연히 섬기고 있던 우상숭배의 사조에서 아브라함 혼자 벗어났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온 이웃과 사회, 주변의 친구들과 학교의 선생들이 다 똑같이 말하고 가르치고 공유하고 있던 사조를 벗어난다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지키는 일이 바로 그런 생활입니다. 
인류의 90퍼센트가 신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절대다수는 여전히 우상을 믿고, 혼합종교를 따르고, 범신론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호와만이 참 신'이라고 믿는 것은 이 많은 종교인들 가운데서도 오직 기독교 신자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에서 밀린다 해도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참된 신앙노선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와 하란이라는 대도시들이 주는 거대한 사회적 사조, 또한 자기 조상들과 아버지가 주는 그 밀접한 혈연의 영향력 가운데서도 끝까지 혼자 지켜냈던 신앙 –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중심'이라고 부르는 생활원리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범신론은 예나 지금이나 '우상 종교의 특징'인 동시에 '절대다수가 따르는 종교'이기도 합니다. 
'어느 신을 믿더라도 결국은 다 똑같은 신이다. 그러니 종교가 다르다 하더라도 서로를 인정하면서 종교 간의 갈등을 없애고 화합해야 한다.'라는 논리는 비단 현대 사회에서뿐 아니라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우상 종교 십계명의 제1계명'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개혁주의 기독신자는 바로 그 '강 저편의 다른 신들'의 종교에서 떠나서 '여호와 유일신앙'을 지켜야만 합니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범신론적 우상 종교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세속적 출세욕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소망을 오직 '성경 중심'의 순종에 두는 생활입니다. 

12장 1절부터 4절의 말씀에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이 유명한 말씀은, 창세기의 본문을 따르면 마치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들은 말씀 같지만 사실은 그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에서 선포해 주셨던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사도행전 7장 2절과 3절에 "2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대로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선결되어야 할 필수과정이 있었는데 그것이 곧 자신의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본토"인 '갈대아 우르'는 그가 어릴 적부터 자라고 교육을 받고 결혼을 하여 가정까지 이룬 곳이었습니다. 
"친척"을 위시하여 그가 아는 사람이나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도 물론 다 그 곳에 있었습니다. 
"아비 집"이란 지금도 그렇지만 본인이 완전히 독립할 때까지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든든한 기반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갈대아 우르'나 '하란'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출세하기 위한 모든 유리한 조건들이 완벽히 갖추어져 있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익숙한 환경부터 시작해서 의지할 혈연, 그리고 오늘날로 치자면 거래처 사람이나 은행에 이르기까지 다 거기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자기 살던 곳을 떠나 외지로 가서 새로운 기반을 닦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아니, 그것은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 자체부터가 위협을 당하게 될 무모하고도 어리석은 짓에 불과했습니다. 
그처럼 문명이 번창하고 사업도 잘 되던 곳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간다는 것은 오늘날로 치자면 미국 뉴욕을 떠나 아프리카의 어느 오지로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큰 현실적 손실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가게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단 한 가지, 바로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호와의 말씀이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으니,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에는 그 땅이 어디가 될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단지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실 것과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해 주실 것과 그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이 언약은 나중에 '선민 이스라엘'과 '메시아로 이어지는 구속사 운동'을 통하여 정말 엄청나게 성취되기는 했지만,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들었을 당시에는 그저 막연하게만 보이는 약속에 불과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바로 그 말씀만 믿고 그 살기 좋은 본토를 떠났던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8절부터 10절에 기록된 말씀이 자세히 밝혀 줍니다. 
그는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으로 가기는 했지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는데, 오직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게 될지도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해 놓으신 미래의 축복을 확신했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아무 증거도, 징조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은 결코 공상에서 끝나지 않고 구체적으로 성취되고야 말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갔던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남들보다 빨리 출세를 해야 한다.'는 조급증과 '반드시 이 사회에서 성공한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그런 출세와 성공을 보장해 줄 만한 것들이 가장 중요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렵게 한 채 마련해 놓은 내 아파트가, 은행에 다달이 부어 넣은 적금이, 그리고 돌아가시게 될 때 내게 물려 줄 유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부모가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든든한 '본토, 친척, 아비 집'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처럼 그저 '갈대아 우르'에서만 출세해 보겠다고 버둥거리고 '하란'에서 한 밑천 크게 잡고 안정된 생활을 해보겠다는 그런 '졸부의 꿈'을 버리고 저 '가나안 땅'에 예비되어 있는 '큰 민족과 창대한 이름'의 약속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당장은 현실적으로 손해가 있는 것 같아도, 성경 말씀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명령할 때 그대로만 순종하면 바로 거기에 진짜 '대박'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 그것이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 보기에는 너무 모험적이고 위험부담이 클 것처럼만 보인다 해도,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계획에 무슨 차질이 생길 리가 있겠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 어떻게 부도가 날 리가 있겠습니까?

'갈대아 우르'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사회적인 기반을 의지하거나 '하란'에서 자리 잡히고 있던 세속적인 안정에 안주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만 나아가면 비록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길이라 해도 그 끝에는 아브라함 본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CEO들이 흔히 가르치는 '성공 세미나'를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소망을 둘 줄 아는 이 멋있는 성공 비결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해하지 않고 자신의 최우선순위를 오직 '교회 중심'의 예배에 바치는 생활입니다. 

12장 5절 이하 9절에 기록하기를 "5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6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8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드디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제일 처음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라고 했습니다. 
'세겜'은 가나안에서 잘 알려진 유명한 지명인데, '모레' 역시 그 지역에 속한 지명입니다. 
'상수리나무'란 참나무와 비슷한 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상수리나무가 왜 이처럼 유명한 지명처럼 사용되었는가 하면, 그런 곳이 당시에 "그 땅에 거하던" 가나안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하던 장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커다란 나무 밑에 정화수를 떠다 놓고 그 앞에 엎드려 손을 비비면서 절하는 관습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오늘날뿐 아니라 옛날부터 이미 유행되고 있던 공통적인 미신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곳에 갔을 때에 거기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거기서도 하나님을 만나 뵙고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약속을 재확인 받았는데 그 즉시 바로 "그곳에 단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가나안 사람들이 우상 신을 섬기던 장소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교회로 바꾸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원로목사님께서 옛날 대구의 서문로교회에서 시무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그 교회의 예배당으로 쓰던 건물은 원래 일제 때 절간이었습니다. 
지붕부터가 기와였고 내부도 다다미 바닥 그대로였으며 기둥도 절에 있는 식 그대로 둥글고 굵고 짙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던 것이 아직도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절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건물 양식은 절이라 해도,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가 드려질 때에 그 곳은 오직 교회가 될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첫 거주지에서부터 바로 그런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옮겨" 다른 곳으로 가서 "장막을 치고" 살게 되었을 때에도 역시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바로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생활이었습니다. 
즉 그는 가는 곳마다 '제일 먼저' 예배부터 드렸고 또한 일정한 곳에 오랜 기간 거주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 곳에서 내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의 가나안 생활,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 하나만 믿고 순종하면서 나그네와 이방인처럼 떠돌며 살게 되었던 그 가나안 생활의 첫 테이프를 끊었습니다. 
사실 그로서는 그보다 더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땅에 거하고 있던 가나안 본토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합법적인 거주 자격을 취득해야만 했을 것이며, 외국인으로서 허용되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생업을 꾸려 갈 수 있는 근거지도 물색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모든 '급선무'들을 다 제쳐놓고 무조건 예배생활만을 항상 최우선순위에 두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에게는 이 얼마나 멋있는 '새 생활의 스타트'이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불신자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될 수 없는, 아주 유별한 생활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가 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면 당연히 얼마나 유명한 학교인지부터 시작해서 주변의 방세가 얼마나 되는지, 한국 식품점은 가까운 곳에 있는지, 이런 것들부터 알아 볼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부모들은 그 지역에 자기 자녀가 신실한 예배생활을 할 수 있는 바른 교회가 있는지부터 먼저 확인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새 가정을 꾸릴 때에도 불신 부부들은 남편의 직장에서 거리가 가깝고,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놀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며, 쇼핑할 만한 곳이 근처에 있는 아파트를 얻으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생활 원리'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신앙의 신혼부부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늘 임재하시며, 언약의 말씀이 정확하게 선포되며, 자신의 제물을 온전히 기쁘게 바쳐 드릴 제단'이 있는 교회를 먼저 정해 놓은 후에 나머지 조건들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예배만큼은 절대로 빠뜨리지 않고,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그럴 때일수록 더욱 철저하게 교회중심으로 사는 것 – 이것이 적어도 진짜 기독신자라면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히 달라야만 하는, 정말 표가 나도록 돋보여야 할 특별한 생활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실로 '교회 중심의 예배생활'이야말로 그 어떤 불안한 현실이나 급변하는 상황에서도 저와 여러분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도록 '인생의 중심'을 똑바로 잡아 주는 부동의 축이 되는 것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밧단아람'에서는 지금도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고 있는 저 유명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인하여 인류는 이전보다 훨씬 더 '조직적인 대사회'를 구축하기 시작했으며 온갖 '다양한 문화와 학문과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위대한 문명'과 비교해 볼 때 지극히 미미해 보이는, 전혀 걸맞지 않아 보이는, 달라도 아주 다른, 실로 새롭고도 특이한 생활양식이 아브라함을 통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비록 한 사람이 시작했던 작은 출발이었지만 바로 그것이 결국은 '선민 이스라엘'을 이루었으며 오늘날 바로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똑같이 믿는 '크리스천 민족'이 전 세계 방방곳곳에 퍼지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대다수의 인류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삶과는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명령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들이 하나같이 '범신론' 안에서 '종교 간의 이해와 화목'이라는 것을 나눈다 하더라도,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다.'라고 외쳐야만 합니다. 
불신자들은 혈연과 지연의 연줄에 기대면서 출세와 성공에만 혈안이 되어 결국 자신이 얻은 재물과 명예에 안주하려는 가운데서도, 저와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 무조건 순종함으로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확고부동한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 인간사회가 아무리 복잡하고 바쁘고 불안하다 하더라도, 우리 기독신자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일단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생활에 최우선을 둠으로써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 인생의 중심을 똑바로 잡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야말로 아브라함 때부터 저와 여러분에게 이르기까지 참된 기독신자들이 이어받고 실천하고 또한 전해 주고 있는 너무나도 멋있고 완벽한 '신앙인의 생활원리'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개혁주의 신앙의 3대 생활원리'를 통하여 오늘날도 여전히 압도적인 '갈대아 우르'의 불신앙 세력의 조류를 당당히 맞서서 진정 참된 '신앙 문화, 신앙 사회, 신앙 생활'을 건설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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