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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 (고후 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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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 (고후 5:1-10)


부활과 영생은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항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세무궁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도 우리의 부활과 영생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도 우리의 부활과 영생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을 가리켜 말할 때 그 의미가 가장 클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다 벌 받아 죽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을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끝내는 것은 다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과 영생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에 결정적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미 부활과 영생에 대한 그의 믿음을 힘주어 반복적으로 피력한 바 있습니다. 고전15:21-54 사이에서 몇 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1-22절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2-44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1-54절입니다. 

이상의 글들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믿음에 관하여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육신적으로 죽었다가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것이고 영광스러우며 강하고 신령하며 죽지 않는 몸이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은 단지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죽는 일이 없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전15:19에서는 말하기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했고, 오늘 본문 바로 앞인 4:18에서는 쓰기를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러한 부활과 영생에 관한 그의 믿음을 재확인하며 그 믿음으로부터 오는 그의 삶의 근본적인 자세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밝히는 삶의 근본자세는 단지 그만이 아니라 부활과 영생의 믿음을 가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란 우리의 육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을 장막 집에 비유한 사도 바울의 의도는 그것이 임시적인 처소임을 인식시키는 데 있습니다. 장막은 군인들이나 목자들이나 유목상인들이 들판에서 야영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또한 종교행사나 운동경기가 있을 때 참석자들이 사용하곤 했습니다. 고린도에서는 이 년에 한 번씩 범희랍권의 운동경기가 열릴 때면 그 시 주변에는 장막들이 많이 세워지곤 했습니다. 마치 고린도 시가 장막들로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행사가 다 끝나면 갑자기 그 장막들이 다 철거되어 사라지고 돌로 지은 견고한 로마식 주택들이 들어선 고린도 시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곤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낯익은 광경으로서 고린도 시 주민들에게 임시 거처로서의 장막과 영구적 석조건물 사이의 대조를 뚜렷이 보여주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통해 일시적인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삶을 더 바라보아야 할 것을 권면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장막 집을 말하며 사도 바울이 옛날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사십 년간의 장막생활을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이동할 때마다 장막이 반복해서 걷혀지는 것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 장막의 임시성과 일시성을 익히 잘 알고 있었을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견고한 집을 짓고 살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었을 것이며 광야에서의 나그네의 삶 속에서는 장막 집이라는 일시적인 처소에 큰 미련을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실에 비유하며 이 세상에서의 삶의 일시성을 상기시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옛날 출애굽 한 조상들의 광야에서의 삶을 기념하며 한 주간 동안 초막을 짓고 거기 거하며 명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초막은 참 초라하고 불편하지만 지속적인 거처가 아니고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거처이기에 잘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의 일시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장막 집의 비유를 사용했을 것이라 봅니다. 

부활과 영생의 믿음으로부터 오는 사도 바울의 삶의 자세의 두 번째는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더욱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그 삶은 영원하고 죽음이 생명에 삼킨 바 된 삶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본문 2절에서 쓰기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합니다. 그 이유는 1절 하반절에서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알기 때문이며 4절에서 말하듯 거기서는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은 후의 삶이 영원하고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삶이라는 확신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 할 사람들을 위하여 먼저 그 답을 내놓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사도 바울 자신에게뿐 아니라 다른 모든 믿는 이들에게도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그 확신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을 통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더욱 사모하는 이유는 단지 그 삶이 영원하고 죽지 않는 삶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이유를 사도 바울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기서의 삶은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 삶이라면 영원한들 무슨 기쁨과 설레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의 그런 마음을 본문 6-7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다”는 말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몸으로 있을 때”란 이 세상에서 살 때를 말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살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살면 영적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온전히 함께하는 삶은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주와 따로 있는 삶”으로 본 것입니다. 그것이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다”는 말의 뜻입니다. 이 말은 또한 주와 온전히 함께 살게 될 하늘나라야말로 우리의 시민권이 있는 우리의 본 고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임시로 지나가는 이 세상의 삶보다 하늘에 있는 처소에서의 삶을 더 사모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늘에 있는 처소에서의 삶을 더 사모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의 삶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 뜻으로 쓴 글이 본문 7절의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이미 4:18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한 말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을 주목하는 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부활과 영생의 믿음으로부터 오는 사도 바울의 삶의 자세의 세 번째는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더욱 사모함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몸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부활과 영생의 믿음으로부터 오는 사도 바울의 삶의 자세의 네 번째는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더욱 사모함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더 사모하지만 언제 그 삶에로 들어갈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려는 뜻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말이 본문 9절의 말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것은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느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하늘나라 갈 생각만 하는 것은 바른 믿음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늘나라에 갈 것인데 뭐 그리 열심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쓸 것 있느냐는 생각을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가 바라는 바를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 10절을 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모든 사람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반드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우리 각자가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산 이들이 각각 주의 나라에서 누릴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님 기뻐하실 일에 충성을 다한 후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하였도다. 나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하시는 칭찬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의 삶을 사모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행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복된 삶을 약속받은 이들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되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백성 되기를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하였도다. 나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하시는 칭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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