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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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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원수를 갚지 말고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이 과연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생각하여 마태복음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쓴 편지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 요한이 쓴 편지 요한일서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약 성경 레위기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웃 사랑, 심지어 원수 사랑이 이미 율법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렇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을까요? 그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궁극적으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신 30:19~20) 율법을 주신 까닭은 그 율법을 지켜 행하는 그들에게 생명과 복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지켜 행하는 그들에게 생명과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을까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저주를 받고 멸망하는 것을 그냥 놔 두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어떤 자격이나 공로가 있었습니까? 아무 자격도 공로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예수님이 십자가를 눈앞에 두신 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하반절) 그리고 제자들에게 누군가 주님을 배신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가 배신자라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폭로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서도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회개하지 않고 주님을 팔아 넘기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가룟 유다가 나간 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요 13:31)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영광이라고 하면 화려하고 좋은 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이란 참혹한 십자가 죽음을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낡은 율법 대신에 주님이 새 계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잔뜩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새 계명을 들었을 때에 제자들은 약간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을 새삼스럽게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로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힘을 주어 말씀하셨을까요? 간단히 말해서 알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알고 있는 그 말씀을 실천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전혀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식탁에서 그들이 보여 준 태도가 바로 뚜렷한 증거입니다. 그 누구도 먼저 나서서 주님의 발을 씻어 드리지 않았습니다. 스승의 발도 씻어 주지 않은 그들이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가룟 유다의 경우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스승을 팔아 넘길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그가 스승을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 그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가 우리의 삶의 질을 좌우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를 깨뜨리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런 요소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아마 질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질투가 어떻게 시작됩니까? 첫 단계는 비교하는 것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재능이나 행복을 축하할 수 없을 때에 질투라는 감정이 생깁니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했습니다. “질투는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슬퍼하는 것이다.”라고... 질투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보고 고통을 느끼는 감정입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 이하의 기사를 보면 마리아가 비싼 나드 향유 한 근을 주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 털로 주님의 발을 닦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가 왜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고 그녀를 비난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가 도둑이라서 그랬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그가 마리아를 질투했기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 비난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의 헌신을 주님은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막 14:9) 가룟 유다로서는 질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질투의 다음 단계는 상대를 해치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울 왕은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이 백성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자 그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금을 연주하는 다윗에게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또 자객을 고용하여 여러 차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비이성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가인도 질투에 눈이 멀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질투는 미친 짓을 하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게 만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관계를 깨뜨리는 이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먼저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시기, 질투, 미움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애써도 그런 마음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으면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바꿔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아 알았으면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도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렇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르짖어 간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코리는 2차 대전 중 유대인을 숨겨 줬다는 이유로 온 가족이 독일군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못된 간수는 코리가 벌거벗은 채로 샤워실로 들어갈 때에 그녀를 조롱하고 또 그녀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복음을 전하다가 바로 그 간수를 만났습니다. 말씀 선포가 끝난 후 그가 손을 내밀고 그녀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자매님 나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녀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도와 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뭔가 따뜻한 것이 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잘했다 코리야,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그녀의 마음에서 미움은 사라지고 그를 부둥켜안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비록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힘을 주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생각이나 느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습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릅니까?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한국 교회의 문제를 말합니다.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스스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누구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가 아닙니다. 내가 바로 문제의 장본인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문제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여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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