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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2 07:09

나다나엘의 변화 (요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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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의 변화 (요 1:43-51) 
 
미국에 있는 UCLA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가 의학 공부를 다 마치고 현장으로 나갈 졸업생들과 마지막으로 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한 가정의 아버지가 매독 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인 가정이 있네. 그들에게 네 아이가 있는데 첫째는 매독 균으로 인해 장님이 되었고 둘째는 죽었고 셋째는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는 결핵 환자가 되었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또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 유산시켜야 하는지를 상의하기 위해 병원을 찾아 왔네. 이런 경우에 자네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라고 질문했습니다. 

학생들은 ‘부모가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유산을 시켜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수는 학생들을 향해 매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네’라고 말했습니다. 

세계적인 음악가인 악성(樂聖) ‘베토벤’은 바로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였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였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중병에 걸렸고 죽기도 했습니다. 베토벤도 나중에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하며 불후의 명곡을 남겼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결과를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편견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건을 공정하게 보지 못하고 한 쪽으로 치우쳐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좁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한쪽으로 치우쳐 사람과 사건을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판단은 더러 맞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그릇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자신의 편견을 중심으로 판단하며 사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는 모습이 나옵니다.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변화되는지에 대해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만나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도 결심했습니다. 빌립은 자신의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며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공관복음에 예수님의 12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두 번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고 또 한 곳은 요한복음 21장 1,2절에 나옵니다. 그 상황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로 가셔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여기에 12제자들 중에 일부가 나옵니다. 그 가운데 나다나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고향이 갈릴리의 가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공관복음에서 12제자의 이름이 나올 때는 나다나엘의 이름이 없습니다.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12제자의 이름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로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바돌로매’는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서에 ‘바’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바돌로매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리고 성에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디매오’는 이름이 아니라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나다나엘을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바돌로매’라고 봅니다. 나다나엘은 돌로매의 아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안드레와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빌립과 바돌로매로 연결되어지는 부분이 그 사실을 뒷받침하기도 합니다. 서로 전도한 사람들의 이름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을 때 그가 보여주는 특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그에게 소개할 때 나사렛 출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지역적인 편견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의 한 마을로 아주 낙후된 곳이었습니다. 사투리가 아주 심해서 다른 지역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사람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들이 사는 마을 사이에 끼어 있어서 유대 문화를 유지하지 못하고 혼합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들을 반쪽 유대인으로 취급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도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구약은 물론이고 탈무드나, 미드라쉬 그리고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글에 단 한 곳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만큼 작은 동네이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혀 관심이 없는 곳입니다. 메시야가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 정도의 출신이라면 몰라도 나사렛 출신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그의 고향인 가나로부터 나사렛이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나사렛의 열악한 환경을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에 대해 표면적으로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편견을 가지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단언합니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사물이 다르게 보입니다.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색안경을 벗어야 본래의 색깔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색깔을 본래의 색깔이라고 주장하니 문제인 것입니다. 편견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합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듣게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게 합니다. 편견은 사람과 상황을 보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어 상처를 주고 일을 그르치게 만듭니다.  

편견을 가지고 일을 그르쳤던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지 않고 율법주의자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율법주적인 편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서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유대교를 어지럽게 하는 위험한 이단 집단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 장 섰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옥에 가두는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열정을 다해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이후로 바울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온전한 믿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마음과 가치를 가지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방향과 목적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해석이 달라집니다. 

나다니엘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아집과 편견을 버리고 변화되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그의 편견을 버리고 49절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나의 편견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중심으로 변화하는 진정한 믿음의 삶이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다나엘의 또 다른 특징은 그는 매우 신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삶을 보면 그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매우 신실한 믿음을 가진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신실한 믿음의 성품을 칭찬하셨습니다. 

47절을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고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칭찬하신 이유는 그에게 간사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간사함은 이중성을 말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쁜 꾀를 내어 상대방을 속이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실수와 속임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실수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력이 부족해서 일을 그르친 것입니다. 

하지만 속임은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한 것입니다. 판단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는 이중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아직은 미숙하고 거친 성품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진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이스라엘의 무화과나무는 키도 크고 또 옆으로도 넓게 퍼져서, 마치 우리나라의 느티나무와 같이 그늘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조용히 성경도 읽고, 명상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면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는 말씀은 ‘네가 기도와 말씀으로 경건의 훈련을 쌓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생활 속에서 경건의 훈련을 쌓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경건의 훈련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진실한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편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편견을 버리고 예수님을 젗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는 나다나엘을 향해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시며 더 큰 꿈을 주십니다.  

나무는 눈에 보이는 겉모습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가 더 중요합니다. 뿌리가 썩으면 나무는 곧 시들어 죽고 맙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재능과 외모와 다양한 스팩 보다 경건 훈련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선택하심은 간사함이 없는 그의 신실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의 믿음이 간사함이 없는 신실한 믿음의 모습입니까?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 나다나엘처럼 간사함이 없는 믿음이 되어 예수님의 거룩한 부르심 앞에 서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꿈과 축복 가운데 거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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