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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으로 낳는 은혜를 감사합시다 (고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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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낳는 은혜를 감사합시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열여덟 살에 여중 1년생으로 남들보다 늦은 나이였지만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가는 야간학생이었던 분의 간증입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정규 중학교에 가지는 못했지만 배우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던 중에 돈벌이를 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탔다합니다. 처음 일 년은 공장에서 제일 밑바닥 일을 하면서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합니다. 일이 서투르다고 언니들한테 야단을 맞고 직장 상사로부터 인격적인 모욕도 받았지만 배워야 한다는 각오로 견뎌냈다 합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학교에 나이가 가장 많으시고 교무주임을 하시면서 물상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계셨다 합니다. 선생님은 항상 출석을 부르면서 결석한 친구가 있으면 혹시 건강에 문제가 없나, 직장을 그만 두었나 꼭 살피셨다 합니다. 그리고 방학 때나 시간이 있을 때마다 공장에 와서 학생들을 격려하고 열심히 살라고 위로하셨다 합니다. 

당시 많이 지쳐 있었고 공부도 포기하고 싶었던. 그런 힘든 고비 때마다 선생님은 마치 아버지같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사랑을 주셨습니다.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이 있으면 선생님이 더 안타까워하시고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피곤해서 조는 학생들을 깨우면서 힘들지만 참고 열심히 공부하면 훗날 반드시 보람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늦은 밤에 귀가하는 여학생들을 걱정하시며 혼자 다니지 말고 여러 명이 모여 다니라고 하셨고, 이곳에서 일생 동안 잘 지낼 친구를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선생님의 따뜻한 관심에 힘입어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딸 하나를 둔 가정주부가 되었습니다. 친정아버지를 뵐 때마다 이미 정년 퇴직을 하신 선생님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바울은 농부요 정원사였습니다.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건축자였습니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그리스도의 일꾼이었고,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청지기였습니다.
(고전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이제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아버지'라 일합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내 사랑하는 자녀'라고 하며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15절)고 합니다.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는 바울의 신앙적인 면에서 아버지 됨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미 구약에서는 선생과 제자가 아버지와 아들로써 묘사되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왕하 2:12)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아합에서부터 아하시야 재위 기간 동안 무수한 고난 속에서도 의연하게 맡은 바 사명에 충실하였던 선지자였습니다. 자신의 맡은 바 사명을 완수한 엘리야는 이제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시점에 다달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의 제자인 엘리사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벧엘 북쪽의 길갈에 있던 엘리야는 승천하기에 앞서 선지자의 생도들이 있는 벧엘로 가고자 했습니다. 가기에 앞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길갈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와 떨어질 수 없다고 결심한 터였기에 엘리야의 명을 거역하고 엘리야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함께 벧엘로 와서 선지자의 생도들을 만났으며, 엘리야는 깊은 감회 속에서 이들을 격려하고 위로하였습니다. 물론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도 엘리야의 승천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벧엘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난 엘리야는 다시금 엘리사에게 이곳에 머물라고 제의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엘리사는 정중히 거절하면서 충성을 다해 엘리야를 섬기며 함께 동행할 것을 다짐합니다. 또다시 두 사람은 함께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 생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 있는 생도들도 벧엘의 생도들과 마찬가지로 엘리야의 승천을 알고선 이를 엘리사에게 알고 있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알고 있으니 잠잠 하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한편 엘리야는 요단을 향해 가면서 똑같은 요구를 엘리사에게 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사 역시도 똑같은 대답과 행동을 취하면서 요단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요단 강 기슭에 도달한 엘리야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그것을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겉옷으로 요단 강 물을 쳤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요단 강물이 갈라지고 강바닥이 말라서 두 사람은 요단 강을 육지같이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출애굽 당시 홍해가 갈라졌고, 또한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건넜듯이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동일하게 임하심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무엇이든지 요구하라고 제의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엘리야의 계승자로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영감을 갑절로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는 엘리야의 능력으로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자신의 승천을 엘리사가 볼 때에 이 요구가 이루어지리라 말하였습니다. 이러던 중 갑자기 하늘로부터 불수레와 불말이 다가와 두 사람을 격리시키더니 회리바람이 엘리야를 태우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리하여 엘리야는 에녹 이후 두번째로 육신의 죽음을 보지 않고 영광스럽게 승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승천을 직접 목격한 엘리사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습니다. 영적인 아버지요 스승인 엘리야와의 이별도 가슴 아픈 일이었고, 이제 엘리야의 뒤를 이어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책임 또한 엘리사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엘리야의 계승자로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승천할 때 벗겨진  엘리야의 겉옷을 취하여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라고 외칩니다. '아버지여'라고 말한 것은 엘리사가 자신을 엘리야의 영적 아들로 인식하고 엘리야를 '아버지'라고 호칭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사가 병환으로 임종을 맞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요아스 왕은 그를 방문하여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라고하며 애통해 하였습니다. 엘리사가 병들었습니다(왕하13:14절). 이 때는 그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후 약60년이 되었던 때입니다. 

엘리사가 이렇게 오랫동안 찬란한 빛으로 있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에게, 특히 선지자가 되려는 생도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엘리사 생애의 후반기, 즉 요아스의 즉위 25년 전, 예후에게 기름 부은 일 이후, 그의 신상과 행한 일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와 있지 않지만 임종의 자리에 누운 엘리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엘리사가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하자 엘리사를 존경하던 요아스가 병 문안차 왔습니다. 요아스는 엘리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있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엘리사가 죽는다는 것은 민족적으로 큰 손실임을 요아스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아스 왕은 그에게 병문안하고,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고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사가 외치던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

스승은 많으나 아버지는 많지 않다는 말은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아버지의 심정으로 복음 사역을 수행하였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이란 후견인 혹은 가정교사를 가리키는데 사도 바울 당시에는 노예가 이 일을 담당 하였습니다. 이들은 아이들을 지도하고 보호하지만 제자의 인격과 장래를 잭임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제한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들은 세상에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만’이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스승’과 비교하여 자신을 ‘아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을 단지 말씀의 지식만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진정한 해산의 고통을 통해 영혼을 낳는 아버지로 비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 사역을 말씀으로 영혼을 낳는 것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영혼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수고를 하였는지와 또 그가 복음의 씨앗을 뿌려 세운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에 대해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나타내준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선교로 말미암아 탄생한 교회였습니다(행18:1-11).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의 문서에도 “만일 어떤 이가 이웃의 아들에게 토라를 가르치면 그것은 그가 이웃의 아들을 낳은 것과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다합니다.

또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 했던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어 바울은 믿음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스승들과 구별되는 자임을 밝히면서  고린도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한‘ 복음을 통하여’ 세워진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오직 복음만이 새 생명의 수여자요, 자신은 그 수단임울 철저히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영적 스승이란 의미라기보다는 고린도 교회의 경우 다른 지도자와 달리 자신은 그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복음 안에서 성장시킨 자라는 의미에서 아버지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아버지’란 표현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자신이 그 교회의 설립자란 사실과 더불어 그들에게 여전히 큰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대해서도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릅니다. ‘자녀들’이란 호칭은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어린아이’(네피오스)는 영적으로 또는 신체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아이’를 지칭하는 단어인(마21:16 ;고전3:1 ; 13:11 ;엡4:14) 반면,‘자녀’(테크논)는,혈육 관계에서의 자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막12:19 ;엡6:4). 특히 복음 안에서의 깊은 관심과 영적 양육을 전제로 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디모데를 향해서는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1-2)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 안에는 그의 헌신적인 수고와 깊은 애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해산하는 수고(오디노)는 헤산하다’,‘해산하는 고통을 겪다’란 뜻울 지닌는 단순히 해산의 과정을 그리는 말이라기보다는 그에 따른 고통을 묘사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수고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기 위하여 사용된 말입니다.

그는 처음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할 때도 이와 같은 고난을 감수하였습니다(행14장). 그런데 이제' 다시(팔린)' 또 그런 고통을 감수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온전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아이를 출산할 때 겪어야 하는 산고와 같은 고통을 갈라디아 교회를 위해 또다시 겪는다고 합니다.

자녀 하나에 대하여 두 번의 산고를 겪는 일은 자연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영적 자녀인 갈라디아 교인들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자청하여 고난을 감수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이러한 고통의 대가를 치르게 되면 갈라디아 교인 들온 율법주의라는 망령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목표 지점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고난을 받겠다는 것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또 수고를 하겠다는 바울의 결의에 찬 선언입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여 자녀를 얻게 되는 이는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만이 해산하는 수고를 겪고 나서 자녀를 낳습니다. 이는 자신의 몸의 일부를 도려내는 것과도 같은 엄청난 고통을 의미합니다. 온몸이 으스러지고 심장이 멈추어 버릴 정도의 고통의 터널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어머니는 자신의 자녀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자녀가 아프지는 않을까 하여 늘 노심초사하며 지켜봅니다. 그리고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힘을 다해 돌보고 기릅니다.

이는 또 하나의 해산하는 수고와 같습니다. 자녀가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갈 수 있도록 어머니는 자신의 젓들을 하나씩 하나씩 칼로 베어 베풀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의 심정인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어머니의 심정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낳고 길렀다고 말합니다.

누가는 사도행전13.14장에서 바울이 해산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복음으로 그들을 낳는 장면을 생생히 기록하고 았습니다.

바울은 이고니온에서 유대인과 그 일당이 돌로 치려는 순간에 다행히 피하기도 했으며,루스드라에서는 거의 죽은 것으로 인정될 정도로 맞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만 구원의 소망을 두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실로 바울은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온갖 박해와 고통을 꿋꿋이 이겨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학교처럼 단지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선교 명령은 단지,성경을 가르쳐서 지식이 넘치고 유능한 성경 박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주님과 성령께서 하신 바와 같이 새롭게 영혼을 탄생시키고 재창조해 내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께서도 니고데모에게 먼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진리에 대해 말씀하셨고(요3:3-7) 이를 이루기 위해 친히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요19:34).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자기 형상을 닮은 아기를 낳기 위해 해산의 고통을 감내하는 산모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 영적적으로는 거듭남 곧 중생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중생'을 더 강조하며 무엇으로부터 출생하게 되는가를 밝힙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하고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고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하여 성령으로 난다고 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요 3:6)라 하여  육신으로 난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하나님이나 성령으로부터의 출생에 대한 진술들을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신자의 교제를 통해서입니다. 

   
해산은 고통이 따르지만  기쁨도 함께 합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 16:21)고 합니다.

91년 1월 결혼한 양종희 (34.회사원.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126-9)씨는 지난해 6월말  `임신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일화를 들려주며 수줍게 웃었답니다. "맞나? 거짓말이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남편(41)이 물었습니다. "정말 이에요." "진짜 맞나?" "진짜라니까요." 두 번을 거듭 확인한 뒤 그 제서야 믿는 눈칩니다.  

남편은 부산에  있는 시댁에 바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머니,  집사람 임신했답니다." 기뻐하실 줄 알았던 시어머니는  대뜸 이렇게 묻더라는 것입니다. "어데서 알았노?" "동네 산부인과에서랍니다." "쬐깐한 데서 무얼 알겠노? 큰 병원에 가 보그라.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안 알릴란다. 알렸다 아니면 뭔 망신이고."  

나중에 알고 보니 몇 년간 아이가 없자  시댁 주변에선 "정씨네 작은며느리 애 못 낳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햇수로 5년이 조금 넘을 뿐이지만, 남편이 이미 40줄을 넘긴 터라 말은 안해도 시댁의 조바심은 컸다고 합니다. 

흑염소를 다려주기도 했던 시아버지가 3년 전 세상을 뜬 뒤 죄스런 마음까지 들기도 했다합니다. 양씨와 남편 모두 `이상'이 없었다합니다. 양씨는 배란촉진제도 먹어봤다고 합니다. 친정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94년 여름과 95년 봄 두 차례나  경주에서 3대째 내려오는 용하다는 한약 집에서 지어온 약도 먹었다합니다. 약의 효험이 있었던지 불규칙하던 `달거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합니다. 

얼마 뒤 회사에서 떠난 설악산 수련회에서 이상하게도 입맛이 좋았다합니다. 그래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산부인과로 달려갔고 임신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 후  양씨는 18시간의 진통 끝에 딸 재회를 낳았다 합니다.

그런데 출산은 잉태가 있어야만 합니다. 영적으로는 태신 자가 있어야 전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엘가나와 결혼하였지만 오랫동안 아이를 출산하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남편의 또 다른 아내인 브닌나의 출산으로 인해 한나는 몹시도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자식이 없는 한나는 성전에 올라가서 통곡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는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엘리 대제사장은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나신도 한나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소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사장의 축복을 들은 한나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기도 응답을 확신한 한나, 그녀는 자신의 믿음대로 곧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녀를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하게 큰 은혜를 끼친 사무엘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교회에 출석하는 출석 교인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천국의 시민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단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다해 따르며 진리와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의,형상으로 성숙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한 생명을 낳는 해산의 고통과 함께 양육을 위한 모든 눈물과 수고자 반드시 요청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말과 지혜로만 말씀을 전파하고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데 주력할 것이 아니라 주님과 사도 바울의 모범을 따라 동일한 피와 땀과 눈물을 바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행20 :19-31).

그리하여 단지 지식만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진실로 한 영혼을 낳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천국시민으로 키워내는 참된 영적 부모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로 교회 80주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새 생명 전도 축제를 준비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는 사도 바울과 함게 복음으로 낳는 은혜를 우리에게도 허락하신 하시고 태신 자를 작정케 하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사명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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