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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곁의 여인들 (출 1:15-17, 요 1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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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곁의 여인들 (출 1:15-17, 요 19:25-27)

우리나라의 전래 동화 가운데 ‘선녀와 나무꾼’이 있습니다.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는데 나무꾼이 선녀의 옷을 숨깁니다. 선녀는 날개옷이 없어 하늘로 올라갈 수 없었고, 나무꾼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살았습니다. 선녀가 나무꾼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날개옷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꾼은 선녀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남편의 도리를 다 했고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선녀도 아내의 도리를 다하고 나무꾼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무꾼이 감추어두었던 날개옷을 보여주자 그 옷을 입고 하늘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선녀의 나무꾼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날개옷은 떠날 이유를 제공해 준 것입니다. 

선녀가 나무꾼 곁을 떠나지 못한 이유는 단지 날개옷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무꾼을 진정 사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진정성 있는 사랑은 절대로 떠날 수 없게 하지만 참 사랑이 아니면 얼마든지 떠날 이유를 찾습니다. 

과학자가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화학자이며 미생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는 “얕은 과학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만, 깊은 과학은 하나님에게로 되돌려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과학을 깊이 하다보면 하나님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는 하나님을 찾게 되고, 떠나지 못하게 됩니다. 

엘리사와 스승 엘리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하였지만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서 길갈에서 벧엘로, 여리고로, 요단으로 따라갑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승의 영감의 갑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스승을 떠나지 않았던 엘리사는 자신의 목적을 이룹니다. 떠나지 않고 곁을 지키는 자가 자신의 목적도 이루게 되는 법입니다. 

디모데후서 4:10에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합니다. 그들이 바울을 버리고 떠나갈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바울은 말미에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라고 합니다. 누가가 바울을 떠나지 못한 이유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세상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26:33에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거짓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진심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똑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버릴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이 되실 줄 알았는데 왕이 되시기는커녕 유대인에게 잡히시고 로마군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 그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기대가 무너져 절망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육신적, 인간적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킨 여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여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평소에 드러나지 않던 예수님의 숨은 제자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8:3에는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고 합니다. 물질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활동을 3년이나 도운 여인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십자가 때문에 도망갔지만 여인들은 십자가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고 곁을 지켰습니다. 사랑은 많이 베풀어야 위급상황에서도 떠나지 않는 참 사랑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봉변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십자가 곁을 떠나지 못한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나지 못한 이유가 우리가 주님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십자가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9:25에는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최측근 여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버리라고 해도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이유가 충분한 여인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여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들은 십자가를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분명히 십자가를 따라갔지만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를 따른 것이지 십자가만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이들은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을 더 따른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얼마나 아프실까, 얼마나 힘드실까, 마음 조리며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따를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따를 것은 예수님이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지 아무 것도 없는 빈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때문에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 때문에 십자가가 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7:55에는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라고 합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따른 사람들입니다. 요즘 애들 말로는 예수님의 ‘광팬’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극진한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고 십자가 곁을 지키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 “십자가를 따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따를 것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없는 십자가를 따르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회를 나오지만 예수님은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 없이 교회만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따를 분은 예수님이시고, 우리가 믿을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찬송가에는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냥 십자가가 아니라 ‘주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십자가도 무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지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에는 돈과 결혼한 사람이 많습니다. 결혼지참금이 적다고 아내를 구타하고 이혼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지위와 결혼한 사람도 많습니다. 배우자나 그 부모의 세상 지위와 결혼하여 지위가 떨어지면 결혼도 파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명예와 결혼한 사람도 있습니다. 상대 부모의 명예에 매여 결혼하여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배우자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조건 때문에 결혼하게 되면 절대 행복하지 못합니다.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셨을 때에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가 아니라 영생하는 떡과 영생하는 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떡을 먹으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이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진정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영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다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다 떠나갔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따른 것이 아니라 떡 때문에 따른 것입니다. 더 이상 떡은 주지 않고 “내가 떡이다”라고 하니 떠나고 만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까. “너희도 가겠느냐?” 그 때 베드로는 요한복음 6:68에서 말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다른 사람들이 다 떠나도 떠나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다. 영생의 말씀 때문입니다. 말씀을 따라가야 떠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중국 동진의 환온(桓溫)이란 장군이 촉(蜀)나라 정벌에 나섰습니다. 배에 군사를 나누어 타게 하고 양자강 중류에 있는 협곡인 삼협(三峽)을 통과할 때에 환온의 부하 한 명이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서 배에 가져왔습니다. 새끼를 빼앗긴 어미 원숭이는 뒤따라왔으나 물 때문에 배에 오르지 못하고 강가에서 슬피 울부짖었습니다. 

배가 출발하자 어미 원숭이는 강가의 벼랑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배를 쫓아왔습니다. 배가 100여 리나 지나 강기슭에 대자 어미 원숭이는 배에 뛰어올랐으나 지쳐서 죽고 말았습니다.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애통하는 아픔 때문에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습니다. 환온은 크게 노하여 그 부하를 매질하고 쫓아 버렸다고 합니다. 어미 원숭이는 새끼를 태운 배를 떠나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새끼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미에게 자기 새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결코 버리고 떠날 수 없습니다. 곁을 지켜야 합니다. 따라가야 합니다. 속이 시커멓게 타야 합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여인들은 극진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베드로전서 1:8에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슨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끝까지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다 버릴지라도 주님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 사랑해요” 이 한 마디 때문입니다. 
  
둘째,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용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도망 가버린 긴박하고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56에는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떠나지 않고 주님 곁을 지켰습니다. 여인들의 본능적이며 모성적인 용기는 남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하였습니다. 

참 용기는 여성에게서 나올 때가 많습니다. 요즘 영화에 보면 뱀파이어나 좀비가 등장하는 영화가 많습니다. 이런 것이 영성시대의 특징입니다. 이런 영화에 보면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는 대개 남자가 아닌 여자입니다. 여성이 훨씬 강하고 용기가 있고 끈질깁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하였지만 여인들은 도망가지 않고 십자가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갔고,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십자가 아래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계실 때도 여인들은 향품을 가지고 무덤 찾아갔다가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진정한 지혜는 용기와 만납니다. 지혜가 없는 용기를 만용이라고 합니다. 지혜가 있는 용기가 참 용기입니다. 용기가 없는 지혜는 꾀입니다. 용기가 있는 지혜가 참 지혜입니다. 이 여인들의 용기는 사랑과 지혜가 있는 참 용기입니다. 처칠은 “성공은 종착점이 아니며 실패는 파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용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용기는 예수님을 따르는 여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무기였습니다. 

출애굽기 1:17에는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고 합니다. 바로는 히브리 여인들이 아기를 낳을 때에 가서 남자거든 죽이고, 여자거든 살리라고 하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산파들은 바로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왜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까? 바로의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에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왕권이 엄청났고 서슬이 퍼럴 텐데 바로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두려워하다’는 히브리어는 ‘야레’입니다. 이 말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상급자 혹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바로의 말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페르시아 왕이 자기만 섬기게 하고 다른 신에게 기도하지 못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세 차례 예루살렘을 향하여 문을 열고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을 사자 굴에 빠트리기로 한 음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용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큰 신상에게만 절하라고 하였지만 신상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의 용기는 세상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려는 용기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용기를 낳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 와서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개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상아래 개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자신을 개라고 하는 굴욕적인 말도 극복하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이 용기가 자신의 딸이 나음을 받게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공회 앞에 잡혀 갔습니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절대로 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도 사도행전 5:29에는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합니다. 당시에 공회의 권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이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요? 베드로는 대제사장 집에서 어린 여종의 말에도 두려워하여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었는데 이제는 달랐습니다. 용기가 넘쳤습니다. 

스캇 펙의 ‘끝나지 않은 여행’에 보면 “두려움이 없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일종의 뇌상이다. 용기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혹은 고통을 무릅쓰고 앞으로 전진하는 능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인들도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버릴 수 없고, 십자가 곁을 지켰습니다. 

여인들이 십자가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로마군인, 대제사장, 유대인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덕분입니다. 여인들의 용기는 사랑에서 나온 용기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은 무한한 용기를 낳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어머니와 여인들의 모성애는 무한한 용기를 낳았습니다. 

결론 

대원군이 난초 그리기에 정신을 쏟고 있는데 시골의 한 선비가 찾아왔습니다. 선비를 들어오라고 하고도 난초를 그리느라 정신이 없는 대원군은 아는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비는 큰 절을 한 번 하였습니다. 그래도 대원군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난감해진 선비는 다시 큰 절을 드렸습니다. 

대원군은 들고 있던 붓을 집어 던지면서 큰소리로 야단을 쳤습니다. “네 이놈, 내가 누군질 모르고 이 행패냐? 죽은 사람도 아니고 산 사람에게 두 번씩이나 절을 하다니!” 선비는 잠시 당황하였지만 곧 침착하게 대꾸하였습니다. “고정하소서. 제가 처음에 올린 절은 와서 뵈었기에 올린 절이며, 지금 올린 절은 이만 물러가겠다는 절이었습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용기가 있고 당당한 선비의 답변에 대원군은 쓸 만한 사람을 얻었다며 그에게 벼슬을 내려 주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고 용기를 잃지 않으면 뜻하지 않는 기회가 생깁니다. 

미구엘 드 세르반테스는 “부를 잃는 자는 많은 것을 잃는다. 친구를 잃는 자는 더 많은 것을 잃는다. 용기를 잃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용기만 잃지 않으면 못 이룰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만 사랑하고 끝까지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사랑은 용기를 낳습니다. 주님이 가장 외로울 때 주님을 떠나지 않는 극진한 사랑을 가진 그리스도인, 주님이 가장 필요할 때 주님의 곁을 잘 지키는 용기를 가진 그리스도인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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