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적그리스도

첨부 1


(20강) 요한일서 2:18 적그리스도

 

<본문>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한일서 2:18)

<설교>

16절에서 말씀드린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는 내용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세상 것을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의 욕망으로 구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도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된 것은 없습니다. 또한 복의 본질도 아닙니다. 때문에 세상 것으로 복을 논할 수 없는 것이고, 나아가서 세상 것에 대한 소유를 두고 믿음이나 은혜, 사랑을 가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말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지 않으신 것을 소망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때문입니다. 세상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항상 세상을 뒤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이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다스려져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이용해서 세상에 안주하고자 하는 발상을 가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소경에 불과할 뿐입니다.

 

복음은 우리 안에서 세상을 향한 욕망을 다스리며 모든 소망을 예수님에게만 두게 합니다. 세상에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소망 말입니다. 날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사는 그가 바로 신자로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거짓되게 가르치는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적그리스도라 불려지는 존재입니다. 본문 1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사도 요한이 적그리스도를 말하면서 수신자들을 ‘아이들아’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유혹에 쉽게 흔들릴 수 있고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상태의 신자를 설명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의 대적자를 물리치고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되지를 못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의 상태는 입술은 철저히 하나님 편이지만 그 심령은 세상 편에 기울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조그만 유혹에도 쉽게 마음을 빼앗기는 어린아이처럼 그리스도께 지배 받아야 할 우리의 마음을 너무 쉽게 세상에 빼앗긴 채 살아가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말에 대해 심각성과 경각심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라는 말처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무리가 많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은 이러한 심각성에 대해 전혀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대적이라는 존재에 대해서조차 무관심합니다. 이것은 적그리스도라는 존재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큰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적그리스도를 흔히 말하는 것처럼 카톨릭의 교황과 같은 어떤 특정적 인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이방인이나 어떤 세력을 적그리스도로 이해하기에 자신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배반치 않는다’는 생각으로 적그리스도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아버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별것 아닌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적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당시 적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의 사귐에 크게 방해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당시의 신자들보다 신앙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당한 유혹이고 어려움이라면 우리에게도 똑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동일하게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에 대해 쉬게 생각하고 간과할 수 없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복음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즉 다른 복음을 제시하여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교회를 출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식의 방해가 적그리스도의 활동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적그리스도입니까? 2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그렇다면 이제 적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미 이 부분에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놓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들은 예수 믿기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방인들, 또는 타종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만약 적그리스도가 이런 존재였다면 사도 요한이 이처럼 심각하게 적그리스도에 대한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도 동일합니다. 적그리스도가 이방인이나 타종교인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사도 요한의 말은 우리에게는 전혀 심각할 것도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지금 현대 교회가 이방인이나 타종교인들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빠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들고 신자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또한 그들로 인해 신앙이 위기에 처할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적그리스도는 교회 내에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마태복음 24:24절에 보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로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거짓 그리스도나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적그리스도도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표적과 기사로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는 도구로 이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고 해서 적그리스도라는 것이 아닙니다. 표적과 기사는 사도들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예수님을 증거했을 뿐입니다. 표적과 기사로 인해서 무리들이 자신들을 높이려고 할 때는 가차없이 그들을 피해버리거나 자신들도 사람에 불과할 뿐임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거짓 그리스도는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높입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적그리스도는 기독교 내에 강하게 만연되어 있는 심각한 세력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부인한다’라는 말을 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행하신 일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일을 부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일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벽히 증거 되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인데, 한가지 더 알아야 하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는 전혀 무가치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이렇게 하면 복 받습니다’라는 말을 하거나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것을 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믿음의 이러한 면에 대해서는 간과해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라는 껍데기만 가지고 있고 그 내용물은 전혀 다른 것으로 채워진 결과만 가져올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11:4절에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사도가 전파한 예수님만이 참된 예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어떤 예수님을 전파했는가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을 친히 만났고 그 말씀을 들었던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듣기보다는 사도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에 대해 말하거든 ‘과연 사도가 이러한 예수님을 말했던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적그리스도에게 미혹 받지 않는 길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아가고 성경에 계시한 예수님 위에 굳게 서서 가는 것이 진리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심각성은 세상의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의 생각에 맞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배우고 경험한 상식 말고 성경에서 가르친 복음이 상식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오직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다면 여러분이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야 말로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이김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