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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난의 담을 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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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고난의 담을 넘자 
 
제법 오래 전 일로 기억한다. 서울의 극장가 주변에서 크게 화제가 됐던 한 편의 영화가 있었다. ‘포레스트 검프’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크게 대박을 터뜨린 것은 아니었으나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명장면 몇 개를 선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태어날 때부터 불행을 안고 태어난 사내, 그가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다. 지능지수가 모자라 그를 받아주는 초등학교가 없어 이곳저곳을 헤매야 했고 소아마비로 불편한 다리를 지탱하기 위해 보조기구를 착용하지 않으면 혼자서는 걸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야말로 세상 누구에게나 있을 수는 있지만 그리 쉽게 찾아보기란 어려운 무거운 고난의 짐을 진 특별한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결국에는 미식 축구선수로까지 성공하고 월남전에 파병이 되어서는 포탄이 비 오듯 퍼붓는 전장에서 자신은 물론 전우의 생명까지도 구해내는 용감함을 보이는 휴먼 드라마였다. 한마디로 요약을 하자면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넘기 힘든 고난의 담을 혼자만의 의지로 뛰어넘는 연약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오늘 우리 앞에 놓인 고난의 담을 넘어 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의 일치된 생각이라고는 말하기 어렵겠으나 지금 한국교회 앞에는 결코 얕보아서는 아니 될 고난의 담이 가로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그것도 이단이나 사이비도 아닌, 또 사회질서에 반하거나 전통의 미풍양속을 해하는 일도 없는, 일찍이 이 나라의 근대화 사업을 이끌었던 한국의 기독교가 근자에 들어 이렇듯 세상의 웃음거리로 전락해간다는 것은 이것이 곧 고난의 담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이런 고난의 담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먼저 명확한 답을 요청한다. 기독교의 인사들 가운데는 더러 ‘별 미친 소리한다.’고 한마디로 일축할 사람이 대다수일 것으로 예상이 되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를 둘러싼 냉소는 과거 초기의 기독교가 핍박 받던 시절 로마 황제의 칼날보다도 더 예리한 날을 세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항간에 교계의 인사들 사이에서 적지 않게 들리는 ‘어디 가서 목사라고 신분을 밝히기 부끄럽다’는 푸념 속에는 그만큼 목회현장에서의 고난이 배어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위기를 맞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헌금이 줄어 교회를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어려움은 그래도 감내할 수 있겠다 하나 주변의 시선은 점점 싸늘해져가고 따라서 새신자 전도의 담은 점점 높아만 가는데 재정이 든든한 주변의 교회들이 금전과 물량을 앞세워 그나마 있는 신자까지 빼가는 이른바 ‘신도 쟁탈전’이 점점 노골화 되어 간다는 것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도 높아만 가고 있다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엄청난 고난의 담 앞에 서야 했던 포레스트 검프가 성공하기까지에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수없이 전개된다. 그렇지만 한 가지 그에게 있어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언제나 정직했고 정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다. 그가 쇠다리(보조기구)를 벗어던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불량배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직 한 길로 달음질하였던 것밖에는 없다. 어느 순간에 그는 자신도 보조기구에 의존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고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자신을 지켜주는 하나님에게 감사했고 꼼수를 모르고 오직 정직하게 한 길만을 달려온 것이 그의 성공의 비결이다.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에서 고난의 담이 보이지 않는 자들에게서야 더 이상의 기대를 갖는 것이 무리이겠으나 그렇지 않고 고난의 담이라는 현실이 보인다면 우리는 이 담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를 깊이 묵상해야 할 시간이 이르렀다고 본다. 성경에서는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편18:29) 라고 절박한 상황에서 고난의 담을 뛰어넘는 자가 가져야 할 정신적 덕목을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이 말씀처럼 ‘주를 의뢰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고난의 담을 넘어가기를 원하고 있는가 염려 되는 바 적지 않다.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하려 들고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책임을 나누어지기 보다는 회피하려고 보는 추악한 모습을 곧잘 연출하는 오늘의 기독교를 향해 세상의 사람들이 냉소를 보내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고난이 의미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의 담도 적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그 고난의 담이 무엇으로부터 왔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 말씀 때문에 받는 고난, 올바른 믿음의 삶으로 인하여 받는 고난이라면 축복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받는 고난은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자초한 고난이기에 고난의 담을 넘기 위하여는 보다 말씀에 충실하고 의지하여야 할 것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벧전5:8) 하신 말씀을 다시 기억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지하지 않고 돈으로 권력을 사려던 꼼수를 회개하고, 거짓으로 성도들을 미혹한 사술(詐術)을 회개하고, 섬기려 하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 했던 교만을 회개할 때 고난의 담을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 크리스챤연합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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