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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종병기 ‘활(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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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 ‘활(活)’

- 백소영 교수 (이화여대)           


순전히 ‘활’의 의미가 궁금했다. 평소 영화관을 싫어하는 내가 실로 6년여 만에 상영 중인 영화를 보겠다고 불현듯 학교 앞 영화관에 들어간 이유 말이다. 부담스럽게 큰 스크린과 큰 소리가 싫고 무엇보다 깜깜한 게 싫어서 웬만해서는 극장을 찾지 않는 터였는데, 그만 제목에 끌렸다. 그냥 ‘활’이었으면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종병기 활’이라…. 실은 직감적으로 ‘활’의 이중적 의미가 읽혔다. 앞의 ‘병기’라는 친절한 설명이 무색하게 난 그 뒤의 ‘활’에서 ‘생명’ ‘살림’을 뜻하는 ‘활(活)’의 그림자를 읽었다. 하여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는지도 모르겠다.

‘활’이 그리 치밀하고 놀라운 줄 예전엔 몰랐다. 극중 주인공인 남이가 숲에서 남몰래 곡사(화살이 휘어져서 목표물에 당도하게 하는 기술)를 연습하는 장면을 보다 보니, 헤엄치듯 날아가는 화살의 꼬리도, 소리도, 선도 모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팔딱팔딱 생기 차게 뛰는 생명을 끊고 소중한 목숨을 빼앗는 ‘병기’로 사용되는 활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병자호란이 배경인 이 영화에서 ‘활’은 아름답게만 그려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나 침략자의 활 ‘육량시’는 그 육중한 무게와 파괴력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의 생명을 난폭하게 앗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 영화의 주인공인 두 남자 남이와 쥬신타의 활은 조금 다르게 비쳐졌다. 그 어떤 아름다운 묘사로도 ‘병기’인 활을 미화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의 큰 줄거리에서 이 두 전사는 주로 자신에게 소중한 이들을 살려내기 위해 활을 쏘았다. 활 하나 달랑 들고 적의 심장부로 뛰어 들어간 남이의 활은 말할 것도 없이 인질로 끌려간 하나 뿐인 여동생을 ‘살리려는’ 활이었다. 적장 쥬신타의 활도 자신의 조카인 왕자와 소중한 부하들을 ‘살리기’ 위한 활로 강조되었다. 

동등한 카리스마와 용맹스런 모습으로 쌍벽을 이룬 둘이었건만, 그래도 마지막 쥬신타의 죽음에 관객들이 안도의 숨을 쉬며 이 영화를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까닭은 남이가 조선인이요, 쥬신타가 만주인이기 때문은 아니다. 쥬신타의 마지막 활은 살리기 위한 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카도, 부하들도 모두 잃은 그가 남이를 ‘죽이려’ 분노로 날린 복수의 화살이 어찌 누이를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활을 이겨낼 수 있을까?

“두려움은 직시하면 그만이고,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라 했나? 남이의 마지막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큰 울림이 있다.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 없음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직시하는 것이요, 옳음을 위하여 역경을 극복하는 것이니까. 예수가 채찍질을 당했을 때도, 골고다를 오르는 순간도,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도 그는 ‘영적인 신’이었기에 진정으로 두렵거나 고통 받지 않았다는 영지주의 기독교의 가르침이 ‘틀렸던’ 이유가 거기 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어찌 죽음이 두렵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그 죽음의 두려움을 직시하며 내 앞에 거세게 부는 바람(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는 최후의 힘은 ‘살리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 이유로 예수는 십자가를 극복했고, 남이는 불리하게 불던 바람을 극복했다. 우리 앞에 바람 불지 않기를 기도하는 대신, ‘살림’(활)을 위해 바람을 극복할 힘을 달라 기도할 일이다. 활(活)이 우리의 ‘최종병기’이기에.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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