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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날, 손기철 장로의 집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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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손기철 장로의 집회 이야기

총신대 김지찬 교수 인터뷰를 보고 
 
- 송영옥 작가(영문학 박사, 대신대 외래교수). 


본지에 ‘송영옥 박사의 기독문학세계’를 연재중인 송영옥 교수(대신대)가 왕의 기도 논란과 관련해 손기철 장로의 집회에 참석했던 소감을 보내왔다. 다음은 그 전문.

두어 해 전 대구의 한 장로교회에서 <성령님 고맙습니다>의 저자 손기철 장로를 강사로 부흥집회가 열렸다. 시작 시간은 7시 쯤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다섯시에 출발을 하였다. 집회가 열린 교회까지는 집에서 불과 30분 거리인데, 무려 1시간 반을 남겨두고 차를 몰고 나오게 된 것은 전날 참석했던 직장 동료가 손 장로의 설교를 들으려면 두 시간 이상 남겨두고 출발해야 한다고 말해준 때문이었다.

가는 길 도로변에는 경찰차들이 진을 치고, 도로 한가운데 신호가 바뀌는 곳마다 자원봉사대와 경찰들이 교통 통제를 하느라 진땀을 뺐다. 나는 그 틈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였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행렬 때문에 회전도 유턴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 혼잡은 추석명절의 대 이동을 방불케 하였다.

교회에 도착한 것은 8시쯤, 여러 개의 출입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이곳에서 제일 큰 교회인데도 부속 건물들도 모두 만원이 되어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었다. 나는 주위를 빙빙 돌다가 구석에 있는 문으로 두 사람이 휠체어 탄 남자어른을 밀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뛰어갔더니, “장애인 외에는 출입금지” 이라 적혀 있었다. 나는 망설일 여유도 없이 그 문을 밀고 일행인 것처럼 따라 들어갔다. 바로 강대상 뒤쪽으로 통하는 곳이었다. 실내는 꽉찬 사람들과 그 열기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다. 손 장로의 설교는 이미 중반쯤 접어든 것 같았다.

서두에 제시한 것처럼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총신대 김지찬 교수의 인터뷰 기사 때문이므로 여기서 잠시 그 내용을 제시함이 바람직할 것 같다. 김 교수는 <성령님 고맙습니다>를 지난 8개월 동안 매진하여 연구하였고 그 결과 몇 가지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그 중 지금 내가 쓰는 글과 관련이 있는 부분만을 보면 “한국교회의 방언과 은사 집회의 광풍 중의 하나인 손 장로의 집회에 대하여 많이 우려하고 있다고 전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도, 칼빈도, 루터도 방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 손 장로의 집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이 과연 일어난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기적의 현상들이 항상 성령의 역사인지 알 수 없고, 손 장로는 객관적 계시인 성경보다 주관적 직접체험을 강조한다는 점”을 들었다.

다시 그날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여느 부흥집회에서 볼 수 있듯 손 장로 역시 말씀 선포가 끝나고 치유를 위해 통성기도를 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말씀에서 받은 감동이 컸기 때문인지 통성기도의 부르짖음과 절규로 예배당이 떠나갈듯 하였다. 나는 물론 내 앞뒤 사람들은 모두 방언으로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손 장로가 방언기도를 하지말라고 했다. “방언으로 기도하지 마시오.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자신이 인식할 수 있도록 이야기 하십시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가장 격앙된 통성기도의 순간에 사람들이 감정에만 사로잡히면 그 틈을 타서 악한 영이 역사할 수도 있어서가 아닐까. 이건 전적으로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주관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방언을 해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통성기도가 진행되는 동안 손 장로는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을 병명으로 열거하였다. 그 중 한 마디가 ‘오늘 저녁에 휠체어를 타고 온 그 사람을 성령님 치유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긴장되었다. 그 사람은 강대상 뒤쪽으로 들어왔고 손 장로는 볼 수도 없었을 것인데, 또다른 사람이 왔는가… 등등 이러한 생각으로 잠시 고개를 들고 두리번 거리며 찾아보았다. 울부짖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왠지 마음이 찡해왔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 , 그리고 그들이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데 내 마음이 왜 그렇게 아팠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도 모든 병든 이를 위해 함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손 장로는 통성기도를 중단시키고 마무리 기도를 드린 후 병을 치유받은 사람은 모두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까 그 휠체어의 남자가 벌떡 일어나 손 장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강대상으로 올라갔다. 손 장로는 그들을 안수하고 축복하였고 그날의 집회는 끝이 났다.

물론 나는 그 남자에게 일어난 기적이 김 교수 말대로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은 ‘성령의 역사는 성경에 근거해 일어나는 것이고 예수의 생애 33년을 통해 계시된 로고스의 객관성을 드러냄’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드러냄은 로고스를 레마로 체험한 사람들을 통해서이다. 로고스(Logos)를 레마(Rhema)로 체험한 사람은 반드시 성경의 통제 하에 있을 수 밖에 없다.

나는 손 장로가 집회 도중 사용한 용어나 자신을 지칭한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을 못하겠다. 내 말의 의미는 김 교수가 지적한대로 그의 말이 “성령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정보”라든가, 자기 자신을 가르켜 “성령이 가르쳐주는 지식의 말씀을 받는 자”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게는 그러한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손 장로는 집회 내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머리로만 아닌 몸 전체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강조했다.

기도를 할 때도 하나님의 영과 사탄의 것과 자기 자신의 생각을 구분하여 간구할 수 있도록 마음문을 열고 주님을 기다리라 했다. 즉 그의 초점은 삶의 현장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다시 말하면 로고스를 레마로 체험하는 데 있었다.

지금 손 장로의 집회와 관련하여 이미 예장 합동측에서는 집회 참여 금지조치를 내리려 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지금 예장합동 측에 속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써야겠다고 결정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신학을 모르는 사람도, 그리고 교단이나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평범한 크리스천에게도 깨달아지고 그 깨달음이 그 사람의 인격을 바꾸고 그런 사람들이 이웃과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데 보이지 않으나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손 장로의 집회에서 이러한 생명력을 확산하는데 작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누가 어떻게 규정하든 그들은 생명을 체험한 사람들만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횃불처럼 그 생명력을 펼치며 전진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손 장로의 집회에 대하여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를 밝히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신학자이든 교단의 지도자이든 간에 그 집회에 참석하여 스스로 경험한 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진위를 판단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레마의 생명력은 어떤 통제로 부터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신학에도 전통교회의 가르침에도 통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모든 것을 인내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며 책임을 감당하며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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