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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국교회의 과제와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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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과제와 선교

- Sergei (모스크바 선교사)


필자는 지난 여름, 본 교단(예장 합동) 100주년 선교대회를 참관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고,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몇 가지 진단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타산지석으로 삼아 한국교회의 갱신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견을 함께 나눈다.

합동 교단은 전세계 100개국 이상 2천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이는 두 번째 큰 교단에 비해서도 두 배 이상으로 많은 수다. 한국에서 가장 크다고 자랑하는 교단의 선교대회는 한국교회의 미래이자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일이요, 한국교회를 이끌고 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볼 때에, 한국교회의 선교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5일간의 꽉 찬 일정으로 진행된 대회는 내용상으로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큰 틀로 구성되었다.


대회 풍경

대회가 매우 길어서 특별한 내용이 있는가 하고 매우 큰 기대를 하였다. 그런데 실상은 매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대회이건 주된 내용은 예배와 강의를 기본으로 한다. 프로그램은 대체적으로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으며, 특징이 있었다고 하면 매 예배시간마다 축사와 격려사를 비롯하여 등장 인물들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특별한 것이 없는 인사말에 불과한데 왜 그렇게 많은 인사들이 얼굴을 내밀고 등단을 하는 것인지, 교단 주요 인사들의 얼굴 내미는 장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착각을 할 정도였다.

내용이 있었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대회의 성격상 선교의 전문가를 불러다가 교단 선교 100년의 실상을 냉철히 살피고 전략과 전술, 대안을 함께 찾아나가는 대회가 되었어야 했다. 이러한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 일반적인 강의를 세계에서 달려온 선교사들에게 전달하였으니, 이 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앞으로 세계 선교를 주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왜 한국 선교가 세계 제일이면서도 세계적이지 못하고, 세계 속에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어쩌면 한국교회 리더들의 답보적인 사고방식과 권위주의, 소통 부재, 천박한 윤리의식, 수구주의, 정치세력화,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하는 수작들, 재정에 대한 청지기 의식 부재, 현장의 필요와 문제점 인식 부족, 한국 선교의 나아갈 방향 상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전문성을 결여한 상식의 수준에서 말하고 다루어지고 있으니 그렇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진행자들에게 물으면 매우 훌륭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강의와 프로그램이었다고 할 것이다. 입장이 다르기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지만, 주인공인 참석자이자 현장 지휘자로서는 전반적으로 별로 들을 것이 없었다는 생각이다. 몇 강의는 깊이 있는 내용이 있었지만 대부분 충격도 없고 도전이나 새로운 생각을 던져주는 것도 없는 맹탕한 강의였다고 평가하면 매우 불쾌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참석자들의 대부분의 평가도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백주년 선교대회를 진행한다는 것은 교단 선교의 한계요 매우 정치적인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교단을 넘어서면 탁월한 강사들이 넘치고 100주년을 빛낼 인재들이 수두룩한데, 정치적으로 나눠먹기식으로 하나씩 맡아서 강의하고 순서를 진행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라 본다. 대회의 주인공이었던 선교사들은 그야말로 들러리가 됐다. 위로와 격려는 매 순서마다 반복되었지만, 그 많은 재정이 투입되고 매일 저녁 헌금한 재정을 운용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들의 잔치를 벌이는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는 생각, 씁쓸함은 무엇일까?


울타리

한국교회는 교단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 교단이라는 것은 시대에 뒤처진 조직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의 시대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하여 성도들이 교단의 벽을 넘어 자유자재로 훌륭한 목사의 메시지를 청취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오직 정치를 일삼는 사람들만이 교단을 강조하고 틀을 유지하면서 득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알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이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철옹성 중동에도 개혁과 변화의 바람이 분다. 그러나 가장 고착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곳이 바로 교단이 아닌가? 이번 대회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변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를 버리고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진보니 자유주의니 하는 원칙 없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정지된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은 한국교회를 위하여,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울파, 아볼로파 운운하였던 초대 고린도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하여 바울의 외침은 매우 합당한 것이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오늘 한국교회를 향한 외침이 아닌가?

이제 교단의 교리나 정치도 성도들과 선교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유익한 것이 그다지 많은 것 같지 않다. 교단의 특성을 살리는 중요한 일들을 제외하고 여러 가지 부분에서 개방과 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기만의 갇혀 있는 울타리를 벗어나 교단의 위상을 새롭게 정리하여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시대가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단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였기에 프로그램이 제한을 당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든다.


리더십-조율

리더십이라는 것은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주어진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관리·지도하며, 조화를 이루어가도록 조율을 하는 것이지,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여 시간과 재정을 맘대로 사용하고 지출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직분을 남용하여 자기의 위세를 자랑하고 명예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리더십은 많은 경우 이러한 부분에서 실격하였지 않는가 생각이 든다.

자기 유익이나 정치적인 목적에 의하여 인재들을 버리고 축출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자기들에게 순종하는 사람만 기용하는 것은 정치 세계에서 없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러한 정치가 합당치 않다.

신앙세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정직함을 상실하면, 자기 의가 드러나면, 더욱 추한 집단이 될 수 있다. 섬김의 리더십, 헌신의 리더십, 낮아짐의 리더십은 어디 가고 자기의 이름을 내기에 바쁘다면 이것이 무슨 리더인가? 이번 대형집회에 이러한 리더십이 보이지 않아 매우 유감이었다.


청지기 의식 결여

성직자를 비롯하여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가장 시험이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돈과의 관계이다. 지금까지 각 선교부는 투명성을 운운하면서 선교사들에게 보고서를 작성하고 재산목록을 작성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몇몇 유명 인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재산이라고 할 것이 많지 않다.

대교단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방향을 제시하고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타 기관에 이정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투명성을 요구하는 본부가 아닌가? 기천 명의 재정을 관리하는 인사들의 무의식이 문제인 것이다. 퇴직연금이며 안식년기금이며 의료기금이며 모인 재정이 많아서 문제인데, 내 돈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공금에 대한 청지기 의식이 많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장 헌금을 안 하는 인간들이 교회 재정을 가장 많이 운용하는 일이나, 교회 재정을 개인 것처럼 유용하는 태도나, 은혜로 처리하는 일들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기본 절차를 무시하고 공금을 유용하는 것은 사회법을 위반한 공공의 죄이다. 이러한 일들이 버젓이 진행되고 있다면 그것은 정직을 상실한 종교단체로,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개인의 이익이나 정치적 활동, 허탄한 생각으로 수억씩 집행하고 투자하는 일들이다. 교회는 내부의 형식적인 감사 외에 공적인 감사기관이 없다 보니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좀 심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이제는 외부감사를 청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자정능력을 상실한 교회들에게 대안이 아닌가? 책임 있는 관리와 지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통의 위기: 불통, 먹통, 침통, 분통

민주사회, 성숙한 사회의 장점 중의 하나는 토론과 대화를 통한 소통이다. 이러한 절차를 무시하고 모든 일을 다 추진하고 처리하고 나서 정당성을 주장하여 나가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약하다. 이러한 일은 탄핵의 대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인 것을 기억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

본부의 정책이나 이사회의 중요한 결정 소식을 신문을 통하여 소식을 접하는 것은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사자들은 모르는데 신문에는 결과가 발표된다는 것은 심각한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민주사회의 특징 중의 또 하나는 정보의 나눔이다. 과거사회는 많은 정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자산이었고, 중요한 일이었다. 오늘의 사회는 정보의 소유가 아닌 나눔이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 공유하고 나누고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문제는 누가 더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느냐에 달려 있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정보 공개가 원칙이다. 모든 진행되는 과정이나 의논할 사항이 있으면 공개 질문을 하고 의견을 수렴하여야 한다. 인터넷 시대에 언제든지 정보를 살피고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건강하고 바른 것이다. 소통이 없는 세대는 이미 죽은 세대이다.

일방통행의 시대는 과거 권위주의 산물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일방통행식의 행정이나 결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일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선교사들의 목소리를 한 번도 청취하지 않고, 오직 이사들이나 임원들의 결정에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조직이라면, 선교사는 한국교회 부목회자 정도의 취급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가 후원하고 있으니 말을 잘 듣고 순종하라는 생각이라면, 협력관계가 아닌 주종관계이다. 동역의 관계가 아닌 상하 수직의 관계이다.

이사회는 선교사들의 사역을 지원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단체이다. 그래서 모든 결정사항은 최종적으로 선교사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의논하고 결정하고 진행하고, 현장의 선교사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신문을 통하여 진행된 사항들을 알게 된다면 이것이 무엇인가? 상식의 수준에서 생각해 보라.

행정의 공개와 투명화, 소통 행정, 본부의 모든 논의나 결정은 선교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공개 될 수밖에 없다. 선교를 위한 논의였다면 더욱 더 현장 선교사들이 알아야 하고,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현장을 배제하고 본부에서만 의논하고 결정하고 시행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해온 것이 아닌가?

선교사들은 본부의 행정이나 비전을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참여 권리가 없다. 현장에 있는 실무진들이 현장의 일을 결정하지 못하고, 책상 앞에서 이사진들이 결정을 하는 기형적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교단 선교의 모습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언론플레이를 하는 모습은 세속정치꾼들이 하는 짓과 똑같다. 오히려 기도하면서 행하고 있으니 하나님을 빙자하여 악을 행하는 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자기들에게 필요한대로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어찌 악하다 아니 할 수 있겠는가? 한국 선교에 대한 이미지 실추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몇몇 사람들의 농간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도 된다는 것인가?


전략의 위기

전략이 없는 모든 행위는 사치와 허영에 불과하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함께 묶고 구분하여 전략을 세우고 제시하는 것이 본부의 역할이다. 그 전략에는 분명한 목적과 효율성이 있는지, 그리고 합리적이고 신앙적인지를 냉철하게 살펴야 한다. 감정에 충실한 단순전략이라든가, 리더십이 바뀜에 따라 전략이 바뀐다든가 하는 것은 매우 미숙한 것이다.

전략에는 관리 문제를 포함하여야 한다. 러시아에서 많은 문제가 되는 것 중의 하나는, 무조건 큰 건물 사고 짓다가 나중에 관리가 되지 않아서 애를 먹는 경우다. 무조건 큰 것만 좋아하고 화려한 것만 좋아하는 병적인 한국인의 태도가 세상을 병들게 하고 망하게 하는 것을 모르고 있나 보다. 아무리 크고 좋은 것이 있고 공짜가 있다 하여도, 왜 필요한지 무엇에 사용할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덥썩 붙잡을 필요가 없다.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무조건 붙잡아 놓고 보려 한다면 그것이 사망을 가져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전략은 이미 다 제시되었다. 현재의 이슈가 되고 있는 협력의 문제나 지역재배치나 미전도 종족 전략이나 미복음지역 전략, 디아스포라 전략 등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다 필요에 의해 혹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모두 제시되었다. 분명한 것은 이해되었지만 어떻게 실행하고 문제들을 풀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는 것인데, 항상 이것이 문제이다. 대안 없는 제시는 기본 교육만 받아도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현실의 필요와 더불어 미래를 위한 투자가 분명하여야 한다. 기본도 되지 않았는데 미래에만 투자한다든지, 현실에 묶여 미래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면 모두가 선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선교는 의식의 전환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선교를 하나의 부흥의 일환으로 혹은 선교지 방문을 위한 발판으로, 유행을 따라 생각 없이 하여서는 안 된다. 이제는 이 정도 수준을 벗어나야 할 때도 되었는데, 오늘의 한국교회, 과제를 생각하고 대안을 찾는 일에 집중할 때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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