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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직한 사람 : 바돌로매 (요 01:43-51)

첨부 1


1.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제자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일종의 개인적인 휴식처였다.
무화과 나무는 약 4m의 높이로 자라고 가지는 사방으로 7m를 덮는다.
대부분의 집들은 방을 하나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하게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 그늘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다.

2.이름의 뜻(Batholomew Nathanael)1)바돌로매그는 왕족의이름을 따서 지었으나 실제로 는 귀한 신분은 아니었다.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이다.
2)나다나엘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데 다른 제자 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어 주 셨을 것이다.

3.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을 동일 인물로 생각하는 이유
마태, 누가, 마가과 사도행전은 모두 바돌로매를 열 두명의 사도 가운데 여섯번째, 또는 일곱번째로 들고 있으나 나다나엘이라고는 하지 않았다(마10:3/막3:18/눅6:14/행1:13).
요한복음은 바돌로매라고 쓰지 않았지만 나다나엘을 사도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키고 있으며(요1:45-51) 갈릴리의 가나 지방에서 온 어부의 한사람으로서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다.(요21:2).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모두 열 두 사도 가운데 들어 있다면 동일한 인물로 지칭되어야 한다.
나다나엘(바돌로매)괴 빌립의 관계가 매우 가까운데 문제의 초점이 있다.
앞에서 말한 사들의 명단을 보면 세 군데에서 항상 바돌로매는 빌립과 짝을 짓고 있다.
요한은 나다나엘(바돌로매)과 빌립은 친구였으며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 데리고 갔다고 한다.

본 론

1.나다나엘은 성경을 상고했다.
1)나다나엘은 묵상했다.
무화과 나무 밑에 있는 나다나엘을 보신 예수께서는 “너 혼자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친구들은 그가 배에 없으면 정원의 무화과 나무 아래서 그를 찾았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신앙깊은 사람임을 알고 계셨다.
죄를 짓지 않는 정직한 마음은 무화과 나무 밑에서 늘 묵상하는 나다나엘의 습관에서 생긴 것이다.
이처럼 조용하게 묵상함으로써 나다나엘의 영은 새로와지고 그 성품은 강건해졌다.

(예)
우리는 시끄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십대의 아이들은 귀가 아프게 라디오와 녹음기를 틀어 높으며 어른들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텔리비젼을 켠다.
우리는 또 매우 바쁜 세상에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에서 필요한 것은 시속 100km이상 달리는 스포츠카와 흔들의자“라고 비꼰 일이 있다.
나다나엘 시대의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절실히 필요한것이다.

누구든지 조용하게 생각하고 기도할 장소를 가져야 한다.
이삭은 한밤중에 들로 나갔다.
엘리야는 동굴 속에서 하나님과 친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고백록을 보면 어거스틴은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을 피하여 살다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된 후 은밀한 곳을 추구했다.고 쓰여 있다.
그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어느 무화과 나무 밑에 던져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 홍수와 같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회개했다.”

2)나다나엘은 기도했다.
무화과 나무 그늘은 나다나엘이 기도하는 장소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인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해주며 하나님의 능력은 절망적인 세상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철저하고 규모있는 기도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제목과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은밀한 곳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빈방을 기도장소로 마련하기도 하고 어떤 가족은 기도실의 벽을 막아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3)나다나엘은 성경을 연구했다.
나다나엘은 묵상하고 기도하는 열성 이상으로 성경을 연구했다.
그는 메시야의 약속을 찾으려고 구약을 공부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했다.(요 1:45).
빌립의 말은 메시야를 찾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서 율법과 선지자를 연구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빌립이 나다나엘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무화과 나무 밑에서 구약성경을 펴들고 메시야의 강림을 생각하고 있다.
성경이 세계의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에 순전한 호기심에서 읽기도 한다.
성경의 문학적 가치 때문에 읽혀지기도 하며 우리가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기도 하므로 읽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중보자이며 구속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곧 성경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라고 말씀하셨다.
시므온이나 안나와 마찬가지로 나다나엘도 메시야의 약속을 믿었다.
나다나엘은 성경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찾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즉석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었다.

2.나다나엘은 회의론자였다.
메시야를 만난 사실을 열심으로 설명하는 빌립에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나고 물었다(요 1:46)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으로부터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왕의 옷을 입은 위대한 정복자가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부터 올까
혹은 미가가 메시야의 출생지로 예언했던 베들레헴으로 부터 정복자가 올까
나다나엘이나 다른 제자들이 예수에 대한 나사렛의 배경을 이해한 것은 부활과 다락방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알고난 후의 일 일것이다(마 2:23/눅24:44-48)
나다나엘은 회의를 품으면서도 정직했다.
나다나엘은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사렛으로 부터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티끌만한 암시도 받지 못하였다.
이 처럼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다. 성경을 바르게 읽지도 못할 분아니라 바르게 해석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정당화를 위해 성경을 끌어와서 해석한다.
정직한 회의론은 빛과 진리에 이르는 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나다나엘의 결심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뒤에 예수님의 적들은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해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2)고 했다.
이들의 편견은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인격과 위엄을 가리우고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한편 나다나엘의 정직한 회의론은 더욱 상고하여 빛을 찾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의 개방성은 그의 성실한 정직한 마음은 가서 직접 보기를 원했다.

3.나다나엘의 큰 발견
두 사람은 빌립이 예수와 헤어진 장소로 갔다.
빌립은 속에서 안달이 났고 나다나엘은 좀 흥분했다가 깜짝 놀랐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다나엘의 모습은 이 말씀에서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다.
1)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의 씨가 있으니 하나는 육신의 자녀이며 다른 하나는 언약의 자녀들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바울은 가르쳤다(롬 9:6-8).
육신의 씨들은 아브라함을 믿고 행하며 그리스도에 앞서 메시야의 임하심을 간절히 고대하던 조상들과 같은 영적 신앙을 갖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은 영적인 씨에 속하도록 하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육신을 가리킬 뿐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영적으로 함께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2)나다나엘 속에는 간사함이 없었다.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나다나엘은 교활하거나 속이는 피를 이어받지 않았다.
위선도 없고 간사함도 없기 때문에 성격은 맑은 물처럼 투명했다.
그는 어떤 말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분석하지도 않고 숨겨진 동기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의 천진난만한 성격은 사람들이 자기를 이용하고 속이는 것까지도 용인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그의 행운은 이루 말할수 없는 귀한 보석(예수)으로 인도해 주었다.
바리새인들의 교활함과 위선에 진노하고 꾸짖은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의 성격을 속이지 않고 숨겨진 동기가 없다고 칭찬하셨다.
나다나엘은 감동을 받았다.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도중에 그의 의문은 완전히 사라졌다.
당황하면서도 나다나엘은 솔직하게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질문했다(요1:48)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1:48)하시는 메시야의 시원 대답이 의문을 풀어 주었다.
확신을 가진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요1:49)라고 하였다.
베드로나 도마의 경우 만큼 의미심장하지 않을런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훌륭한 신앙고백이었다(마 16:16/요20:28)
나다나엘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가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회의론을 품고 있다가 확신을 가진 성실한 사람의 표본이라 하겠다.

4. 나다나엘은 완전히 깨달았다.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기적을 이루시며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시고 은혜가 넘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다.
기적이 성취되면 뒤이어 또 기적이 성취되었다.
귀머거리는 소리를 듣고, 소경은 눈을 뜨며, 벙어리는 말을 하고, 문둥병자는 깨끗해지고 큰 무리가 먹으며, 폭풍은 잠자고, 죽은 자는 살아났다.
때로는 어리둥절했으나 자신이 걷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먹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배신의 밤이 오자 예수님은 체포되어 고난을 받으시다가 마침내는 십자가 쳐형을 당하셨다.
이 때부터 부활이 있기까지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믿음은 완전히 죽어있는 듯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의 기적은 이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어 이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파할 결심을 하는 새로운 삶을 재촉한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닥다리며 이 사닥다리는 죄지은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준다는 것을 나다나엘은 깨닫게 되었다.

5. 생애
나다나엘은 브리기아, 헤라홀리스, 알메니아와 인도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전설에 의하면 그는 우상숭배가 심한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16년간 전도하다가 곤봉으로 맞고 살갗을 벗기우고 십자가에서 머리를 떨구고 죽은 후시체는 자루에 넣고 묶이어서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그후 그의 시신은 이탈리아 베네벤툼으로 옮겨졌고 후에 타이버 섬에서 그의 기념성전을 짔고 모셨다고 한다.
나다나엘의 사도로서의 상징은 더러는 무화과 나무이기도 하지만 칼로 살갗을 벗기웠기 때문에 그의 상징은 항상 “세 자루의 칼”이었다.
이란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가 히브리어로 마태복음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또 바돌로매 복음을 기록하여 많은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맺는 말

1.마음을 열자.
예수님이 그를 귀하게 여기신 것은 그가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전도할 때에도 아예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힘든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마음이 열렸다는 사실에서 귀한 대화의 시작이다.
자기의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지도를 부탁하는 것은 자기의 약점을 개선하여 보다 나은 단계로 발 돋움하기 위한 준비이다.
자기의 약점을 끝 까지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은 가증된 삶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자기의 굳게 잠긴 성문을 열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기도함으로 과거에 개닫지 못하던 자기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제단 앞에 자기의 문제를 가져다 놓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 속에 더러운 것이 많다.
이제부터 우리의 마음을 열자.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과 치료를 구하자.
그때 부터 교정은 시작된다.

2.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나다나엘은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 가운데 어떤 말씀의 주제가 나오면 ‘나는 배울 것이 없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무궁무진하다.
반복되는 것은 있지만 더 깊이 나를 일깨워 준다.
열린 마음은 가진 사람에게 진리는 영광스럽게 다가온다.
교회에는 안 다니지만 전에 기독교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에게 전도해 본적이 있는가
보통 ‘네 이미 잘압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성경에 대해서는 이미 끝냈습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3.깨달은 후에는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고백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께 대하여 주님으로 고백하였다.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되었을 때 달라진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무엇을 시인하는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말한다.
마음에 없는 말은 못 한다고 하지만 말을 하면 마음이 따라 올수 있는 것이다.

(예)
사랑을 고백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더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불평을 하면 더욱 한심스럽게 보인다고 한다.
참으로 고백이라는 힘은 엄청나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시인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나다나엘은 고백의 중요성과 영감있는 아름다운 고백의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간사한 것이 없고 진실하고 조용히 주님을 따라가며 생애를 주님 위해 바친 충성스러운 제자가 될수 있었다.
주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바돌로매와 같은 또 하나의 제자를 원하고 꼐신다.
주님은 성격이 다른 여러 제자를 쓰셨다.
우리는 다 똑 같을 수는 없다.
당신이 가진 약점과 인간적인 부족함이나 모순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주님은 우리의 약점과 장점을 모두 사용하시어 일하시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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