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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일을 하라 (요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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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중국의 어느깊은 산 속에 훌륭한 스승 한 분이 계셔서 여러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때는 이른 봄이라 뒷산 양지바른 곳에 새싹이 파릇 파릇 돋아 나고 있었다. 하루는 제자들이 땅에 돋아난 새싹을 보고서는:이것이 살구다 .복숭아다"하고 논쟁 이 벌어졌다.

이 모습을 지켜본 스승께선 "너희들이 지금 싹을 보고 살구냐 복숭아냐.하고 논란을 하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째서 싹이 났느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전자의 질문이 상대적 질문이라면 후자의 질문은 절대적 질문이다. 그리고 전자가 과학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면 후자는 종교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오늘 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자에 관심을 갖고 사는데 사실은 후자가 훨씬 더 중요 한 근본적인 질문인 것이다.

예를 들어 `남자냐 여자냐.'하는 질문보다 `내가 왜 태어났느냐'하는 질문이 중 요하다. 부자냐 가난하냐'하는 질문보다 `인간이 왜 사느냐'하는 질문이 중요하다. `일등이냐,이등이냐'하는 질문보다는 `내가 왜,공부를 하느냐'는 질문이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신앙)을 믿지 못하고서 거부한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모순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관점이 다를 뿐이다.

과학은 오성으로 하고 철학은 이성으로하고 신학은 직관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을 보았을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단순히 경 험을 통해서만 우리 인간을 보고서 `사람은 났다가 죽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보니 허망하고 썩어서 없어지는 것을 보니 죽으면 끝장이라는 입장을 취 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살아 있을 동안에 어떻게하든지 좀더 편안하고 풍요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 고하는 인생관을 갖게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의 삶이기 때문에 생존 경쟁의 살벌함이 세상을 만연시키고 혼란하고 어 지러운 세상이 되고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입장에서 우리 인생을 보았을 때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삶이 이루어 지며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 니요 새로운 시작이되는 축복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생사를 어떻게 보셨는가. 마가복음 10:45에 보면 "인자의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자 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세상에 태어나신 것을 "왔다"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2:17하반절에서도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에서도 주님께서는 왔다고 하셨다.

한편 죽음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4:2절에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 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간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이렇게 영적인 사람은 인생을 왔다가 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사를 초월해서 사는 것이다.곧 생사가 없는 것이다. 즉 나고 죽고가 없고 다만 오고 감이 있을 뿐인 것이다.

인생이 무엇때문에 왔는가.왜 왔는가 한마디로 일하러 온 것이다. 그러면 언제 가는가 일이 끝나면 가는 것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슨 일을 빼놓고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사람의 생애를 평가할때 그가 무슨 일을 했느냐또 어떻게 했느냐하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신앙은 생를 문제삼고 있지 않다. 진리를 문제삼고 생명을 문제삼고 길을 문제 삼고 생명을 문제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할 일이 무었이냐"가 생사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일을 위하여 살아야 겠으면 살고 그일을 위하여 죽어야겠으면 죽는 것이다.생사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 게 내가 할일이 무었이냐는데 관심을 갖고 살기 위해서는 인생을 왔다가 가는 것 으로 인생관을 설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희생과 고 통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났다가 죽는다는 안목에서 살 때에는 `일이 문제가 안된다. 오직 평안하자 놀 자주의이다. 노는게 좋다 그래서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하 는 노래까지 하게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못된 근성 중의 하나가 `일하지 않고 편하게 살자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직장이 무엇이냐하면 "일이 없고 편해야 좋은 직장이라는 식이다. 이렇게 일하는 것보다 노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한다. 놀고 사는 사람을 팔자가 좋다고 한다. 심지어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재림을 잘못 이해하고 일하기를 등한시하는 것에 대 하여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다. 이 말은 신앙적인 구실로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는 것다. 그래서 바울은 손수 일하며 전도하였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믿는 것이 곧 일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하는 것이다.

일의 특징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재미 있어야하고 둘째는 쉬워야하고 세째는 즐거워야한다. 그런데 재미도 없고 어렵고 즐겁지 않으면 일이 아니고 노동이 된다. 일하기 싫은데 억지로한다면 이는 노동이다.어려운 것을 억지로 한다면 이것은 노동이 된다.또 괴로워도 슬퍼도 어쩔 수가 없이 안할수가 없어서 한다면 이것은 노동이 되 는 것이다.

일은 즐거운 것이다.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의 삶이 천국이 된다. 그러나 노동하 는 것 은 시간이 가지를 않고 괴롭다.

EX>,발명왕 에디슨은 밤낮을 모르고 일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발명 두 주 전에 부인이 갖다놓은 밥상을 모르고 있다가 일이 다 끝난 후에야 식사를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쁨은 섬기는 즐거움 봉사하는 즐거움이다. `천하고 무능한 나에게도 귀중한 직분을 맡기셨다.그 은혜 고맙고 놀라와라'하는 감격으로 일해야한다. 보상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아니라 주인 정신으로 일하는 것이다. 엡6:7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주께하듯해야한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일하면서 사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기쁘게 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쁨ㅄ이 사는 사람들은 노동하는 사람들이요,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일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기쁘게 사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의 명절인 부림절 때의 일이다.그들은 안식일을 잘 지켰다 양문이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제물도 잘 바쳤다. 그런데 자비의 집으로 불리워지는 베데 스다 못 가에는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있었다.이것은 하나 님을 떠난 사람들의 영적인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명절에 모인 사람들은 많다 의식을 잘 지키 사람들도 많다.제물을 바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베데스다라는 자비의 이름 뿐이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없다. 남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없다. 저마다 상대방에 대하여 방해꾼일 뿐이다. 그래서 저주와 원망의 소리가 높다. 이고에 예수님께서 이르셔서 38년된 병자를 보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하심으로 새로운 삶을 그에게 베푸셨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인간의 비참하고 어두운 곳을 찾아가사 남들이 손대기 싫어하는 일을 찾아 일하셨다.이것이 바로 오늘 그리스도의 제자가 할 일이다.

기독교는 일하는 신앙이다. 창세기는 일로 시작되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일하시는 분으로 믿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항상 인간들을 위하여 역사하시며 그 역사를 쉬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의 사역은 세가지이다. 첫단계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다.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게 해 주시고 높여 주시고 지금도 지 켜 주신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해 주셨다. 두 번째 단계는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닮아 성화되게 일하신다. 우리에게 위로 와 감동을 주셔서 곁 길로 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신다. 세 번째 단계는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앞에서의 두단계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 주님께서는 각양 각색의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직분을 주시고 그사람을 통해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하시기 위하여 그 사람의 재능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자세로 살아 야한다. 동시에 어떤일을 하기 전에 반드시 이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하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살아간다는 의식을 가져야한다. 하나님의명 려을 받아 움직이는 것이 일이고 삶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제자는 주님의 일꾼이다.일꾼이란 구경꾼이 아니라 일하는 자이다. 말꾼처럼 말만하는 자가아니다.싸움꾼처럼 싸움만하는 자가 아니다. 일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고서 일의 방법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 사람들은 독주하기를 좋아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급하다고 하나님보다 앞서 서않되고 피곤하다고 하나님의 뜻보다 뒷쳐서도 안된다. 일마다 걸음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ex >.세 석공의 이야기

정말 재미는 일하는 데있지 노는데 있지를 않다.때문에 평생을 일하며 사는 사람은 행 복한 사람이요 반대로 평생을 노동하며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은 일하는 분이셨다.막10:45절에 있는 말씀대로 `내가 어떻게 인류를 구할까" 하는 데에만 관심을 집중하셨다. 마침내 그일을 마치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아버 지 께로 가셨다. 우리도 예수님럼 일하는 사람이 되자. 썩는 양식을 위하여 하지말고 영새하도록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는 성도들이 되자. 사랑이 충만한 가운데서 일하자.사랑이란 한없이 기쁜것이요 쉬운 것이다. 창29:20에 보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므로 7년을 수일 같이 일했다고 하였다. 우리도 주를 위해 일할수 없는 인생의 밤이 오기 전에 썩을 육체를 아끼지 말고 힘껏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제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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