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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몸이 다시 사는 것 (고전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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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몸의 부활
구약성경의 본래의 사상은 영과 육이 구별되어 있지 않았다. 히브리적 개념은 몸에 영과 육이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이 희랍적 사고를 통해서 영과 육으로 구분되었고, 또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영이 중요하고 육은 중요치 않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플라톤의 사상적 영향은 더더욱 육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영적인 이상을 중요시 여기게 만들었다. 그렇게 됨으로 육체는 천한 것, 썩어 없어져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영과 육은 동시에 중요하고 그것은 몸의 부활이라는 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사도신경의 이 고백은 바로 이 면을 중요한 신앙고백으로 생각하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오늘 본문은 부활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 놓고 있는 성경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심없이 부활을 믿게 되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했다면 아무리 성경에 부활을 강조해도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것이다.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은 그렇게 된다고 하는 보증을 상징화 시킨 것이다.
예를 들면, 감 나무를 심어서 첫 번째 감이 열렸다. 이 첫 번째 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제 이 감나무는 이와같은 감이 매번 열린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제 부활하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면,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이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는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기독교에 있어서 부활은 믿어도 되고 안믿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믿어야 되는 것이다. 부활의 신앙이 확실치 않으면 모든 면에서 확실치 않다. 그리스도인들이 의롭게 사느냐 진실하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부활을 믿고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더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의 삶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에 적용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두고 당시에 논쟁이 있었는데 부활을 부인하려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주장을 하였다.
① 기절설
예수님이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기절하였다가 깨어났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 로마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이것은 죽음을 확인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성경에는 물과 피를 다 쏟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특별히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고 아리마대 요셉이 시체를 인수하였다. 그러므로 기절설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② 다른 무덤에 갖다 넣었다는 주장
유대인의 무덤은 굴이다. 돌로된 굴이며, 무거운 돌로 앞을 막아놓고 있었다. 예수님의 무덤은 원래 준비된 것이 아니고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 것으로 준비한 것을 예수님을 묻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갈릴리 여인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가서 시체가 없자 부활했다고 생각하고 그런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덤을 착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③ 도난당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당시에 널리 유포되었던 주장이다. 살아계실 때 부활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당시에 따르던 무리중에 누군가가 예수의 시체를 감추어 두었다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는 것이다.
④ 환상이라는 주장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환상을 보고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간절하게 열망하면 그 사실이 환상 속에 목격될 수 도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제자들은 온통 주님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환상으로 부활의 사실을 목격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명이 한 번에 똑같은 환상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지 교회사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들이 당한 고초는 이루말할 수 없다. 굶주림, 헐벗음, 매맞음, 옥살이, 죽음을 격으면서도 끝까지 한결같이 부활을 증거했다. 확신과 분명한 체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2. 부활의 종류
① 제한적 부활
제한적 부활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부활이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어서 냄새가 나는 것을 예수님이 살렸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공동묘지에 장사지내려고 할 때에 예수님이 살렸다. 야이로의 딸을 같은 방법으로 살렸다. 죽은 자를 살려내고 부활하도록 할 때 어느 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 때와 장소를 살펴서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부활하도록 하는 부활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서 부활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재림할 때에 부활하게 되는데 이와 같이 특별한 경우에는 그것과 상관없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죽음을 살리는 사건이 있게 된다.
② 심판의 부활
심판의 부활이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부활의 장이라고 말하는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당시의 생각을 토대로 한 신앙의 양태가 나타나 있는데,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우주를 3층적으로 생각하고 모든 사람이 죽으면 일정한 장소에 가서 기다리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모든 육신이 함께 부활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도 부활해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판의 부활이다.
③ 생명의 부활
생명의 부활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인정된 그리스도인들이 영생의 나라로 가기 위해서 부활하는 것이다.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생명의 부활은 완전히 영과 육이 하나로 된 몸의 부활, 살아있는 몸의 부활,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은 어떤 형태의 부활의 종류가 있다는 하는 사실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로 우리 자신이 부활한다고 하는 사실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3. 소망의 부활
육의 부활은 끝없는 소망을 인간들에게 선물한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같은 신앙고백을 할 때 우리는 기독교적인 구원에 대한 기대가 보다 분명해지고 전체적으로 종합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변증가 저스틴은 이렇게 마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삶과 부활로 불러 내셨다. 이것은 인간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육과 영혼으로서 인간 전체에 해당된다.

우리의 삶의 영역이 형이상학적으로, 또는 종말론적 입장에서만 서게 된다면 그것은 제한된 위험이 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창조자이며 구속자의 전체적인 의지를 부당히 제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삶은 본의 아니게 왜곡된 상황에서 파악될 수 밖에 없다.
성경적인 사고는 인간과 세계에 있어서 전체적이고, 통일적 사고를 하게 한다. 하늘과 땅, 영과 육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활동무대 위에 올려 놓여진 것이다. 어느 한 쪽만 하나님의 무대이고 다른 쪽은 하나님에게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의 전체의 삶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 아래서 산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몸의 부활을 과소 평가할 수 없고, 플라톤의 영향으로 영혼불멸설이 강조되었다고 해서 몸의 부활의 의미가 약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몸의 부활은 영과 육, 정신과 삶의 모든 부분을 통털은 인간의 몸의 총체적인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살전 4:13-18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4. 부활 후
부활 후에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하는 것은 현실적을 아주 중요합니다.

계 20:11-15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죽은 자들은 자기의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길고되고 그 기록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고 하엿습니다. 그리고 그 형벌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생명의 부활을 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 세상에서 언행심사를 바로 행동한 그 행위는 높이 평가되고 소중하게 판단되어 천국에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천국은 행위의 옷을 입고 영원히 사는 나라입니다. 그 의복이 사람에 따라 존귀와 영광이 될 수도 있습니다.

5. 부활을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
①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마 25:1-13에 10처녀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다.
이 비유의 마지막에 보면 25:13-14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지막 때에 신랑은 문을 닫으면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무시 무시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성경은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깨어 준비하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② 고난 속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욥 19:25-26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것은 고난 속에 있는 욥의 고백입니다. 욥이 그 고난과 친구들의 박해 속에서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망 때문입니다. 죽은 후에 하나님을 만날 소망이 있었기에 그는 고난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소망을 가지고 고난을 이겨야 합니다.
③ 서로 위로하며, 감사하는 삶
소극적인 면에서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면에서는 고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는 말씀과 같이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셧습니다. 과연 그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첫 열매가 되심으로 우리들도 부활에 참예하게 되었습니다. 부활 신앙 가진 우리는 날마다 깨어 있으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기도하는 성도가 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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