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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니 (삼상 1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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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알스 핫돈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은 시편 59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오, 훌륭한 노래여, 지옥의 온갖 개들에 둘러싸여 내 영혼이 지금 이 노래를 부르는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 말은 이론도, 감정적인 수사법도 아니고, 영혼을 땅에서 하늘로 들어올리는 엄연한 현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 그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을 의미합니다(골3:3). 이것은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생명과 미래의 우리 생명 즉,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성육하신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있는 영광의 생명인 경우도 그렇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역사 즉, 우리의 개인적인 일상 경험을 포함하는 역사 전체가 그의 백성의 힘이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제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이 나타나서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실제로 우리에게 손상을 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보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롬8:28). 하나님은 모든 것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아래 두었으며,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엡1:22).

이것은 마치 믿음이 다른 방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으며, 종종 적대적인 사건들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심리학적인 도움에 불과하기라도 한 것처럼, 인간의 삶과 삶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인간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인식에 관한 진술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객관적 역사 과정의 주권적인 예정 자로서 뿐만 아니라, 그의 경험에서 성령 및 자기 백성 안에 내주 하시는 분으로서도 신자의 힘이 되십니다. 물론 이 표현의 역(逆)은 불경건 함과 불신앙을 그들이 믿고 있는 것으로부터 스스로 주관적으로 창조해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자신들의 삶과 그들의 개인적인 역사적 사실들의 의미에 대해 확증할 수 없는, 주변의 야만적이고 막돼먹은 현실에 노출된 채 홀로 있다고 느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확신과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의미 있는 것 즉, 단순한 실존을 넘어서는 어떤 목적과 무덤 이외의 다른 미래가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세속적인 사람은 세속적 휴머니즘에 함축되어 있는 강한 무신론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프랭크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는 이렇게 빈정거렸습니다. “무신론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도움의 수단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 그래서 현대인은 사람의 의미를 찾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도움의 수단”을 통해 위로를 얻기 위해 신세대의 신(新) 우상숭배 사상이나 신비주의적인 동양 종교에 심취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의미와 목적을 더해 주는 유일하게 참된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의미와 목적, 즉 죄인들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새 생활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신자들의 피난처요, 힘으로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참된 자녀의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시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46: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시46:3)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셀라)

신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불 확신성과 적대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들에 이용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행하든지, 잠언에 언급되어 있는 왕처럼 그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습니다”(잠21:1). 그는 자기 백성을 다스리고 사랑합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창을 던졌으나, 다윗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목적은 방해받는 대신 오히려 촉진되었습니다. 신자들은(그리고 그들만이) 불확실하고 사악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인간들 앞에서 자신 있게 살아갈 만한 성경 적인 근거를 지닙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의 진노를 여러 차례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러한 진리를 아름답게 예증해 주며, 그것을 도처에 있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특권으로 확증해 줍니다.

요나단의 신실성(19:1-7)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그의 원수였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에 직면하여 그는 취악한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사울 가문, 심지어 사울 자신으로부터 다윗을 구원할 도구들을 끌어내셨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일 결심을 하고 아들과 신하들에게 이 일을 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19:1). 그러나 다윗과 우정을 맺고 있던 요나단은 그에게 경고를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울에게 간구 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그가 아버지와 만나서 이야기하는 곳 근처에 숨어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요나단이 다윗과 공모했다는 의심을 받지 않고 그에게 대화의 내용을 알려 주기 위해 이렇게 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다윗이 사울의 말을 엿듣고 스스로 사울의 태도를 판단하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순간 사울은 과장되게 가장 경건한 말투로 다윗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맹세했습니다.(19:4-6). 하나님은 사울의 살해 의도를 억제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잠시 동안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19:7). 이 사건이 이렇게 간단히 끝났더라면, 우리는 사울의 마음을 변화시켜 다윗과 화해하게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성품과 그의 미래에 관한 사무엘의 예언을 생각하고, 우리가 사무엘상을 미리 읽어본 바에 따르면, 우리는 그의 영적인 상태가 죄로 약해졌다는 또 다른 슬픈 암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의 화해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그의 엄숙한 맹세는 덧없는 희화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나 사실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물론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매우 복잡한 인간의 본성을, 그리고 특별하게는 인간의 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그들의 “아비” 곧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해 있으므로 그와 그의 메시지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고 말했습니다.(요8:44).

사울도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건한 맹세를 그렇게 쉽게 했다가 단숨에 그 맹세를 위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회개는 그의 죄보다 더 나빴습니다. 이처럼 행동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실제의” 사울은 환영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도 어느 사울이 실제의 모습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선하게 가지려 한다고 믿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반항과 회개 사이에서 계속되는 동요는 그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위선자로 선언하지 못하도록 만들뿐이었습니다. “실제의” 사울은 어느 한쪽이 아니라 둘 다였다고 대답하는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성경이 그에 관해 기록한 바에 따르면 그는 모순되는 말과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가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은 옳고 그름에 관한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두려워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며, 게다가 정치란 가능성의 기술임을 알 정도로 지력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본래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아니한”사람들이며 (고전2:140. 우리가 성령에 의해 다시 태어나서 회개하고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면(요3:3-7) 행3:19) 더욱 나빠질 뿐입니다(롬1:18-32). 변화 받지 못한 죄인은 혼란에 빠질 뿐입니다. 그는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어리석으면서도 현명하다고 착각합니다(롬1:22).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시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원하기라도 하듯이 계속 악한 짓을 저지르며 다른 사람까지 그런 치명적인 길로 끌고 들어갑니다(롬1:32).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갈의 계략(19:8-17)

사울이 이전의 상태로 다시 빠져들고 있을 때, 다윗은 블레셋을 또다시 물리쳤습니다. 이번에도 왕은 여호와께서 부리신 이 불가사의한 악신 대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며, 이전처럼 다윗을 죽이려고 그에게 창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빗맞췄으며, 다윗은 가까스로 도망쳤습니다. 이것을 사울의 분노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행동으로 여긴 다윗은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19:8-10:참조 18:11-12) 다윗을 살려주겠다고 사울이 얼마나 맹세해 왔는가 말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벧후2:22). 사울은 다윗이 죽어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사울의 자녀들은 사울보다 정의감이 투철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두 명이 다윗과 개인적인 언약을 맺고 있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요나단은 그와 우정의 언약을 맺었고, 미갈은 결혼의 언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울의 집안에 ‘제오열’을 두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에 대한 사울의 적대감을 가중시켰지만, 실은 젊은이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20:30-31).

사울은 새가 지저귀는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렸고 미갈은 창문으로 도망치라고 다윗을 설득하고 교묘하게 우상을 침상에 눕혀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 다음에 사울의 부하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믿도록 만들었습니다(19:11-16)

그 무렵 다윗은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딸의 배신에 기분이 상한 사울은 화난 말투로 물었습니다. (삼상19:17)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

이번에도 미갈은 다시 거짓말을 하여 그가 자기를 돕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더라고 주장하면서 둘러대었습니다(19:17).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가는 미갈의 행동에 대해 도덕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우리의 판단에 맡깁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인간적인 상황의 온갖 파토스가 복잡하게 뒤얽힌 것을 보게 됩니다. 가족 수호신(드라빔)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하여 그녀의 개인적인 종교에는 가나안의 우상숭배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녀가 후에 다윗의 언약궤 앞에서 춤을 춘 것과 그녀의 태도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그녀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만 향해 있지 않음을 암시합니다(삼하6:16-23). 이러한 사실은 그녀가 매우 용감하게 나서서 남편의 도피를 돕는 긴급 사태 때, 돌연 “육적인 계획과 궁리로 돌아선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핑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자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녀가 남편에게 충실한 것은 추천할 만한 일이었으나,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녀의 속임수와 거짓말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

상황 윤리의 파장으로 상당 부분 돌아서 있고 소위 ‘중간 지대’라고 하는 실존의 영역과 과도한 ‘스트레스’에 민감한 현대인들의 귀에 이것은 가혹한 판단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나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말도 되지 않는 결의론에 의해 제공된 여러 가지 구실로 우리의 양심을 씻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거짓말은 어째든 불필요한 것입니다. 경건한 태도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미갈의 첫 번째 거짓 말은 매우 피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거짓말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이었고, 곁에 없는 남편에 대한 배신 행위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지만 원리는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헐뜯어 그에 대한 자기 부친의 진노를 북돋고 싶은 유혹을 물리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용감한 행동을 통해 다윗의 목숨을 건지시기는 하였지만, 그녀가 하나님께서 자신과 남편을 안전하게 지켜 주시리라고 믿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음흉하고 독재적인 줄 뻔히 알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거슬렸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큰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시험에 직면해서 주님을 온전히 믿고 그의 온전하신 의를 신실하게 증거할 수 있는 인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울의 활홀경(19:18-24)

다윗은 사무엘이 있는 라마(이곳은 사울의 수도인 기브아에서 불과 2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임)로 도망가서 그에게 자초지종을 고한 다음 함께 “나욧”으로 갔습니다. 나욧은 지명이 아니라 도성 밖의 진이나 종합 건물일 것이며, 아마도 엘리사의 선지자 학교와 비슷한 신학교일 것입니다(왕하 6:1-7).
다윗이 사무엘에게로 도망친 것은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 행위로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와 함께 성소를 찾았으며, 그는 사실상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맡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것 중에서 하나님의 영이 가장 재미있고 신비스럽게 개입한 사건의 배경이 됩니다.
사울은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신하들을 세 번씩이나 보냈으나, 그들은 매번 하나님의 영에 의해 유발된 예언적 황홀경에 빠져 무력해지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사울이 직접 그 일을 수행하러 라마로 가다가, 그도 예언의 영에 압도되어 자신이 행동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신하들보다 훨씬 더 극적이며 비참한 결과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왕은 겉옷을 벗어버리고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던”것입니다(19:19-24).
사울은 이번뿐만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때도 선지자의 무리 중에 끼여 예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즐거이 성령의 인도함을 쫓아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치세 초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느끼는 신정 정치(神政政治)의 대리자로서 손색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자신의 판단에 근거하여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게 되었을 때는 본문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의 임하심을 거스르는 자기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오랜 숙련과 인내, 또는 고상한 절제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선택받았지만 그이 불순종과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버리운 바 되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삶을 살지 않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고 그의 명령을 준행하는 선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되고 통제되어야 하며 연단 받아야 합니다.
사울은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19:24). 페인(D. F. Payne)은 “사무엘과 그의 지도하에 있는 선지자들은 전혀 비난을 받지 않았으나, 사울은 왕으로서의 품위를 잃었기 때문에 조롱의 대상이 되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예언의 기능과는 다른 경험이었으며, 신자가 추구할 만한 경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에 대한 사울의 의도를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의 태도가 파멸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임을 그에게 보여 주기 위해 개입하시어 자기 능력을 과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물론 다시 피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요새이신 하나님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군사적인 은유들을 보노라면, 마치 우리가 성안에 포위되어 적의 침공을 물리치려고 안간힘을 쓰며 우리를 하늘로 데려갈 구조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것은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오해하고 이 은유 자체를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요, 강한 요새라고 말하는 시를 읽을 때, 필자는 스티어링(Stirling)에 있는 스코트 왕성을 생각합니다. 그 왕성은 네 번째 골짜기의 인구가 조밀하고 비옥한 저지대 위에 우뚝 솟은 바위에서 서 있습니다. 그 융벽에서는 비길 데 없이 훌륭한 광경과 네 번째 강의 굴곡, 그리고 멀리 고지대의 자색 산이 보입니다. 그 왕성은 800넌 동안 수차례 포위 당했습니다. 1314년 어느 여름 날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재획득된 반노크번(Bannock burn)에서는 대량 학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웅장한 성벽 안에 제임스 5세의 궁이 있었습니다. 성 안팎에는 정원이 있고 한 정원에는 볼링을 할 수 있는 잔디밭이 있었습니다. 왕과 왕비는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아름다운 영토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피난처요, 힘이 되신다는 사실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방패가 되어 은혜롭게 우리를 둘러싸십니다. 그는 성도들의 발을 지켜 주며, 그의 보이지 않는 손은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우리 일상 생활의 모든 일들을 지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전쟁의 열기 가운데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싸움과 투쟁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는 또한 우리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합니다. 그는 원수들이 있는 곳에서도 우리를 위해 풍성한 식탁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로 영원히 주의 집에 거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목자는 우리의 힘이요, 요새이십니다(시21편). 그리고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의 힘이신 줄 알았듯이, 오늘날 주를 사랑하는 사람은 평생 동안 주께서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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