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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력 (빌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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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 구절은 신자들이 무척 좋아하고 자주 사용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자주 사용되는 성구들이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글은 사도 바울이 성공하고 승리한 다음에 쓴 글이 아니고 가장 곤란한 지경에서 쓴 글이다. 빌립보서는 옥중서간 중의 하나로 로마에 감옥에 수감된 가운데서 기록된 것이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같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잡혔다. 그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신분으로 시이저에게 직접 항소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이송되어 로마 감옥에 수감된 것이다. 이때에 빌립보 교인들이 면회를 왔다. 빌립보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의 이름을 따서 지은 그리스에 있는 도시의 이름이다. 로마는 이태리에 있다. 그리스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이 먼길을 찾아와 위문품을 넣어 주었다. 그것을 받으면서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차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감이 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 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 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 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 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 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 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 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 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 을 돌릴찌어다 아멘(빌 4:10-20)” 바울은 일단 그들의 관심과 사랑에 깊이 감사한다. 그러나 바울의 관심은 그 이상에 있다. ‘너희가 나에게 갖다 준 것은 너희가 이 일에 참여하여 하나님 일에 동참한 것이 너희를 위하여 기쁜 것이지 나에게는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 웠노니(빌 4:11)” ‘왜 자족하는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기 때문에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와 궁핍에도 그것을 감당할 일체의 비결을 알고 있다. 그것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사도 바울에게는 ‘그가 가는 길이 세상의 것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이다. 또한 ‘세상의 것’으로 방해를 받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말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 세상의 것이나 원리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풍부한 것과 궁핍한 것이 상관이 없다는 것은 풍부한 것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를 궁핍하게 만드는 것으로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적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돈이나 권력이 도움도 방해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사도 바울이 옥중에 있을지라도 옥중에 있는 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방해가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 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 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 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 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 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 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2-27)” 보통 이런 고백은 성공한 다음에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 하는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고생만 했는데 결국은 정말 망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는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은 세상에 의하여 방해를 받는다. 그 방해에 걸리는 이유는 기독교의 추진력과 힘을 세상의 것으로 했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 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4-5)” 바울은 이렇게 자기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최고의 기쁨’이란 무엇일까‘ 보람있고 의미 있는 일에 마음껏 활개 펴는 것이다. 그 길을 지금도 사도 바울은 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 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 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빌 1:12-14)” 복음이 매여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사도 바울은 지금 붙잡혀 있다. 세상 쪽에서 보면 사도 바울은 지금 붙잡혀 있으면 복음도 붙잡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은 매이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그것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 진술된대로 고백을 할 수 있는 근거들이다. 그래서 최고의 것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곧 신앙의 힘이 무엇인가 하면 여기서 언급된 것 같이 세상의 것으로 근거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분명히 이런 것이다. 우리가 걷는 길이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것으로 쌓는 것이 아니며, 세상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이 길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사도 바울만의 생애가 아니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세상이 그를 반대했기에 당하는 고난이라는 것은 맞는다. 곧 세상이 복음과 생명의 하나님에 관한 것을 반대해서 받는 고난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쪽에서는 적극적인 차원에서 신자가 세상의 것으로 무너지지 않으며, 세상의 것에 근거하지 않고 기쁨과 승리의 생활을 하고, 복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교회에 나와 예배 드리고 봉사하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에 나가기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습니다’하고 순교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기쁨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요 주를 모시는 것이라는 고백과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를 이런 경지에까지 이르는 ‘신자’의 위치를 요구하는 것이 본문의 참된 교훈이다. 디모데전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니라” 돈은 어떤 것을 가능케 하는 최고의 수단이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바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 수단은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부자라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신앙인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라는 고백이 근거로 서야지 돈을 사랑해서 돈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 우리가 붙잡혀 있다면 그는 아직 신앙인의 경지에는 미달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능력은 세상이 우리를 아무리 할퀴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근거’로 삼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길을 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길이 그 앞에 예비되어 있다는 점을 깊이 명심할 일이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로만 부르시고, 또 그 일을 감당할 훈련을 시키신다. 돈, 건강, 명예 등등으로 근거했다가 넘어져 봄을 당함으로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부름 받은 일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가진 바 믿음과 기쁨과 승리의 근거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의 생애를 그렇게 어려운 길로, 그의 뒤를 좇아갈 수많은 후대의 신자들을 위해서 인도하셨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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