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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아들 목사로 (요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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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 기도로 키웠을 뿐이다"/"신앙속에 합당한 삶을"목회자 되라고 권 유 안해/"불신앙" 남편전도... 10년간 농촌교회 사역후 소천/신앙생활 최대 적은 「적당히」... 가정예배 평생 안빠뜨려 남편 김상혁전도사가 회심하여 목회의 길로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아들 4형제와 사위까지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다. 광림교회 김선도목사,금란교회 김홍도목사,임마누엘교회 김 국도목사, 미국 사우스베이연합감리교회 김건도목사등 아들 4형제가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다. 사위 김용일목사도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다.

1908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덧입지 않은 바가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에 모두 응답해 주셨다. 지금은 아들들의 목회를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네 명의 아들을 목사로 키울수 있었느냐」고 묻곤 한다. 그러나 나는 아들들이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은 거의 없다. 다만 태의 열매로 주신 자식들 이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목회자가 되든 평신도가 되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면 그것이 곧 만족이었다.

 나는 특별한 교육을 받은바가 없기 때문에 가정교육이 있을리 없다. 그저 날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지혜와 총명을 간구했다. 나는 열 여섯살 때부터 교회학교 교사를 했다. 결혼후에도 아이들을 등에 업고 교회에 가서 어린이들 을 가르쳤다. 아들과 딸들은 내가 기도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 다. 기도를 하다가 눈을 뜨면 어린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마주치곤 했 다.

 가정교육이 따로 있을리도 없었다. 자녀들을 모아놓고 찬송을 부른 후 기도 를 하고 성경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요셉,사무엘,다니엘과 세 친구등....성 경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묵시문학이면서 경건성과 교훈성도 함께 지니 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면 저희들끼리 재잘거리곤 했다.

 선도=나는 이 다음에 요셉같은 사람이 될테야.

홍도=나는 사무엘이 좋던데 선도=예수님만 잘 믿으면 뭐든지 할 수 있대.

정도=그럼 나도 요셉이 될테야.

선도=여자가 무슨 요셉이냐

어린이 교육은 열살 이전에 결정난다. 이때가 어린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 절이다. 이 시절에 좋은 믿음과 바른 신앙을 심어놓어야 한다. 남편은 지나칠 정도로 성경교육을 시키는 내가 언제나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어미가 저렇게 예수만 가르치니 자식들이 커서 제 밥그릇이나 제대로 찾 아먹을 수 있겠나.적당히 좀 해두구려」 「신앙생활의 가장 무서운 적은 「적 당히」라는 말입니다. 기도로 자녀를 키우면 절대로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아 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를 따라 교회에 출석했다. 그리고 학교도 교회에서 세운 대동학교를 다녔다. 할머니는 내게 한문과 성경을 모두 가르쳐 주셨다. 가끔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네 엄마도 신앙생활을 하면 좋을 텐데」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열세살 오빠가 열다섯 되던 해에 우리는 평북 선천 석화동 어머니 곁 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교회에 다닐 수 없었다. 어머니 의 완강한 반대 때문이었다. 교회도 30리나 되는 먼 거리에 있었다. 나는 어 머니 몰래 성경을 읽었다. 하루종일 일을하고 지친 상태에서도 어머니 몰래 성경을 읽었다. 외할머니 밑에서 자유롭게 성경 읽고 교회에 가던 시절이 그 리웠다. 석화동에는 신자도 없었다. 그런데 예수를 잘 믿는 집사님 가정이

이사를 오게 됐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와 오빠는 벌써 금족령을 내렸 다.

 「예수쟁이가 이사와서 골치좀 아프겠구나.만약 예배보러 가면 그냥 두지 않겠다. 미리 얘기하니 명심해라」 밖에서 찬송소리가 들리는 날은 정말 견 딜 수가 없었다. 나는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집사님 댁으로 달려갔다. 집사님은 그때 마태복음 7장7-11절 말씀을 들려주셨다. 이 말씀은 내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귀한 삶의 교훈으로 간직하고 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 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속으 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저도 자유롭게 예수믿도록 도와주세요.예수 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참으로 오랜만에 드리는 예배였다. 이튿날 아침 나물을 캐러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숙녀야,너 예수믿니」 「아니요교회 나간지가 오래 됐어요」 「그런데 왜 밤새도록 기도를 하니.참 이상하구나.하여튼 예수믿을 생각은 하지말아라」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간밤의 내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으시고 엉 뚱하게 어머니가 들었단 말인가.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금새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바로 그때 예배당에 다니는 아주머니가 교회에 가는 길에 잠깐 들 르셨다.

 「딸을 예배당에 좀 보내시지요」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말씀하셨다.

「외할머니랑 함께 지낼 때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었는데...교회도 못가게 하고 일만 시켰으니 어린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어머니는 장롱문을 활짝 여시더니 새옷을 꺼내주셨다.

「자,예배당에 가거라.이제부터는 자유다」

나는 뛸듯이 기뻤다. 하나님께서는 철부지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아,하나님은 정말로 살아계셨다. 구하면 주시겠다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생생 하게 체험한 것이다. 나는 「예수믿는 애가 왜 이래」라는 말이 가장 무서웠 다. 그래서 일거수일투족을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24년 2월21일 나는 고향의 사랑방교회를 떠나서 김상혁씨와 결혼식을 올 렸다. 내나이 열여덟이었다. 남편은 농삿일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 과 독립운동이나 유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나는 농삿일에는 이력이 나 있었다. 한번을 집을 나간 남편이 두달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남편 친 구로부터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북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 었다. 아마 조선에 다시 나오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예수잘 믿는 집안으 로 시집을 온다는 것이 결국 이것이었던가.세상에 믿지못할 것이 남자로구나.

 나는 행실을 각별히 유의했다. 남편이 떠난지 3년째 되던 해에는 성경학교 에 입학했다. 남편에 대한 미련을 모두 떨쳐버릴 즈음 남편이 찾아왔다. 듬직 한 체격은 어디가고 남루하고 초라한 행색뿐이었다. 나는 결혼생활을 계속할 의사가 없다고 잘라말했다. 남편은 주례를 맡았던 목사님께 나를 설득해줄 것 을 부탁했다. 「저는 다시 가정을 이루고 살 수가 없어요.남편에 대한 실망 이 너무 커요」 「모든 것을 용서하세요.헤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 다. 건전한 가정을 이루면서 전도사생활을 하는 것이 훨씬 은혜스럽습니다」

나는 목사님의 말에 순종했다. 끼니를 제대로 이을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도 신앙생활만큼은 게을리할 수 없었다. 1931년 12월2일 아들 선도가 태어났 다. 남편은 공무원으로 취직을 했다. 그런데 남편의 신앙생활은 영 말이 아니 었다. 주일이면 약속이 있다면서 일찍 집을 나섰다. 나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 았다. 아들 선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겐 큰 위로요 기쁨이었다.

 선도가 여섯살 되던 해급성폐렴으로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 은 산신령의 저주를 받아 곧 죽게 될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늦지않았으니 산신 령의 노여움을 푸는 굿을 하라고 했다. 「나는 못합니다. 설령 선도가 목숨 을 잃는다해도 그것은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제 아들의 생명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산등성이에 앉아서 통성기도를 드렸다.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사 랑했던 죄를 회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도의 폐렴이 말끔하게 나았다. 기 도의 위력이란 이렇게도 놀라운 것이었다. 남편은 평안남도 안주군청으로 직장을 옮겼다. 우리도 양덕을 떠나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625사변때도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전쟁이 끝난후에는 생활이 많이 안정됐다. 남편 은 경감이었고 큰아들은 경위견장을 달고 다녔다.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했으 나 나는 기쁘지 않았다. 남편이 신앙생활을 잘하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사 람들을 전도했지만 정작 남편을 전도하지못한 내 자신을 발견하고 통회의 기 도를 드렸다. 문제를 바로 나에게 있었음을 깨닫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 때가 1953년 12월15일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남편에게 공손한 태도를 취했 다. 남편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당신이 요즘 이상하구려.나도 이제 교회에 나가볼까」 얼마나 반가운 소 리였던가.남편은 무엇이든지 한번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해내고야 마는 성 격이었다. 남편은 성격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변화됐다. 그리고 곧 신학수업을 받게 됐다. 1956년 4월에는 전도사 발령을 받아 철원 장흥교회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정말 놀랍고도 놀라웠다. 남편은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 도 묵묵히 잘 참아주었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이 모두 교회에 출석했다. 남 편은 주로 농어촌교회에서 사역했다. 완전히 변화된 남편은 1966년 10월7일 소천했다. 그 날은 세 아들이 임종을 지켜보았다. 대전공군부대 군목인 선도, 개척교회를 맡고있던 홍도,해병대를 제대하고 육군부대에 근무하던 국도.남편 의 마지막 말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세상에 왔다가 마지막 10년동안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고 본향집 으로 간다」 남편이 소천한 후 나는 직접 목회 일선에 나서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시면 무엇이든지 감당했다. 이런 적극적인 믿음생활이 자녀들에게도 그대 로 전달됐고 네 아들이 각각 목회자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나는 아들들이 목 회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았다. 그저 신앙의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뿐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침은 굶더라도 가정예배에 불참해선 안 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주지시켰을 뿐이다.

 지금까지 지내온 삶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없다. 목 회자로 사역하고 있는 아들과 사위를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동안 내가 틈틈이 써온 글들을 모아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사랑의 하나님,아버지의 은혜가 제게 넘치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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