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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의 사귐 (요 17: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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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말하는 영광이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이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요 그의 존전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 서 모든 신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와 `교회 안에서라'는 조건이 붙어서 설명이 됩니다. 이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 너무도 약화되어 있는 것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하는 말들이 과연 어떠한 환 경과 조건을 뛰어 넘어서 획득된 것인가 하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성경이 말 하는 영광을 추구하기 보다도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영광을 요구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다보니 결국은 신앙의 오류를 범하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나아와 예배 드리고 찬양 드릴 수 있는 이 사실 이 얼마나 놀랍고 굉장한 일인지를 분명히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러한 특권에서 더 이상 다른 것을 요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 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자된 우리 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내용들을 다 소유하지 못한채 세월을 허송하기가 다반사 임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시 우리의 신앙과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추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우선, 신자의 신앙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 보시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고후4:6절을 찾아 보십시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여러분들은 이미 이 빛을 비취임을 받아 마침내 이 자리에 까지 나아온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비취었고 하나님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소개하는 예 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사귀게 하고 하나님께 우리를 소개하고 그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것을 언제나 가장 큰 핵심으로 등장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도 요1:18절에 있는 것과같이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 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다'로 묘사됩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후4:6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이라고 표현됩니다. 궁극적 인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고 예수를 알게 되었다면 하나 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연장시키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 말속에 들어 있는 그 엄청난 특권들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신약에서 묘사된 하나님과는 좀 다른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 약의 차이가 어느 정도이며 그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나면 큰 감격을 느끼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명기 5장을 찾아 보시겠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 장면입니다. 이 것은 출19:20절 이하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신5:22-27절을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구름 가운데,흑암 가운데서,큰 음성 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 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 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여기에 묘사된 하나님에 대한 묘사 중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라는 묘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달리 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듭니까 여호와께서 불가운데 말 씀하시고, 구름 가운데 계시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습 니다. 이런 표현에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친밀하게 느껴집니까 유쾌하게 느껴집 니까 두렵게 느껴집니까 여기서는 두려운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내 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시자 이것은 번개가 치고 우뢰가 울고 빽빽한 구름이 산을 뒤덮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발 그만하십시오. 우리 가 죽겠나이다. 모세, 당신이 가서 듣고 와서 전해주십시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 면 죽을것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뒤에가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생존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같이 산 자가 있습니까' 무슨 말입니 까 만일 음성을 직접 들으면 다 죽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간접적으로 듣고 보아 도 죽을 지경이었는데 직접 그랬다면 모두 귀가 먹고 눈이 머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자리서 그냥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불가운데서 라는 말씀은 신약적인 빛을 설명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불은 삼키고 태우는 심 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구름은 우리가 흔히 보는 그런 구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구름 을 말할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1장에 예수님이 승천하시자 구 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가리는 구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가림이 없 이 바로 보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죽고 말것이기 때문에 구름으로 가리워서 나타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름으로 영광을 나타내신 것은 성막을 지었을 때에도 나타났습니다. 성막에 구름이 덮였다는 것은 곧 영광이 덮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가리우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을까요 왕상8:10-11절에 가서 보면 성전을 짓고 난 다음의 기록이 나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 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 함이었더라" 이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감추시는 구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더 확실하게 표현한 곳이 있는데 시18:10-11절입니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이렇게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추시는 분으로 자주 묘사됩 니다. 여기서 자신을 감추시고 흑암으로 두르시고 계신다고 합니다. 안 보이게 한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97:1-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 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사면의 대적을 사르는도다" 흑암, 구름, 감추시는 것, 심판하시는 것, 이것으로 구약은 묘사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이 늘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은 상징적으로 할 때 율법적 성격을 강하게 띠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복음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에도 복 음이 있고 구원이 있지만 성격상 율법적인 성격을 대표합니다. 율법적인 성격을 대 표한다는 것은 죄를 지적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율법은 그래서 심판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인 우리가 도무지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너무도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 입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은 온 천하 만물을 주장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우리들도 그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입니다. 피할 때도 없고 방법도 없습니다. 이같은 우리를 위해서도 늘 가리고 나타나셔야 합니다. 그러나 신약에 넘어오면 이같은 이야기가 전혀 바뀝니다. 요일 1:5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 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흑암 가운데, 빽빽한 구름 가운데 계시며 그 음성을 들으면 까무라질 것 같은데 갑자기 신약에 오면 `그 빛이시라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기독교를 소개 받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축복이며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 무엇인지를 자꾸 놓치게 됩니다.

빛이시라, 어둠이 없다는 그것으로 인해 가능해 진 것이 무엇일까요 요일1:6-7절 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 이요" 사귐이 있다고 합니다. 사귀려면 일단 가까이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위해 우리의 죄로부터 제거되어야 합니다. 심판받을 수 있는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서서 사귈 수 없습니다. 재판관과 피고 사이에 무슨 사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둘 사이에는 법밖에 없습니다. 법대로 판결을 내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사귐 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그 앞에 설 수도 없었던 우리가 하나 님과 이제는 사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분으로 지금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버지가 판사이면 어떻고 아버지가 다른 무엇이면 어떻습니까 그냥 아버지 그러면 거기에는 법적인 관계가 들어올 것 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신자의 영광입니다. 요일2:1-6절을 보십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 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 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 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잘 보십시오.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어떤 차원에서 요구되고 있습니까 너희가 이 것을 지키지 않으면 죽는다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이것을 안 지키면 그 사귐이 어찌 진정한 사귐이겠느냐라고 묻습니다.

만일 남남 사이에서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한 것이 생기게 되면 `당신은 지금 내게 무엇 무엇을 잘못했소! 그것은 얼마의 댓가를 치뤄야만 하는 것이오 그러니 변상하 고 갚으시오!'라고 이야기 하겠지만, 그것이 만일 혈육 관계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너는 어찌 아버지 한테 그럴 수 있느냐' `너는 어찌 형제들끼리 그럴 수 있느냐' 라고 하면서 묻습니다. 그러니까, 혈육의 관계에서는 잘못한 것이 드러날 때에 그것 을 두고 `변상하라, 갚아라, 그러니 죽어라!'는 식으로 잘못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구약에서는 잘못하면 형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더 이상 그 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너희가 잘못한 것을 고백하라! 자녀답게 돌아오라! 어찌 자 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그렇게 밖에 못 섬기느냐'라는 말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지적들은 형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녀 된 것을 제대로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서입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놀라운 선언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롬8:1절일 것입니다. 이 것을 읽으면 누구나 감격합니다. 구약에는 전혀 없는 표현이 신약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게을러도 좋 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이제 결코 정죄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여 `네게 허락된 영광을 입으라! 너가 부름받은 부름의 자리에 돌아오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돌아오라!' 라는 촉구입니다.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는 이야기이지, `너 잘못했어! 알아서 해! 조금있다 보자!' 이 런 식의 심판과 정죄를 위한 경고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용서할 수 없고, 부부 간에도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에게서만은 용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기가 막힐 웅덩이 에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기도를 언제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우리의 상한 심령입니다 살전5:16-18a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 다. 이 말씀을 권면으로 들으시면 안됩니다. 가슴이 미어지고 괴로움이 많은데도 기 뻐하라니 애써 기뻐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자기가 분발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말씀입니까 살전5:18b을 보십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 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합니다. 다시말해 항상 기뻐할 것이 있게 하겠다 는 말이며, 쉬지말고 기도하면 늘 듣겠다는 말입니다. 또한 범사에 감사하면 아무리 사소한 것도 함께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이불을 꿰메시다가 잠간 다른 일이 생각나서 다른 일을 하고 왔는데 아무리 바늘을 찾아도 바늘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불 어디에 꽂혀 있을 것을 생 각하니 큰일이었습니다. 만일 이불을 덮고 자다가 찌르면 곤란한 일이었습니다. 그 래서 이 할머니는 가만히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셨답니다. `하나님 바늘을 찾게 해주십시오!'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며 모았던 손을 펴는데 손등이 따끔하더랍니 다. 얼마나 응답이 빠릅니까 참으로 귀한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기도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을 드시고 함께 하시되 `항상'입니다. 항상 기뻐할 것이 있고 기도를 쉬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예 귀를 우 리에게 고정시켜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게 하신답니다. 하나님이 이제는 그렇게 우리와 가까운 분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 에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현저한 표현의 차이가 나는 이유입니다.

신약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 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이렇게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 러니까,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며 그의 모든 기도에 아버지께서 응답하시는 것과 같은 그 영광, 그 특권, 그 자리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별 것 다 하면서 살다가 주일날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오면 하나 님은 또 여러분의 찬송을 받으시고 기도 받으시고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이 영광의 자리에 초대 받고 있고 허락 박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장 열심히 가르치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요한복음이 처음에 무엇부터 시작합니까 빛으로 시작합니다. 말씀, 그리고 빛입니 다. 요1:1-5절을 보십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 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에는 빛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드디어 드러내러 오셨거 든요. 하나님을 드러내고 우리를 드러내고 그 안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것 이 기독교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정검할 때에 가장 큰 기준은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섬기느 냐 사랑의 하나님으로 섬기느냐입니다. 사귐에 관한 이야기에는 반드시 사랑이 등 장합니다. 죄를 짖지말라는 것은 형벌을 받기 때문이라기 보다 이 사랑의 관계를 깨 뜨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 적극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 을 섬기는 문제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귀며 사랑을 나누어 기쁨이 충만 한 자리에 초대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벌로 말씀하지 않고 사랑에 관한 설 명으로 하나님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17:22-23절을 다시 보십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 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 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과 또 나를 사 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여기에 사랑 이 등장합니다. 왜 이 사랑이 등장할 수 있었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를 보내셨기 때문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이제 롬8:15절을 보십시다. 놀라운 선언이 하나 더 나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여기에 분명히 구별하여서 살펴야 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사랑 이라는 단어입니다. 두려움은 구약적인 신앙이요, 사랑은 신약적인 신앙의 방식입니 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얼마나 구약적인 개념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십 니까 혹 잘못하기라도 하면 `이러다가 내가 한 대 터지지..'라는 생각부터 하게 됩 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식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내가 잘못하면 삐져서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연애 할 때 만은 시 간을 꼭 지키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간을 지키지 않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럴 때 서 로 사랑하는 사이에 시간을 안지켰다고 삐져버립니까 걱정을 하지요. 무슨 일이 생 겼을까 온갖 생각이 다 납니다. 그게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 어떻습니까 환난이 없고 어려움이 없으면 하나님을 안 찾는 신앙은 아닙니까 그러면 이런 신앙의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아직도 공포에 놓여있 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으로 밖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 불 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가장 큰 특권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 나님을 만나 뵈어 사귀며, 그 크신 사역에 동참하고, 그 영광을 뵈오며, 하나님의 충만하신 영광으로 채우는 이런 일들은 안 하고 난 잘못한 게 없으니까 오늘 하루는 내 마음대로 한다는 소극적인 자세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잘못했 다 싶으면 얼른 기도나 봉사나 헌금의 선행에 열심을 내어 바침으로 대차대조표를 맞추어 나가는 형태의 신앙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바로 알 아야 합니다. 엡5:1a에 뭐라고 하시는 지 아십니까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라고 말 씀합니다. 그러니 다른 것은 더 볼 것도 없습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라는 이 말씀보다 더 놀라운 표현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하인도 아니고 종 도 아닙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이지 잘잘못을 법적인 차원에서 심판의 차원에서 묻 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엡5:1b절에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 는 자가 되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말은 남남의 사이에서는 불가 능한 일입니다. 오직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 살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린 그런 신 분입니다.

 <결론>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여서 한 입술로 찬송을 드리고 신앙 고백을 하 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 안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고, 우리가 가는 인생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같이 한 순간이라도 우리 혼자 있는 시간이 없이 함께 하시는 이로, 지키시는 분으로, 사 랑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이 내게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 님의 놀라운 사랑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여러분의 감사와 찬송거리와 소 망이 모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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