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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살리기 (막 1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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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은 가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감동받을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십자가에 대한 사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것이 우리 때문인가에 대해 막연하게 받아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런 느낌 없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우리도 가해자로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다시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아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막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용서도 우리에게는 막연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깊은 경험을 갖기 원한다면 그때 그 사건앞에 진지한 자세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군중들은 왜 흥분했으며 그들은 어떤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로 선택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군중의 흥분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의 아픔과 고통에 사랑으로 함께 했습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기적까지 동원하면서 인간의 아픔과 소외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의 의인이라는 엘리트 집단보다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착취를 당하는 많은 군중편에 서서 그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한번도 예수님은 군중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나 명예를 채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왜곡된 성직자들과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면서 많은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군중들은 바리새인들 편에 서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그렇게 열심이었을까요 오히려 그들을 종교적으로 착취하고 그들과는 분리된 특권을 누리는 종교 지도자들과 한편이 되어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을 가르치며 실제적으로 사랑을 주셨던 예수님을 죽여야만 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잘 짜여진 한편의 각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내용을 추적해 보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가 얼마나 영악하며 이기적이며 잔인한가에 대해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이 잡혀가게 된 배경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 가롯유다에게 팔려간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문제는 유다를 조종한 배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왕”이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범죄자의 입장으로 빌라도 총독에게 압송됩니다. 인간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정치적인 범죄자로 법정에 서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빌라도 총독도 바리새인 지도자들도 또 수많은 군중들도 예수님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는 인간의 죄가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먼저 이 사건의 계획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개인적인 불만을 가지고 있는 가롯유다의 욕망이 그 시기심에 결탁을 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안정을 추구하며 이기적인 관심으로 익숙해져 있는 대중의 군중심리가 다시 그들과 결탁합니다. 끝으로 정치적인 위기에 놓여있던 빌라도의 권력이 여기에 타협하게 됩니다. 시기심, 욕망, 물욕, 이기적인 안정, 무지, 권력에 대한 열망. 이러한 죄의 가지들이 연합하여 만든 작품이 바로 ‘예수님 죽이기’ 였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똑같은 망가진 도덕성으로 누군가를 대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또한번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좀 더 자세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바리새인의 시기심(막15:10) 예수님의 위기는 우리의 상식에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수 많은 인간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인생을 절망하는 죄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으며 진리를 목말라 하는 자들에게는 진리의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때로는 본능적인 어려움에 있는 굶주린 자들에게는 기적으로 빵을 주셨으며 몸이 아픈 자들에게는 아무런 댓가 없이 치료를 해 주셨습니다. 소외된 자들에게는 찾아가 친구가 되 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이러한 삶에 동화 되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들에게 가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 시대에 종교, 정치, 사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으로 최고의 혜택을 받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기성과 폭력과 부와 종교적인 위선은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을 무효로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십자가 사건의 배후는 바로 바리새인들의 “시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라는 말은 원어의 의미로 볼 때 “열심”이라는 말로 해석이 됩니다.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욕망에 열심일 때 상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생겨 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를 성경은 시기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을 하는 사람에 대해 갖는 감정은 경외와 부러움과 감탄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상대가 소유해 갈 때는 시기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 땅에서 부자가 되고 싶어 열심히 노력하는데 누가 나보다 먼저 부자가 됐다면 우리는 그 상대에게 시기심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이 땅에서 권력을 가지고 싶은데 누가 나보다 먼저 그 권력을 가졌다면 우리는 그를 시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누군가가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을 먼저 소유하여 누리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시기심을 갖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 시기심은 무서운 죄를 유발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이 시기로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가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명예를 자신들로부터 뺏아가는 예수님을 그들은 제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심만으로는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죄악을 감출 수 있는 대상을 찾았습니다. 그가 바로 가롯 유다였습니다. 가롯 유다의 또 다른 열심은 예수님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야심이 없었습니다. 당시 열심당원이었던 유다는 정치적 욕망과 그에 따르는 부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의 욕구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 가롯유다의 불만은 대제사장들에게 좋은 거래자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그에게 은 30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서 그들은 도피합니다. 이제 그들은 군중들을 선동하는 일만 남았던 것입니다.

 2. 군중의 어리석음(막15:11)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를 보면 대중이 얼마나 어리석은가에 대해 우리는 잘알고 있을 것입니다. 대중의 특징은 다수에 동조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중은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정과 동질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이나 변화가 어려운 것입니다. 대중은 길들여진 존재입니다. 모험과 변화를 거부하며 자신에게 익숙한 감정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관심보다 지금 나에게 어떤 상황이 편안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대중의 특징은 죄의 보편성에 특징이기도 합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았던 히브리인들이 모세에게 불만을 가질 수 있었던 근거도 바로 그런 대중의 특징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대중의 힘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이제 대제사장들은 이러한 군중의 심리를 너무도 잘 이용하던 사람들이었기에 예수에게 가 있는 대중의 마음을 너무도 쉽게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에 약점은 이 땅에서 얻어지는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인 미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군중은 미래에 대한 약속보다 지금 주어지는 약간의 만족에 매력을 느끼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의 현실은 바라바가 예수님 보다 매력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들의 가진자들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대신해서 풀어주는 바라바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관심 속에 예수님은 또 다른 분노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고 오히려 실망을 주었다는 분노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갔던 것입니다. 이 군중의 어리석음에 당황하는 것은 오히려 빌라도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상식과 지식으로는 이 대중의 분노와 요구가 이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총독이라는 신분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성난 군중의 요구를 빌라도는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그들에게 넘겨집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은 죄였습니다. 이기적인 욕망과 진리에 무관심한 무지함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갔던 것입니다. 변화와 약속보다 지금의 만족과 개인의 평안을 꿈꾸는 수 많은 이기심들이 모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여러가지 이유로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바로 이런 인간에 대한 용서였습니다. 그 죄를 내가 이기었으니 너희는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라고 권면하신 분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여기에 그 분의 사랑이 선포된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이 사랑을 실천하고 보여 줄 사람들이 바로 너희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왜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일에 주저해야 합니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일에 왜 그렇게 계산적이어야 합니까 여러분은 진정으로 누군가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진리를 가르치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누리기를 강력하게 권면해왔습니다. 나와 여러분의 관계가 그렇게 사랑하는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되기를 열망해 왔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책임지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할 형제고 자매라는 사실이 그 어떤 감정이나 지식보다 우선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과 사랑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말씀앞에 순종하는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이유에서든 아픔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서로에게 성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살리는 일에 우리의 마음이 모아져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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