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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갈릴리 설교(2) (막 01: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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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에 오신 예수는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설교를 하셨을 것이고,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 대해서 한 증언 발언이나, 갈릴리에 오 시기 전에도 이미 나타내신 그의 권위와 능력에 대한 소문과, 베드로 등의 증언에 의해서 많은 군중이 예수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가 가는 데마다 많은 군중이 모였을 것이고 그들을 향한 설교의 내용 은 거의 같았을 것이다. 본문에 니타난 네 마디로 된 설교는 갈릴리에서 행하신 예수의 설교의 요약일 것이다. 각처에서 행한 예수의 길다란 설교 들이 구전으로 전해지는 동안에 그 잎사귀와 잔 가지들은 다 사라지고 그 공통된 골자들만이 네 마디로 요약된 것이라고 본다.

첫 마디가 때가 찼다([페플레로타이 호 카이로스])라는 것이이다. 여기서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냥 시간이 아니라 '정한 시간' 즉 무언가 목적을 위해서 작정한 시점이나 기간을 가리킨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계획을 세우시고 그 정한 때에 행하시고 이루시려는 것이 있는 것이다. 여기의 페플레로타이는 현재완료 직설법 동사로서 그 정하신 때가 이미 당도해 있다는 말이다. 엄격히 말한다면 예수가 나타나신 시간이 바로 그 때의 원점이고 그 순간부터 그 정한 시기는 도래(到來)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에 관계된 때일까 틀림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때일 것이다. 복음서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훈이 제일 많지만 어느 곳에도 그것을 정의한 일은 없다. 그것은 결국 예수 당시의 사람들이나 초대교회의 신도들이 그 정의를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생소하고 또는 잘못 이해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나라'라는 말을 다분히, 아니 전적으로 공간 개 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천당이라는 말과 동 일시하고 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 대부분 하나님 나라를 '하늘 나라'로 부르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오해를 일으킨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이라는 어떤 공간 에 위치하고 있는 낙원으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물론 나라의 공간 개념을 배제해서는 안되지만 그러한 공간개념이 [헤 바실레이아 투 테우]의 기본 개념은 아니라는 것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가 사용한 아람어 단어 [말쿠타]나 히브리어 단어 [말쿠트]는 공간 개념이 아니라 [멜렉] ('왕')이라는 명사와 [말락] (왕노릇한다,통치한다) 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헬라어의 [발실레이아]도 히브리어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실류스] '왕')라는 명사와 [바실류에인] ('통치한다')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추상개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는 것은 하늘에 있던 천당이 보다 가까이 왔다는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구약 시대로부터 하나님의 통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본래의 이상은 신정(神政)국가 theocracy 였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그들의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이 깨어진 것이 그들의 문제였다. 하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 치 세계의 건설을 역설하였고, 때가 되면 야훼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을 약 속하셨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이 만물을 다 스리시기 위해서 창조하셨고, 악마의 장난과 반역에 의해서 지금은 하나님 이 통치하시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임시적일 뿐이고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실 때가 온다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는 물론 이고 묵시 문학과 랍비 문학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예고되어 있다 (성종현 신약총론 pp.474-478 참조). 세상은 마땅히 그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통 치하셔야 하는데, 실은 하나님 아닌 존재가 통치하고 있기에 문제가 된다. 그것이 피조 세계, 특히 이 지구의 문제이다. 그것을 원치 않는 하나님이 시기에, 때가 되면 당신 자신이 통치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신 것이다. 그 예언된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가까왔다' ([엥기켄])는 [엥기제인]이라는 동사의 현재완료 직설법 동사로서 ' 가까와 온다'는 동사의 완료이기 때문에 이미 가까이 온 상태에 있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 아닌 다른 존재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 통치가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수 자신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이신 하나님으 로서 그가 세상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상 현현(現顯)을 의 미하는 것이며, 세상 통치를 목적하고 오신 예수의 출현은 바로 하나님 통 치의 접근을 의미하는 것이다. 통치의 능력과 권위를 가지신 신자(神子) 예수의 내림이 바로 하나님 통치의 접근일 수 밖에 없다. 왕으로서의 세 상 통치를 목적으로 하고 오신 예수는 인간 속에 깊숙히 들어오신 것이고, 문자 그대로 인간에게 이미 가까이 와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까울 뿐 완전히 도래하신 것은 아니다. 완전히 거리를 영(零)의 상태로 만드는 일은 피조물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상태에 들어가는 일로써 이루어진다. 내가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고 그의 통치를 받는 상태로 들어가기 전에는, 예수가 나에게 가까울 뿐 아직은 거리가 조금이라도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가 바싹 다가왔다'고 말씀하셨고 완전이 임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신적 통치의 권능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그의 내림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의 접근이고,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가 와야 할 것을 예견하시며 강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제일 관심사는 하나님 자신이 통치하시는 세계를 이룩하시는 일이다. 그가 성육신하셔서 세상에 오신 목적도, 우리는 이간중심적으로 생각하여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인간을 위시한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를 제대로 받는 왕국을 건설하시려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라는 동작을 기본 개념으로 가지기 때문에 그 주어 는 하나님이시고 그 목적어는 피조물 일반 그리고 특히 우리 인간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동사의 목적어인 인간 이 그 통치에 순응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것 때문에 회개하라 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직설법적으로 행하신 일 두 가지 가 먼저 나왔다. 때가 이루어지도록 했고, 하나님의 통치를 솔선적으로 인 간에게 가까이 이끌어 오셨다. 이제는 인간이 응답해야 할 일 두 가지를 지적한 셈이다. 그 하나가 회개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인간을 통 치하러 오셨는데 인간 편에서 응답할 일은 오직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일 뿐이다.

[메타노에인] (=회개한다)은 생각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인간이 스스로 주인인줄 알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자기가 왕노릇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이제 그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이며 그만이 우리의 임금이심을 깨닫고 그에게 복종하고자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바로 예수가 원하시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이다.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바싹 다가오셨지만 우리 인간이 마음을 바꾸어 그를 주로 시인하고 그에게만 복종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가까울 뿐, 그가 우리를 다스리시는 상태에 이르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회개가 요구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회개가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왕권과 주권을 무시하고 자기가 주인이요 왕이라고 생각하던 생각을 돌이키는 일이다.

회개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는 한 가지를 더 명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 다. 이 말씀은 예수가 하신 말씀이 아닐 것이고 초대교회가 보충한 것이 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예수 스스로가 당신 자신이나 당신의 사건을 복음이란 말로 표현하셨겠는가 하고 의심을 가지게 된다. 예수의 [잎시시 마 베르바] ipsissima verba 즉 예수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씀 자체는 아 닐지라도 복음을 믿으라는 말로 표현될만한 내용의 말씀을 하셨을 것이라 는 추측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마다하고 반역했던 인간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 고 생각을 돌이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결심을 하며 하 나님 앞에 굴복하고 순응하면 그만이겠느냐 하면, 그렇치 않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의 통치를 반대한 사건은 가장 큰 죄이며, 따라서 이 종교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종교 적인 관계 안에 계시며,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그 댓가를 치러야만 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단지 인간의 회개 행위만으로써는 완전한 해결을 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라는 명제는 하나님이 설정하신 것 이고, 죄 문제가 해결될 때 거기에 비로서 평화가 오는 것이기에 그 문제 를 해결하는 조치가 필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10:45)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즉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인간들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써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된다는 것을 설명하셨을 것이고 하나님의 대속적 사건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복된 소식이며 그 복음을 믿는 일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구원 얻은 자가 곧 하나님의 통치 세계에 영접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통치 세계는 무죄 선언을 받은 자, 즉 의롭다 함을 얻은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도덕적인 분이시기에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일(복음을 믿는 일) 을 통해서 무죄 선언을 받아야만 하며,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의 복음 선포'의 결론일 수 밖에 없다. 복음을 믿으라는 말을 예수의 입으로 직접 하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설교의 결론은 그러한 정신과 내용의 것이었다고 본다.

III. 사 역 14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는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말씀하셨다:"때가 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가까이 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그 복음을 믿으십시오."

IV. 메 시 지

1.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충성을 다했다. (1)그는 진실한 선지자였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서 자기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다. 죄악이 가득하고 어두운 세상에 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목숨을 내 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요한은 참된 선지자였기에 그 당시의 불의와 악을 보고 간 과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바른 말, 직언을 하다가 마침내 헤롯의 미움을 샀고 결국 구금되었고 드디어 목숨을 잃었다. (2) 그는 그 시대의 선지자 로서 고유의 사명을 완수한 선지자였다. 그는 메시아의 선구자 역할을 하 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성공적으로 선구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기 때문에 메시아가 감추이거나 손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잘 드러내 주 었고 예수의 길을 훌륭하게 예비해주었다.

2. 예수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해서 사역하셨다. 갈릴리는 간악한 헤롯 안 티파스의 영토로서 그 백성은 이중 삼중으로 탄압과 착취와 천대를 받고 있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체포됐고 세례 요한의 운동은 헤롯의 주목 과 사찰(査察)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 운동에 동참하고 있던 예수가 아무리 자기의 고향이라 하더라도 헤롯의 영토인 갈릴리로 돌아 온다는 것 은 특별한 용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보다 도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예수의 의지를 말해 주는 것이 며 "건강한 사람은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자라야 의원을 필요로 한다"고 하신 예수 자신의 말씀에 부합되는 처사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운 자 들을 건지시려고 그 소굴로 과감히 들어오신 것이다. 부와 권력의 상징인 예루살렘은 예수를 죽였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갈 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겠다고 약속하셨다. 가난하고 압박당하고 소외된 갈릴리적 상황은 구주 예수의 관심의 초점이셨고 지금도 그렇다.

3. 예수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오셨고 그 자신이 복음이셨다.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 거기에 참된 기쁨도 평 안도 없다. 그러기에 인간은 복된 소식을 기다리고 또 필요로한다. 사람 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을 잃고 있기에 절망이 있을 뿐이다. 그러 기에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어서는 안된 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만이 뜻이 있는 것이다. 예수는 사람이 만들거 나 고안한 복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전능자 하나님에게서 발원한, 아니 하나님 자신이 고안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4.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역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때 [카이로스]를 정하셔서 그 정하신 때에 하실 일들을 계획하셨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대로 착착 진행하시고 계신다. 하나님께는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특히 타락하여 멸망 중에 있는 인간을 구출하시려는 계획은 세밀한 계획 속에서 준비하고 게셨으며 그 정한 때가 됐을 때 성육신(成肉身)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통치의 구체적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셨다.

5. 하나님의 최대의 이상은 만물을 스스로 통치하시는 일이다. 혼란하고 부패한 세상을 포기하고 선택된 사람들을 그 속에서 빼내어 하늘로 데려가 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피조 세계를 그 어느 한 부분도 남김 없이 다 당신의 지배하에 두시고 복종시켜 당신의 나라를 만드시려는 것이다. 그것이 창세 이전부터의 하나님의 계획이셨고,특히 인간이 타락한 후에 더 욱 간절한 소망이셨고, 그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시하시기 위해서 친히 사 람의 몸을 입으시고, 반역적인 고장(지역)인 이 지구로 내림하신 것이다. 통치의 의도와 권리와 능력의 소지자이신 성자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나타 나셨으니 얼마나 가까이 오신 것이냐 말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눈 앞에 바싹 다가온 것이다. 그의 통치에 굴복하고 그의 통치를 받기로 마음먹고 순종하기만 하면 거기에 그 통치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완전히 그 통치는 와 있는 것이었다. 현재완료적 상황 이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발적인 복종과 굴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다.6. 하나님의 통치의 주격은 하나님이시고 대상은 우리 인간이다. 그 통치 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발적인 복종과 굴복에 의해서 이루어지 는 것이다. 내가 마다할 때 결코 강제로 우리를 복종시키려 하시지 않는 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릇된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나 혼자 살 수 있고, 자기 운명을 자기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주자로서 자기의 주 인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었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판단이요 생각이었 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각을 고쳐먹고 자기가 부인이라는 죄악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다스리시겠다는 마땅하고도 자애로운 말씀에 복종하고 그 통치 아래로 돌아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회개이다.

7. 그러나 또 한가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복된 소식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무죄 선언을 받기 전에는 완전한 해결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 되어야 한다. 그래야 참된 평화가 있고 참된 기쁨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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