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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 밖에서 평화의 함성이(1) (마 21:1-11)

첨부 1


Ⅰ. 본문비평 및 번역[사역]

1.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벳바게 마을 올리브 산에 이르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맞은편에 있는 마을로 가거라. 가서 보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풀어서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3.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필요로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러면 곧 내줄 것이다.

4.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다.

5.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하여,

7. 그 나귀와 새끼 나귀
를 끌어다가 그 위에 얹으니, 예수께서 올라 타셨다.

8.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9.그리고서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르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도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온 도시가 들떠서 "이 사람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1

1. 무리가 말하기를 "이분은 갈릴리의 나사
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요" 하였다.

Ⅱ. 착 상

가. 뉘라서 개선 장군에게 환호성을 지르지 않겠는가 뉘라서 승리자에게 박수갈채를 보내지 않겠는가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패배자로
낙인찍힌 사람 편에 서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한 사람은 어리
석은 사람인가, 얼빠진 사람인가

나. 골고다 언덕 위에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예수를 향하여 "참으로 이 분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고 소리쳤다.
그는 방금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집행을 지휘한 장본인이었다. 십자가 위

다. 호텔 입구에서 제복을 입은 접객원들이 손님을 맞이한다. 그는 왜국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오는 손님에게는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고 두 손으로 차문을 열어 주며 국산 승용차를 타고 오는 손님에게는 45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고 한 손으로 차문을 열어주며 값싼 승용차를 타고 오는 손님에게는 꼿꼿이 선 채로 차문을 열어주며 택시를 타고 오는 손님은 못본척 하고 둔다고 한다. 이러한 관행이 역전(逆轉)될 수 있겠는가

라. 유월절이 가까워올수록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전국에서 모여드
는 순례자들의 행렬이 잇따랐다. 올리브 산 근처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통
하는 길 위에 어느 날 갈릴리 촌뜨기들이 한 무리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한 젊은이가 이웃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구하여 오게 했다. 몇 사람이 안
장(鞍裝)대신으로 겉옷을 벗어 나귀 등 위에 걸쳤다. 젊은이가 그 위에 올
라타니 앞 뒤에서 따르던 무리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펼쳤다. 또 더러는
나뭇 가지를 꺾어 길에 펼쳤다. 그러면서 무리들이 갑자기 "호산나, 다윗
의 자손께!" 하고 이 젊은이를 향하여 열광적인 환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돌발 사태였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무리가 이
젊은이에게서 개선 장군의 위풍과 권위를 발견했기 때문인가 이 젊은이의
초라한 모습에서 오히려 겸손과 온유함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인가 무
리가 그들의 민족적 희망을 이 젊은이에게 억지로 뒤집어씌운 것인가

마. 이 호산나 환호 일화에서 역사적 진실과 케리그마적(=복음 선포적) 진리사이의 경계선을 긋는 일은 가능하며 설교 준비 과정에 필요한가

Ⅲ. 주 석

가. 거의 모든 주석서는 마 21:1-11을 하나의 단락으로 구분하고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이 제목은 중립적이다. 벳바게 마을에서부터
예루살렘에 다다르기까지 길에서 일어난 사건의 성격을 나타내려면 제목을
더 구체적으로 붙일 수 있다. 그것은 승리의 입성인가 수난을 향한 행진
인가 최후의 적진 진격 행진인가 평화의 왕 추대 행렬인가

나. 이 단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9절은 벳바게 마을에서 예루살렘성문에 이르는 길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기술하며 10-11절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수의 행렬에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를 기술한다.

다. 첫째 부분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 지리적 언급(1절a)
(2) 예수께서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로 보내어 탈 짐승을 구하여 오게 하
심(1b-3절)
(3) 나귀와 나귀 새끼에 관련하여 일어난 일을 예언에 결부시킴(4-5절)
(4) 제자들이 예수의 지시대로 함(6-7절)
(5) 무리들이 호산나 환호 시위를 벌임(8-9절)

< 1절a >

새로운 사건이 시작하는 기점(起點)이 언급된다. 여기에 언급되는 지명(地
名)은 `예루살렘', `벳바게', `올리브 산'이다. 예루살렘은 예수와 그 일
행의 여행 목표점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다'는 말은
이제 무엇인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하게 한다. '예루살
렘에 가까이 왔다'가 구체적으로 어디쯤에 온 것인가를 밝히기 위하여 '벳
바게'라는 지명을 끌어들였다. 벳바게는 구약성서에서는 언급되지 아니했
으며 신약성서에서는 여기와 공관복음 병행절에서만 나올 뿐이다. 벳바게
는 구약시대에 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거의 알려지지 아니한 무명(無名)
의 마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여리고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택하면 여정의 마지
막 단계에 베다니 마을을 지나서 올리브 산의 동쪽 산밑을 거쳐 예루살렘
에 이르게 된다. 벳바게와 올리브 산에 `이르렀다'라는 동사의 도착 지점
을 가리키는 부사구로 형성되어 있다. 즉 `벳바게에'(to Bethphage)와 '올
리브 산에'(to the Mount of Olives)라는 두 개의 부사구가 `이르렀다'라
는 동일한 동사에 동격적(同格的)으로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순전히 지리
적 관점에서 벳바게와 올리브 산을 비교한다면 벳바게는 올리브 산보다 작
은 지점이며 올리브 산은 벳바게보다 큰 지점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올리브 산이 벳바게의 위치를 규정하여 주는 형용사구 기능을 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감람산 벳바게에'(개역), `감람산 근처 벳바게에'(새번역,
공동), 또는 `올리브 산이 있는 벳바게에'(표준)라는 번역은 모두 올리브
산(또는:감람산)이 벳바게를 수식하는 형용사구로 풀이하여 번역한 것이
다. 원문을 직역하면 `벳바게에, 올리브 산에 이르렀다'인데 마태 기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된 관심은 '벳바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데
있었고 벳바게에 이른 것은 곧 올리브 산에 이른 것이라는 사실을 덧붙여
놓았던 것이다. 마치 과천으로 해서 관악산에 이르거나 신림동으로 해서
관악산에 이르는 방법이 있듯이 마태복음의 표현은 벳바게에 이르러 올리
브 산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벳바게'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무화과 집' 또는 `무화과 골'
을 뜻하는데 올리브 산의 동쪽 산기슭이나 산밑에 위치한 마을 이름이거나
무화과 나무가 우거진 땅 이름일 것이다. 22절에 나오는 '맞은 편 마을'을
벳바게로 볼 수밖에 없다면 벳바게는 마을 이름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
겠다.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져 있다. `올리브 산'이
라는 명칭은 거기에 올리브 나무가 많기 때문에 붙여졌다. 예루살렘 시가
지가 해발 약 720m 되는 고지대에 놓여 있는 데 비하여 올리브 산은 높이
가 820m 정도 되니까 올리브 산 위에서 예루살렘 성내를 환히 내려다 볼
수 있다(눅 19:37,41-44; 막 13:3 참조).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적병에게
함락되었을 경우에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작전에 있어서 중요
한 전략적 기지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예언자 스가랴
는 야훼께서 열국을 치시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날에 야훼께서 올리브 산에
나타나시리라고 예언했다(14:4). 유대 역사가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에서 나온 한 메시야적 예언자가 군중에게 말하기를 올리브 산에서
발하는 자기의 명령 소리에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며 그리하여 거룩한 도
성으로 진군하고 구원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고 선전하여 많은 무리를 올리
브 산에 집결시킨 일이 있었다고 한다. 예수 시대와 초대교회 시대에 있어서 유대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올리브 산이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기대와 결합되어 있었다고 할 것이다. 올리브 나무와 감람(橄欖) 나무는 식물학 상으로 서로 다른 과(科)에 속한다. 개역 성경이 올리브 산을 감람산으로 번역한 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 1절b >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라는 말은 이 일이 예수의 솔선적 주선에
따라 일어났음을 나타낸다. 구문 상으로 1절b는 주문장으로 되어 있고 1절
a는 때를 나타내는 부사절[=...했을 때에]이다. 그러니까 1절a의 구문형식
과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예수께서 그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신 때와 장소를
나타낸다.

< 3-4절 >

두 제자를 보내실 때에 내린 지시 사항은 (1) 맞은편 마을로 가라는 것
(2) 거기에 가서 어미 나귀 한 마리와 그 새끼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오라
는 것이었다. 베다니 쪽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면 올리브 산의 남
단(南端)에 있는 마을이 정면으로 마주치니까 `맞은편 마을'은 벳바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나귀가 몇 마리 등장하는가 어미 나귀 한 마리와 그 새끼 나귀 한 마리를
합하여 두 마리 나귀가 등장한다. 이와 달리 마가복음에서는 새끼 나귀 한
마리만 등장한다(11:2). 어찌하여 이러한 차이가 생기게 되었는가 마태
기자는 예수께 일어난 사건을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예언의 성취로 보는
그의 특별한 신학적 경향성 때문에 구약의 예언과 관련되는 부분에 있어서
는 예수의 사건을 구약의 예언에 일치하게 기술하려 했다. 그는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에 맞추어 그의 복음서 21장 2절과 7절을 기록했던 것이다.
그러면 스가랴 9장 9절에는 나귀가 몇 마리 등장하는가 나귀가 몇 마리냐
하는 물음은 히브리어 원문의 표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히
브리어 표현을 직역하면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그리고 새끼 나귀 곧 나귀
의 새끼를 타신다"인데 여기서 '새끼 나귀'와 '나귀의 새끼'가 동일한 것
을 반복해서 시술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나귀를'
(on an ass)과 '새끼 나귀를'(on a colt) 사이에 끼어 있는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어떠한 기능을 하느냐를 판가름하기는 쉽지 않다. '나귀를'이라
는 어구와 '새끼 나귀를'이라는 어구는 별개의 짐승을 가리키기보다 동일
한 내용을 반복해서 표현하는 평행구문(平行構文)이라고 보는 것이 내용적
으로 더 자연스럽다. 이러한 경우에 '그리고'라는 접속사는 동일한 내용을 단순하게 반복하는 접속사가 아니라 앞의 내용을 양보적으로 약화시켜 반복하는 접속사로서 `그런데 그것도'라는 뜻을 지닌다. 히브리어 원문은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그런데 그것도 새끼 나귀, 곧 나귀의 새끼를 타신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70인역 헬라어 성경은 `새끼 나귀를'이라는 어구에 `...위에'를 뜻
하는 전치사를 생략하고 번역함으로써 앞의 나귀와 뒤의 새끼 나귀가 별개
의 짐승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했거나 오해하도록 만드는 소지를 제공했
다. 마태 기자는 이 70인역 성서에 의거하여 나귀와 새끼 나귀를 별개의
두 마리 짐승으로 곡해하여 예수의 사건을 그렇게 기술했던 것이다.
주께서 필요로 하십니다:헬라어 [퀴리오스]는 (1) 소유주(所有主) (2)
(종에 대한) 주인 (3) 야훼 하나님을 지칭하는 명칭 (4) 예수 그리스도
를 지칭하는 존귀 칭호 등을 뜻한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그 나귀들의 참된
소유주라는 뜻에서 "임자(所有主)가 그것들을 필요로 하십니다"를 뜻하는
말로 볼 수도 있고 예수에게 '주님'(the Lord)이라는 존귀 칭호를 붙여서 "
주님이 그것들을 필요로 하십니다"를 뜻하는 말로 볼 수도 있다. 주님이라
는 칭호로 예수를 지칭한 경우는 마태복음 전체에서 예외적으로 이 곳뿐이
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이 역사적 예수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씀인지 마
태 기자에 의하여 윤색된 말씀인지 확실하게 분간할 수 없다. 어쨌든 우리
가 물어야 할 것은 왜 하필 이 곳에서 주님이라는 존귀 칭호가 사용되었는
가 라는 물음이다. `필요로 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쓰다'로 번역하는 것
보다 원문의 뜻에 더 가깝다.

그러면 곧 내줄 것이다:이 문장의 주어가 누구인지 확정하기 어렵다. 첫
째는 왜 나귀들을 푸느냐고 묻는 사람으로 볼 수 있고 둘째는 예수로 볼
수 있다. 첫째 경우에는 왜 나귀들을 푸느냐고 묻는 사람이 심부름꾼의 답
변을 듣고서 두 말없이 곧 나귀들을 내줄 것이라는 것을 뜻하고 둘째 경우
에는 예수께서 그 나귀들을 지체없이 곧바로 돌려보낼 것이라는 것을 뜻한
다. 마가 기자는 이 문장에 '다시'와 '여기로'라는 두 개의 부사를 사용함
으로써 이 문장의 주어가 예수임을 명백하게 했다. 2-3절에서 제자들이 예
수의 명령에 아무런 거역없이 순종했고 나귀와 관련된 사정이 예수께서 예
견하신 그대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대
로 일어난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역점이 있다면 그 마을 사람도 아무런 저
항 없이 나귀를 내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는 데 봉사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전체적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고 할 것이다.

< 4-5절 >

마태복음에 특유한 예언 성취에 대한 공식구(4절)에 이어서 5절에 스가랴
9장 9절을 인용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스가랴 9장 9절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여
라. 예루살렘의 딸아, 환성을 올려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라는 말은 이사야 62장 11절에서 따온 것이다. '시온'은 예루살
렘의 성전이 위치해 있는 산을 가리킨다. 그래서 '시온산'이라고 일컫기도
한다(삼하 19:31; 사 8:18; 18:7; 애 5:18; 욜 2:32). '시온' 또는 '시온
산'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삼하 19:31; 시 48:12; 51:18;
102:13; 사 2:3; 4:3; 10:12; 30:19; 52:1; 애 5:18; 욜 2:1,32; 3:16; 암
1:2; 3:12; 4:2; 슥 8: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가리키는 말
로도 사용된다(시 9:11; 20:12; 74:2; 76:2; 사 4:5; 8:18; 18:7; 욜
3:21).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 또는 예루살렘 주민을 가리키며 나아가서
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상징하기도 한다(왕하 19:21; 시 9:14; 사 1:8;
3:16,17; 4:4; 32:22; 52:2; 62:12; 렘 4:32; 6:2,23; 8:19; 미 4:10,13;
습 3:14; 슥 2:10; 9:9).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은 동의어로 사용
된다(왕하 19:21; 시 37:22; 사 37:22; 미 4:8; 습 3:14; 슥 9:9). 5절의 '
시온의 딸'은 문자적으로는 예루살렘 주민을 가리키지만 상징적으로는 이
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이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종말적인 메시
야 왕의 오심을 예언한 말씀이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시는 왕의 성
품과 겉모습을 묘사한다. 온유한 성품은 위압적인 또는 폭력적인 성품의
반대이다. 겸손한 성품은 오만한 또는 거만한 성품의 반대이다. 히브리어
[아니] ( ani)와 헬라어 [프라위스] (pra s)는 '온유한' 또는 '겸손한'을
뜻한다. 메시야 왕의 이상적 성품을 표시하는 형용사로서는 '온유한'이라
는 형용사가 더 잘 어울린다. 나귀는 왕이 타는 짐승이 될 수 없다. 왕의
위용을 과시하려면 말을 타야 한다. 적군을 무찌를 채비를 차리고 나타나
는 군왕 또는 장군은 군마를 타거나 날쌘 말들이 끄는 전차를 모는 모습일
것이다. 나귀를 타고 나타나는 왕은 전형적인 왕의 모습에 전혀 부합되지
아니하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왕의 모습이다. 바로 이 왕이야말로 적의 병
거와 말과 활을 끊고 참된 평화를 이룩할 평화의 왕이다(슥 9:10).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나귀는 전쟁에 사용되는 짐승이
아니고 짐을 나르거나 밭의 일을 담당하는 짐승이다. 말이 군왕에게 소중
한 짐승이라면 나귀는 가난한 농부들에게 소중한 짐승이다. 종말의 메시야
왕은 군왕의 말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나귀를 타고 오시되 그런데 그것
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

< 6-7절 >

심부름 갔던 두 제자가 예수가 지시하신 대로하여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
를 끌고 왔다. 제자들이 그들의 겉옷을 벗어서 안장(鞍裝) 삼아 그 두 마
리 짐승 위에 얹었다. 예수께서 그 위에 올라 타셨다. `그것들(=나귀와 새
끼 나귀) 위에 타셨다'는 표현은 실제 사정에 맞지 않는다. 두 마리 나귀
위에 동시에 탈 수 없는 법이다. 또 두 마리를 번갈아 탔다고 풀이하는 것
도 무리하다. 실제로 그랬다면 그 장면은 아주 불합리했을 것이다. 어미
나귀를 옆에 두고 새끼 나귀를 탄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이러한 불합
리한 표현이 생긴 원인은 마태 기자가 스가랴 9장 9절에서 나귀의 수를 잘
못 이해한 데 있다.

< 8-9절 >

이 부분은 이 단락의 극치이다. 무리가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으
로 떠받들고 환호하는 시위 행진을 벌이는 장면이다. 이 시위는 두 마당으
로 구성되어 있다.
(1)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폈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8절)
(2)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르는 무리가 예수에게 호산나 환호성을 질
렀다 (9절)

겉옷을 길에다가 폈다:등극하는 사람의 발 앞에 겉옷을 까는 행위를 왕
위 추대의식의 구성요소로 인식하는 전통이 있었다. 예후를 왕으로 추대할
때에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섬돌 위 예후의 발 앞에 깔고 "예
후는 왕이 되었다" 하고 외쳤다(왕하 9:13).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
가 나아가시는 길 위에다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펴는 행위는 위의 것
과 같은 왕위 추대식을 야외에서 연출하는 것이다. 왕위에 등극하시는 분
의 발 앞에 겉옷을 벗어서 까는 행위는 그분에 대한 존경과 순종을 표시하
는 행위이다.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다 까는
행위는 왕위 추대의식과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왜 이 행위가 이 자리에
끼어 들었는가 예수를 앞뒤에서 따르는 이 무리들은 아마도 대부분이 갈
릴리 출신의 농사꾼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빈 손이었다. 그들은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창도 칼도 활도 몽둥이도 지니지 않았다.
이 왕위 추대 행렬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그들
은 새로 등극하시는 왕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을 나타낼 것인가 이것을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은 그들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
는 일로서 푸른 나뭇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까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민중들이 벌이는 가장 멋진 왕위 추대의식이다. 푸른
나뭇가지들은 평화를 상징한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이름 없는 나뭇가지들
을 종려나무 가지로 바꾸고 무리가 그것들을 손에 꺾어 들고 예수에게 환
호했다고 서술함으로써 나뭇가지에 담긴 평화의 의미를 더욱 잘 극적으로
부각시켰다(요 12:12-13). `종려 주일'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호산나:`호산나'는 원래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는데 신약성서에서 헬라어
로 음역(音譯)되었고 그것이 우리말로 그대로 음역된 것이다. 이 말은 시
편의 찬양시 가운데 하나인 118편 25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본래의 의
미는 `이제 구원하여 주십시오!'이다. 즉 그 말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
는 외침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는 찬양의 환호성으로 그 뜻이 바
뀌어졌다. 말하자면 우리말에서 '만세!'와 같은 환호성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의 자손에게:`다윗의 자손'은 메시야 칭호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에
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칭호를 붙이는 것은 예수를 메시야로 떠받드는 것을
뜻한다. 무리들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지칭하면서 그에게 호산나 환호
성을 외쳤던 것이다.

복되시도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말은 시편 118편 26절에서 인
용한 것이다. `복되다'는 말은 '복이 있다' 또는 `복을 받았다[받은 처지
이다]'를 뜻한다. 이것은 원래의 문맥에서도 현재의 문맥에서도 소원을 표
시하는 기원문(祈願文)이 아니라 실제의 사실을 기술하는 직설법 서술문이
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시편에서는 '야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
이다. 유대 사람들은 매년 초막절이나 수전절이나 유월절 때마다 예루살렘
의 성전을 순례했다. 성전을 들어서는 순례객에게 제사장이 성전 문 앞에
서서 "주(=야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 있습니다" 하는 말로 인사
를 하면서 영접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주의 은총을 받기 위하
여 성전을 방문하는 순례자를 가리켰다. 그러나 현재의 맥락에서는 하나님
의 종말적 구원을 이룩하기 위하여 오시는 메시야 왕이다. "복되시도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는 말은 예수를 메시야 왕으로 높이는 환호
성이다.

[유로게메노스] eulogemenos 라는 과거분사형 형용사를 `축복받은'이라는
뜻으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축복('祝福)하다'라는 동사는 '복을 빌
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은 복을 '비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께서 축복하신다'는 말은 내용적으로 틀린 표현이다. 하나님은 축복하시
는 분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지극히 높은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 곧
천상의 세계이다. 마태복음 기자는 하나님이 계신 곳 곧 천상의 세계를 가
리킬 경우에 `하늘'(複數形)이라는 용어를 흔히 사용했다(5:12,16,48;
6:1,9,10; 7:11,21; 10:32,33; 12:59; 1617'19; 18:10,14,19; 19:21;
22:36; 23:9,22; 24:36).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를 끝절에 붙인 것
은 이 호산나 환호성은 지상(地上)에서 사람들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천상
(天上)에서 천사들도 외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호산나 환호 시
위 행진은 전 우주적인 행사로 확대되었다.

< 10-11절 >

성 밖 장면은 끝나고 이제 성 안 장면이 시작된다. 성 바깥에서 벌인
환호 행진에서는 무리가 행위의 주역으로 부각되었다. 10절에서 예수를 다
시 행위의 주역으로 등장시키고 예루살렘 주민들의 반응에 시선을 집중시
킨다. 무리들은 측면으로 물러난다.

온 도시가 들떠서:`온 도시'는 예루살렘 주민 전체를 뜻한다. `들뜨다'
는 안정을 잃고 술렁거린다는 뜻이다. 이 동사는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나
타내는 데 사용되었다(24:7; 27:51,54; 28:2,4). 지진으로 지각이 뒤집혀
서 땅이 혼란에 빠지듯이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 예수를 두고 동요했다. 그
들이 들뜬 것은 성 밖에서 일어난 호산나 환호 행진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인지 성 안으로 들어선 예수와 그 일행의 비상한 모습을 직접 목격했
기 때문인지 확인할 수 없다.

이 사람이 누구냐:이것은 예루살렘 주민이 예수에게 품은 기대감, 의아
심, 불안감 등의 복합 심리를 표출한 반응이다. 전통적으로 거의 모든 주
석가들은 이 물음을 너무나 일방적으로 기독론적 물음으로만 취급한다. 기
독론적 물음에는 기독론적 칭호로 답변된 것만이 정답으로 취급받는다. 예
수의 인격과 활동의 의미에 대한 최종적 판단은 기독론적 고백에서 절정에
다다른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기독론적 고백이라는 척도를 사용하여 모든
석을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그것은 마치 프로크
러스테스(Procrustes)의 침대처럼 개개의 현실에서 그것의 고유한 역사적
값어치를 제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냐"라는
예루살렘 주민들의 물음은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무슨 극적인 일이 일어
날까" 또는 "세상이 뒤바뀔 것인가"하고 묻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예루살렘 주민의 물음에 답변을 한 사
람들은 조금 전에 호산나 시위 행진에 참여한 바로 그 무리들일 것이다.
"이분은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동네 출신 예언자인 예수요" 하고 그
들은 대답했다. 직전의 시위 행진에서 그들은 예수를 종말적 메시야 왕으
로 환호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이분은 다윗의 자
손이오" 또는 "이분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기로 약속된 바로 그분이오"하고 대답하지 아니했는가 예수를 메시야적 칭호로 일컫지 아니하고 그분에게 한갓 예언자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그들이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의 등급에서 퇴보했음을 뜻하는가 그렇게 볼 수 없다. "이분은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이며 이름은 예수라고 하오"라는 답변이 "이분은 다윗의 자손이오" 또는 "이분은 메시아요"라는 답변보다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더 큰 충격을 일으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인물을 메시야로 받아들일 것이냐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냐는 물음은 그들의 신앙적 결단에 100%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이에 반해서 무지랭이들이 사는 저 북쪽의 갈릴리에서 그런데 그것도 저 무명의 나사렛 동네에서 출생한 사람이 예언자로서 예루살렘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에 단 1%의 가능성으로도 허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주석가는 `예언자'에 정관사가 붙어 있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이 말이 여러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명기 18장 15절에 예언된 바로 그 종말적 예언자를 지칭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민중의 일상적 언어에 지나치게 신학적 함의를 부여하는 것이라 비판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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