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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사랑하는 아들 (마 03:13-17)

첨부 1


I. 본문의 구조

본문의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의 준비 기간에 된 일들을 다루고 있다. 마태복음1-2장에서 마태는 예수의 계보를 기술하고 초자연적인 출생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섭리 속에 나타날 메시야를 대망하게 한다. 본문 바로 앞 (마3:1-12)에는 세례 요한이 출현하여 이사야 40:3을 인용하면서 종말론적인 구원자(구약 원문의 뜻을 따르자면 하나님이지만 여기서는 예수를 암시한다)를 맞이하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요한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일가고 소개한다.

본문은 기본적으로 마가 자료를 기초로 하고 있지만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말씀(14-15절)이 첨가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 많이 (151회) 등장하는 역사적 현재 Historical present 라는 시제를 대폭 줄이고 있는데 (21회), 유독 본문의 전후 문맥(3:1-4:11)에서 7회나 등장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3:1, 13, 15 ; 4:5, 8(2), 11). 아마도 어떤 자료가 배후에 있지 않겠는가 하고 짐작하게 된다. 개역에는 15절 하반절("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나 헬라어 본문은 13절의 시작되는 구절과 같이 독립된 문장으로 (다같이 tote로 시작) 나타내고 있다. (공동번역과 새번역 참조)

그러므로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받아야 하는 이유 (13-15상)1) 장면에 대한 설명
2) 세례 받는 이유에 관한 대화 (14-15상)

2. 예수가 세례 받는 목적 (15하-17)1) 장면에 대한 설명 (15하)
2) 예수의 세례 받음과 그에 따른 현상 (16-17)

II. 본문비평

본문에 대한 사본들 간의 불일치에 관해서 본문의 주석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 하나만 언급하고자 한다.
16절 하반부에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 부분의 UBS판 헬라어 본문은 kai idou eneoxthesan [auto] oi ouranoi로 되어 있다. 개역은 auto를 번역하지 않은데 비해 표준새번역은 '그에게'로 번역하였다.
auto가 생략된 사본은 알렙, B, 고대시리아역본, 이레니우스교부 등이며, auto가 나타나는 사본은 b C K, 어거스틴 등이다. B.M.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UBS, 1971)에 따르면 auto를 꺽쇠로 묶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자의 짧은 읽기가 강력한 사본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원본이 가능성이 높으나, 후자의 경우 필사자들이 auto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그 의미가 이미 함축되어 있다고 보고 생략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의 해석과 관련하여 auto가 가지는 중요성은 무엇인가 auto를 인정하면 하늘에 예수에게만 열린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구절(예수 위에 임하신 성령을 본 자는 예수 뿐이다-eiden이라는 단수동사를 사용했다) 과 절 조화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다음구절인 17절은 하늘로부터의 음성이 주위 사람들에게 들린 것을 말하고 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음성이 예수를 직접적으로 상대해서 말해졌는데 비해). 즉, 마태복음의 음성은 공적 public 이고 공식적 official 인 선포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16절 하반절에 나오는 열린 하늘을 모든 사람이 보았다고 하면 공적인 특징을 더 잘 드러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게도 된다.

그러나 본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특별히 체험하는 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환상을 보는 것과 음성을 듣는 것은 목적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사울 역시 하늘의 빛난 광채로 나타난 예수를 보았지만 동행하던 사람들은 음성만 들을 수 있었다 (행9:7). 본문은 환상을 본 예수와 음성만을 들은 주위 사람들을 구별하여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아 를 넣어서 번역하는 것이 본문의 뜻을 더 잘 반영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III. 사 역

13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으로 요한을 대하여 모습을 드러내시다.
14 그런데 요한은 예수를 애써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바로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당신이 제게로 나아오십니까" 라고 하였다.
15 그러자 예수께서 요한에게 "즉시 시행하도록 하시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되기 때문이요"라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허락하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러자 그에게 하늘이 열렸으며, 예수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의 위에 임하는 것을 보았다.
17 그러자 하늘로부터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사랑하는 자이다" 라는 음성이 들려 왔다.

IV. 주 해

< 13절 >

바로 앞의 11-12절에서 세례 요한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메시야를 예고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이미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1:18), 왕적인 메시야로 태어나신 (2:2) 이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기 위하여 나타나셨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15절 참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단순하게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고만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서 (누가복음은 요한에 의한 세례를 간접적으로만 암시하고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세례를 받기 위하여' (목적을 나타내는 관사의 속격 + 부정사 구문)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다. 예를 들어 마4:1에 예수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하여' 광야로 가신다.)

< 14절 >

예수가 받을 세례는 `죄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 (막1:4 ; 눅3:3)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14-15절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특수자료이다. 이 구절을 통하여 마태는 예수게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고 하는 점을 드러내려고 한다. 요한은 비록 큰 선지자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 (마11:11). 요한이 죄가 없어서 다른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요한 역시 자기보다 능력 많으신 이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아야만 할 죄인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특수한 임무,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을 하여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임무를 마치게 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의 활동과 예수의 활동이 세례 사건 이후에도 당분간 지속되고 있지만, 공관복음에서는 요한은 곧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요한은 다만 회개를 촉구할 수 있을 뿐이고 (마3:6 참조),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죽음으로 가능해진다 (마26:28). 그리고 예수의 죽음이 진정한 세례인 것이다 (마20:22 ; 막10:39 ; 눅12:50 참조).

< 15상 >

예수는 요한에게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독려한다. 요한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풂으로써 예수를 소개하는 사명을 디고 있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또는 메시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예수는 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됨의 권위 (internal authority)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어떠한 인물인지 드러낼 필요 (요1:31 참조)가 있었던 것이다(external authority).
그러나 요한도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몰랐기 때문에 주저하게 된 것 같다. 그서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뒤따르는 현상들을 통해서 공적이고 공식적인 방법으로 곧 선포될 것이다 (16-17절 참조).

예수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설득하신다. 여기에서 `의' dikaoosune란 말은 요한의 체면과 처신을 세워주고 덕을 세우려 한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의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사역읠 목적을 철저히 이루기 위하여 예수의 등장이 긴박해진 성취의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15하 >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13절에서와 같이 마태의 특징 있는 표현법인 `그대에' tote로 시작하는 도입부를 보게 된다. 그것인 도입부인 것은 앞서 지적한 대로 현재 시제의 동사가 쓰여지고 있어서 더욱 분명해진다 (각각 paragivetai와athiesin). 그렇기 때문에 마태의 편집적인 손길이 잘 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토록 주저하며 세례 받으려는 예수를 만류하던 요한은 이제 예수의 깨우침에 의하여 세례르 주기로 결심하게 된다.

< 16절 >

요단강 물에 몸을 담그는 세례 (사실은 침례)를 받으신 예수는 물에서 곧 나왔다. 그러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예수 위에 임했다. 그리고 음성이 들렸다 (17절).

여기서 '그러자'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는 kai idou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 ( )를 연상시키지만 훌륭한 헬라어 어법이기도 하다. kai idou는 마태복음(28회)과 누가복음에 많이 등장하는 표현법이다. 대체로 구약과 연관된 곳에서 사용되는데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kai idou는 보통 감탄사로 쓰이기 때문에 '보라!' (behold!) 등으로 번역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말이 쓰이면 무엇을 보라고 지시하면서 주의를 촉구하여 생동감을 더해 주는 분위기를 만든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놀랍게도 (예기치 못했는데) 하늘이 열리는 등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열림은 그것 자체의 의미보다는 그 다음에 나오는 현상을 위한 준비의 성격이 있다. 하늘이 열리고 그 후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음성이 들리는 사건이 뒤따르게 된다.

`열렸다' enewxthesan라는 말은 마가복음의 sxijomenous(갈라지다)라는 특이한 용어를 보편적인 단어로 바꾼 것이다. 마가복음이 sxijomenous를 굳이 사용한 것아나 막15:38에 성전 휘장이 찢어진 esxisthe것과 연계하여 십자가의 신학을 나타내고자 함인 뜻한다.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성전을 대체하는 구속의 죽임을 당하신 것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따라서 마가복음은 공생 준비 때부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백성의 메시야 되심을 공표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회는 오래 전부터 성령을 비둘기로 상징해오고 있는데, 비둘기가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이 형체로 (in bodily form) 비둘기같이 임했다고 함으로써 강력한 상징임을 보여준다. 비둘기는 일반적으로 평화와 순결을 상징한다. 그러면 여기에서도 그런 의미일까 구약성경에서는 비둘기가 이스라엘 (호7:11 ; 11:11)을 상징하거나 신부(아가서)를 상징한다. 모두 이스라엘 백성과 비교된다.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내려왔다는 것은 예수께서 그의 백성과 동일시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영이 나타난 이유가 분명해진다. 누가복음에서는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표현한다. 세례 때 임한 성령을 연상시키면서 누가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1-2를 인용하신 예수를 부각시킨다. 즉 예수에게 임한 성령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시려고" (눅4:18-19) 임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 모든 사역을 특징짓는 주의 은혜의 해는 아마도 희년을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더욱 더 성령이 비둘기깊이 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되어 그들을 위해 일하실 메시야의 출현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 17절 >

이 구절 서두에 다시 한 번 kai idou가 등장하여 하늘에서부터 들려 온 음성에 초점을 모으게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음성의 내용이다.

많은 번역은 outos estin o uios mou o agapetos en o euodokesa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또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를 기뻐하노라" 하여 o uios mou(my Son)와 o agapetos(the beloved one)을 합하여 하나 (my beloved Son)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두 칭호가 병렬로 쓰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이 구절의 구약 관련 본문을 보통 세 가지로 본다. 제왕시인 시2:7과 고난받는 종을 말하는 사42:1, 그리고 이삭의 희생에 대해 말하는 창22:2, 12, 16이 그것이다. 그런데 두 칭호를 하나로 보면 (my beloved Son), 시2:7에는 'beloved'가 없고, 사42:1은 eudokesa(well plesed)라는 말이 다른 말 (LXX에 psosedejato로 나타남)로 대치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나 마12:17-21에서 사42:1-4을 인용하면서는 eudokesa로 되어 있어서 다른 헬라어 번역 대본이 있었거나 히브리 원문에서 직접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22장의 이삭의 희생과 가장 관련이 깊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W.R. Stegner는 그의 책 Narrative Theology in Early Jewish Christianity에서 특별히 막1:9-11과 창22,의 LXX 번역을 대조하면서 이삭의 시험과 관련시키고 있다 (pp.17-20). 그리고 나아가서 beloved Son을 메시야 칭호로서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도를 통한 독특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보려 한다.

그러나 위 귀절은 두 개의 칭호가 병렬로 쓰인 것으로 보는 것이 (my Son, the Beloved One) 더 좋겠다. 앞에서 언급한 구약의 세 본문을 모두 합해서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시2:7에서는 '메시야의 아들'을, 사42:1에서는 `택한 자' (eudokesa는 하나님의 선택을 공표하는 의미가 있다)를, 창22:2, 12, 16에서는 `사랑하는 자'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선택된 메시야로서 그의 백성과 동일시된 존재임을 표현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시2:7에서는 공식적인 메시야의 대관식의 의미를, 사42:1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고난받는 종의 의미를, 창22:2가, 12, 16에서는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어 연관시킨다. 메시야로서의 공적인 선포는 마태복음에서만 하늘 음성이 주위 사람들 (bystanders)에게 들리는 것으로 표현되는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outos는 지시대명사이다.

V. 메시지

1.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세례는 대외적 권위 external authority 를 획득하기 위한 공적인 선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이신 예수도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인 등장이 필요했다. 우리도 세례를 받는다. 우리의 내적인 신앙을 사람들 앞에 공포함으로써 신앙의 사람임을 확신시킨다. 초대교회 당시나 신앙적 박해가 있을 때 세례를 받는 공적인 행위는 큰 위험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떠한가 너무 쉽게 세례를 베풀고 또 세례 받고 있지는 않은가 세례 받는 위식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도록 더욱 진지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2. 예수의 세례시에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여 음성이 들리는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주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경외로운 느낌 가운데서 예수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에서 행하는 세례 의식은 특별히 성례전적 의식이랄 것도 없는 단순 무의미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세례 받는 자가 엄숙하면서도 경건한 체험을 할 수 있는 분위기와 의식이 가능할까를 신중히 고려해 봄 직하다.

3.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신비적인 체험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태도를 가지게 될 지 모른다. 사실 소중한 영적 체험일간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일 때 왜곡되기 쉽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려는 자세와 동기가 더욱 필요하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본질보다는 현상적인 것에 매달리고 더 이끌리는 것을 보게 된다. 지나치게 영적 은사를 추구하고 그것이 참된 신앙을 보증하는 것인 양 스스로 속기도 한다. 진실된 마음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사를 저절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4. 우리는 왜 세례를 받으려고 하고 또 받고 있는가 예수는 자기 백성의 아픔과 문제를 공감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메시야의 사역을 위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이란 세례까지 감수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물)를 건너 광야의 시험(본문 다음에 나오는 시험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한 이야기가 배경을 이룬다)을 받아 실패를 되풀이하지만 예수는 세례(물에서 올라옴)와 시험에서 승리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성공적인 준비는 모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거룩한 공적 사역을 위해 헌신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우리는 어떠한가 성령이 임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듯이 세례를 받아야 교회에서 일할 수 있다. (적어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세례 받는 동기와 목적이 더욱 분명하고 겸허해야 되겠다. 자기를 비우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는 동기와 목적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신앙인들을 찾고 있는 것이 오늘의 사회의 현실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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