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병을 짊어진 예수 (마 08:16-18)

첨부 1


1. 주님이 행한 일들 중에는 먼저 병자들을 고치신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 중에 가장 큰 일은 병을 고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간곳 마다 그에 앞에는 건강한 사람들 보다 병든사람들이 많이 몰려 나왔습니다. 그 앞에 나온 병자들은 대부분 이 세상에서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행하신 치유의 소식을 듣고 몰려 나아 왔습니다. 그 가운데는 나면서 부터 소경된자도 있었고, 12년동안 혈유증에 시달리던 여인도 있었고, 중풍병으로 38년동안 누워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들은 다 예수님께로 부터 고침을 받고 건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세상은 온통 건강한 사람들 보다 병든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모든 병원에는 환자들이 언제나 꽉 차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됨에 따라 의학도 의술도 발달되었지만, 또 그만큼 예전에 보지 못하던 병들이 새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소위 공해로 인한 질환들이 세계 곳곳에서 새로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과실과 부주의로 인한 사고로 입원하는 환자들도 많아졌습니다. 해마다 증가하는 교통사고나, 산업재해들!, 그리고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인 한 각종 성인병과 문명병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질병들로 우리 인류는 고통 중에 있습니다.

어떤 병이든지 병은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건강을 잃으면 사람들은 모두 약해집니다. 제아무리 큰소리치고, 제아무리 힘을 자랑하든 사람도 병들면 자리에 눕게 됩니다. 그리고 기운은 점점 쇠약해져 갑니다. 결국 병으로 죽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모든 인생들은 병과 싸우다 죽게 되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병든자를 위하여 오셨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주님 스스로 말씀하기를 "내가 온 것은 건강 한자들을 위함이 아니라 병든자들을 위하여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건강 한자들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옳은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병든자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2. 병중에는 육체의 병과, 정신의 병과, 사귀들린 병이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육체의 병만 병인줄 알고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감각적인 통증을 느낄 때 만 앞은 줄 압니다. 그래서 육체의 병이 들면 치료비가 얼마가 들건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고 고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불치의 병으로 진단이 나면, 스스로 절망하거나, 포기합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병은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스트레스로 인하여 쌓이고 쌓이는 불만을 풀길 없어 정신적 갈등 속에 사는 사람들이 또한 많습니다.
서로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매일매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국 사람이 사람이 싫어져 스스로 자폐증 환자로 전락되어,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에게는 봄이 온들 즐거움이 없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들 아무런 감각이 없고, 세상사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런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 주님은 치유의 의사로, 그리고 위로와 기쁨으로, 영원한 부활의 생명으로 오시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병든자들을 위하여 오시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각색병든자를 다 고치시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친히 병을 짊어지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질병을 그가 맡아 대신 짊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치유의 종교요, 위로의 종교요, 해방의 종교요, 구원의 종교입니다. 모든 억눌린자들을 그 질고에서 해방시키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의료시설이 설립되었고, 무지함을 깨우치기 위한 학교가 세워 졌습니다. 그것은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885년 본격적인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호레이스 알렌이 의사로서 들어와 선교의 발판을 쌓아 놓았습니다. 만일 그 당시 알렌의사의 놀라운 의술이 고종 황제의 호감을 사지 못하였던들 우리 나라의 복음 전파도 그만큼 늦어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병이든지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질병의 고통에서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육체적 병이든지, 아니면 정신적 병이든지, 아니면 악령에 의한 병이든지 하여간 모두 병고 속에 허덕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정신 질환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상상 이외로 많습니다.
자신은 결코 정신의 이상이 없다고 하지만, 가만히 보면 모두 정신이상자들입니다. 디모데후서 3:1절에,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한 것 보면, 이 시대는 분명 <고통 하는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고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만이 있었던 때는 평화, Shalom 만 있었을 뿐입니다. Shalom 을 잃어버린 시대! 그것이 바로 가인의 후손의 역사란 말입니다.

이제 인간의 고통은 육신적인 것 보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통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멀어진 상태에서 오는 고통! 마치 탕자의 자유와 환락가에서 오는 허탈!, 그리고 그 자유행동의 주체였든 자아라고 하는 자존심의 상실! 이것이야말로 참기 어려운 심각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의 현대인의 병은 모두 이 자존심의 고통이요, 이 자존심의 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자존심의 병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분명히 하나님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닮은 존재, 자기와 교제할 수 있는 존재, 다른 동물과는 분명히 다른 그것들을 주관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의 존재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것이 다 누구에나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 만한 인간이 하나님을 부러 잊으러 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자기의 성을 쌓고, 자유라는 사탄의 허황된 꾀임에 빠져 스스로를 망쳐 놓은 것이 오늘의 현대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하나님 없이 높아진 자존심(自尊心)의 병입니다. 시날평지에 이르러 하늘에 까지 높은 탑을 쌓아 올리겠다던 그 자존심! 그것이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패망의 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보면 자존심이지만, 국가적으로 보면 패권주의요 자국 보호주의입니다. 공존 공영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지배하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원자탄을 만들고, 그래서 군비를 강화하고, 그래서 자국 보호주의를 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존심의 병은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을 믿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기 밖에 없습니다.
자기로 똘똘 굳어진 마음처럼 치유하기 어려운 병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은 말없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즉 십자가로 그 병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 자기를 세워 볼 때, 비로소 자신이 어떤 존재였던가 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완악하고 굳어진 나의 자존심의 고질적인 병을 고치기 위하여 말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계십니다. 그것을 늦게나마 깨달은자에게는지금도 하염없는 통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지난번 우리 교회에 와서 제직 수련회를 인도해 준 안산제일교회 고훈 목사의 목회 일기를 보면서 바로 이런 것을 느끼었습니다.
그는 폐결핵 3기 환자로 백약이 무효로 절망 상태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 사람입니다. 3번의 자살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있었을 때, 어느 권사님의 9번째의 전도에 그만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6년후 소명을 받아 [죽더라도 말씀을 공부하다 죽자]고 생각되어 결심하고 신학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까지도 그 생명은 연장되었고, 아무러한 일없이 목회를 하고 있으니, 그래서 그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 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자유문인협회] 한알의 밀알처럼으로 시인으로 등단하여 몇 권의 신앙 시집을 발간했는데 그 중에서 목회 일기라는 시중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폐결핵보다 더 무서운 병은
자존심이었습니다.
병고치시는 것은 즉석에서도 할 수 있었으나
내 자존심 고치는데 하나님은 10년이 걸렸습니다.
주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 자존심이 그토록 커서였습니다.
자식도 없던 권사님은
나를 영의 아들로 낳아 내 신앙 가문에
원조가 되셨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아마 지금 이 자존심의 병에 걸려서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하나님께로 벌써 돌아왔어야 할 사람들이 아직도 버티고 탕자의 돼지우리에서 쥐염 열매로 배를 채우듯,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으리라고 봅니다. 사람 앞에 손들고 나오라면 비참할는지 몰라도, 하나님께 손들고 나오면 새로운 세계가 전개됩니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잔치를 배설하고 소를 잡고 풍류를 울리며, 잃었던 영혼을 찾았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10년이든, 20년이든,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것을 늦게나마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삶은 [더해진 삶]이라고 감격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Ray Anderson 교수의(Fuller신학) 말과 같이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여 소위 Christ-Praxis, 그리스도께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즉 작은 예수가 되어 가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사명은 바로 이 Christ-Praxis, 작은 예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주님이 하신 가르치는일과, 전파하는일과,치유하는일을 계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복음입니다.
단순히 복음을 듣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작은 예수로 변화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곧 생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생활 신앙이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생활로 이어져 간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생활이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 들어나게 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