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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신랑 나는 신부 (마 09: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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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때 유대교는 그 껍데기가 어느 시대보다도 화려했습니다.

헤롯의 화려한 성전, 매일 같이 드려지는 화려한 제사,수많은 예배객들이 열성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제사장들을 통해서 성경이 낭독되고 율법학자들에 의해서 성경이 열심히 가르쳐지고 바리새인들은 경건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지 아니하고 옷에다 말씀은 주렁주렁 써서 달고 다니고 길을 가면서도 중얼중얼 말씀은 외우고 뭇 백성들을 향하여 무섭게 책망하고 비판한 종교적인 색채가 무성한 시대였습닌다.

그당시는 로마의 속국으로 그 억압에서 해방시켜서 다윗왕때의 화려한 나라를 건설해 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종말론적인 시대였습니다.

원수같이 대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소원에 맞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시는 행위와 말씀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에도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금식 문제에 대해서 따졌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다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때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바리새인들이 했던 대표적인 금식은 육신을 괴롭히고 금욕하는 것이고 경건이고 의식이고 율법이고 그들의 대표적인 종교 의식이였습니다.

 이런 것들을 안하면 무조건 정죄하고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 항의 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혼인잔치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인 것입니다.

혼인잔치날은 모두가 즐기는 날이고 기쁜 날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그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신부처럼 사랑하십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신부가 금식하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순 없습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은 나를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내가 죽을 것 대신 죽어도 주시고 사랑으로 나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생명을 주셨으므로 나도 목숨걸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 세상의 신랑 신부는 이혼할 수 있지만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는 절대 이혼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마치 바람난 아내 고멜이 호세아를 수없이 떠났지만 호세아는 끝까지 고멜을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은 언제나 변치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맞아 주시고 감싸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주님을 떠났을지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찾아 오십니다.

불가항력적 은총인 것입니다.

 사랑과 겸손과 평화와 기쁨과 자유를 체험하는 심령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가 있고 영으로 기도하는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을 뜨겁게 섬기는 사람 말씀속에 담겨진 깊은 뜻을 먹고 겸손과 온유와 평화의 열매가 있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예수의 향기가 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 예수님의 신부입니까 세상에는 아름다운 신부가 되기 위해 열심히 훈련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려면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자신을 말씀에 철저히 죽여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겉껍데기의 신부가 되지 말고 진실한 신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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