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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통곡 (마 26: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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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한 사건을 우리는 남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나의 이야기입니다.베드로는 예수를 죽이려는 원수들이 진을 치고 있는 빌라도의 법정 뜰에서 예수를 부인했지만 우리는 가정 속에서 부인했고 직장에서 부인했고 친구 앞에서 부인했습니다.그러니까 죄의 경중을 따진다면 우리가 훨씬 더 무거운 죄를 범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다가 대제사장들이 보낸 악당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간 예수님이 겪은 수모와 멸시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주님의 고생을 가지수로 계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태복음 26:67을 보면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라고 했습니다.
침 뱉었다는 것은 멸시를 의미하고 주먹으로 쳤다는 것은 인권 유린을 의미하며 손바닥으로 때렸다는 것은 조롱을 의미합니다.그리고 68절을 보면 “너를 친 자가 누구냐”하며 맞춰보라고 조롱했습니다,그러나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주님은 그 어떤 조롱에도,그 어떤 멸시에도 항변하거나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그러나 주님이 잊을 수 없었던 두 가지 사건이 었었습니다.
하나는 가룟 유다의 배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의 배신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예수님을 3년씩이나 수행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병 고침받고,빵 얻어먹고,기적을 목격했던 유대 민중들의 배신이나 조롱에 대하여는 침묵하실 수가 있었던 주님이셨지만 베드로나 유다의 배신에 대하여는 침묵하실 수가 없었습니다.그것은 그만큼 두 사람의 배신이 마음 아픈 고통이었고 상처였기 때문이었습니다.베드로에게는 미리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34절)고 예고해 주셨고 가룟 유다에게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불량배들이나 군중들이 가했던 매질이나 굴욕보다 두 사람의 배신은 더 마음 아픈 사건이었습니다.더우기 베드로의 배신은 견디기 어려운 배신이었습니다.그것은 베드로를 사람하고 신임했기 때문입니다.베드로가 열을 올리고 침방울을 튀기며 법정 뜰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하고 있을 때 주님은 그 소리를 다 듣고 계셨습니다.
사랑하고 기대했던 사람의 배신은 원수의 공격보다 더 가슴 아픈 법입니다.사랑하는 남자의 뒷바라지를 대학 4년 동안 그리고 미국에 유학가 있는 동안 해 온 어떤 여인이 있었습니다.그녀 자신도 학생이면서 그 남자의 홀어머니까지 모시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미국으로 보내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미국에서 딴 여자와 결혼해 버렸고 그녀는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배신당한 그녀가 남긴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경험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배신이다.”
베드로는 법정 뜰에서 큰소리로 갈릴리 사투리까지 섞어가면서 예수를 부인했습니다.그러니까 죽어도 같이 죽겠다던 베드로의 호언 장담은 말짱 거짓말이었던 것입니다.우리는 여기서 한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발견하게 됩니다.그리고 그누구라도 위험 앞에 직면했을 때 베드로가 될 수 있다는 불행한 가능성도 발견하게 됩니다.조변 석개(朝變夕改)란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들이야말로 순간순간 변하고 그리고 뉘우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세 번씩이나 당돌하게 부인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초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으며 대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본문 75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만일 베드로에게 75절이 없었더라면 그는 가룟 유다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는 한 구절 말씀이 위대한 베드로를 만든 것입니다.
우린 75절 속에서 베드로의 세 가지 행동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생각나서”라는 말씀입니다.즉 그는 주님께서 네가 오늘밤 닭 울기 전에 세번 씩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그 말씀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났을 때는 새벽녘이었고 곧 닭이 울었습니다.베드로는 그 닭의 울음 소리를 듣는 순간 주님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 것입니다.오늘도 그 닭소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고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그 소리를 듣고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도 있고 생각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닭의 울음 소리를 듣고 주의 말씀이 생각났지만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도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도 주의 말씀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정원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가서 책을 읽으라”는 이웃집 소녀의 노래를 듣고 집안에 들어가 성경을 펴서 읽은 곳이 로마서 13:13-14이었다고 합니다.어거스틴은 소녀의 노래 소리를 듣고 확신과 새로운 삶을 결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이 생각나서 사람은 타락할 수 없었습니다.그리고 타락했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밖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씀이 생각나는 순간 곧이어 법정 뜰 밖으로 나갔습니다.
베드로가 밖으로 나갔다는 것은 예수를 부인했던 현장과 공포에 질려 자신을 가누지 못했던 패배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리고 그것은 죄 짓고 살던 그곳으로부터 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베드로처럼 타락과 불신과 범죄의 현장에서부터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룟 유다처럼 주님을 떠나 범죄의 현장으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범죄의 현장 밖으로 나가면 용서가 있고 구원이 있지만 예수를 떠나 범죄와 타락의 현장으로 나가면 징계와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가룟 유다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가룟 유다도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만찬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그 자리에서 주님은 구체적으로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길 것을 말씀하셨고 경고까지 했습니다.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날 밤 그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갔습니다.그리고 곧바로 예수를 팔아 넘기기로 약속한 악당들에게로 갔습니다.
베드로는 악의 소굴을 떠나 회개의 자리로 나갔고 유다는 주님이 베푼 만찬석을 떠나 타락의 길로 나갔습니다.그 결과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유다는 목메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예수 밖으로 나가지 맙시다.그리고 어서 빨리 죄악의 현장 밖으로 나갑시다.더 이상 머물렀다가는 멸망하게 될 악의 소굴로부터 탈출합시다.
세째는 “심히 통곡”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61을 보면 베드로가 세번째 주님을 부인했을 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찬석에서 주님은 가룟 유다를 바라보았습니다.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빌라도 법정 뜰에서 주님은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그 시선이 베드로에게 닿는 순간 베드로는 말씀이 생각났고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심히 통곡했다”는 사실입니다.
죤 칼빈은 베드로의 통곡을 가리켜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여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을 바라보며 흘린 눈물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쏟아진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주경가는 “베드로의 통곡은 대장부의 통곡이었으며 철저한 회개의 통곡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베드로의 통곡이 단순한 눈물이었다면 그것은 감상에 젖은 한낱 넋두리에 불과했을 것입니다.여기서 말하는 통곡이란 통회라는 말과 같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이유는 통회의 결과로 통곡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통회란 말의 뜻은 “부스러뜨린다”,“으스러뜨린다”라는 것입니다.진정한 통회는 나 자신을 부스러뜨리는 것이며 으스러뜨리는 행위입니다.그래서 내가 부서지고 깨어지고 절름발이가 되는 것입니다.그리고 나면 창조자이신 주님께서 나를 새로운 그릇으로 만드시고 새로운 존재로 창조하시는 것입니다.그날 거기서 베드로의 통곡이 없었더라면 베드로의 영적 생명은 그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우리들의 이야기로 바꾸어 봅시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했다면 우리는 삼천만번 주님을 부인했습니다.베드로는 원수들에게 에워싸인 공포 분위기 속에서 주님을 부인했지만 우리는 잘먹고 잘살면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말로도 예수를 부인했고 마음으로도 예수를 부인했고 행실로도 예수를 부인했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죽을 죄인이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그날 자신을 에워싸고 협박하는 일당들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두려워했더라면 그런 실수를 저지르진 못했을 것입니다.우리의 잘못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세상이나 권력이나 물질이나 유혹이나 시험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하나님을 떠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하게 귀를 기울이고 베드로의 심금을 울렸던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야 합니다.그리고 지금 당장 머물러선 안 될 곳을 떠나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그리고 통곡해야 합니다.베드로처럼 타락의 장소로부터 떠날 수도 있고 가룟 유다처럼 주님의 품으로부터 떠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사는 길은 죄로부터 떠나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주님은 자애로운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칼빈은 주님의 시선을 가리켜 “마음을 꿰뚫는 성령의 은밀한 능력을 동반하는 눈길이라”고 했습니다.주님의 그 눈길을 바라보고 내게 주신 말씀을 생각합시다.그리고 지금 밖으로 나가 통회합시다.나를 깨뜨리고 부숴뜨리고 산산조각 냅시다.그리고 용광로에서 제련된 금이 쏟아지듯이 새로운 존재,거듭난 존재로 태어납시다.대장부 베드로의 통곡 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그리고 우리도 베드로처럼 통곡하고 새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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