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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엠마오로 가십니까? (눅 24: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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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동행하고 계시는데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상태로 절망을 안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복음서에는 이와같은 내용과 대치되는 또 하나의 사건이 누가복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12살 되던 시절에 유월절 행사 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부모님과 함께 다녀 오다가 수많은 군중들 틈바구 니에서 예수를 잃고 방황하는 사실에 대하여 누가복음 2장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서 이러한 영적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해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느 끼지 못하고 살아가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더 나아가서는 절망하는 우리 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주님께서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내가 가는 삶의 길목에 동행하고 계 시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동행하는 줄로 착각하다가 엄청난 실수를 일으킨다거나 그 일이 주님의 뜻이 아닌데도 주님의 뜻인양 행하다가 주 님의 뜻을 너무 멀리 떠나있는 상태에 빠지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지금 본문에 있는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고 하는 마을로 내 려가는 두제자를 보게 되는데, 그들의 이름은 한 사람은 글로바요 또 한 사람은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두인물에 대해 주석가들 과 신학자들은 정확하게 누구라고 규정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두 가지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첫번째의 해석은 그들이 12사도에는 들지 못했지만 주님이 십자가에 달 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를 지켜본 사도의 그룹에 속한 자들이라는 해석이고, 두번째 해석은 부부였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길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여 가다가 집에 주님을 모셨다는 기록이 이를 밑바침하여 주고 있습니다.

여하튼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 예루살렘을 벗어나 엠마오로 가고 있는 것 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약 7마일 정도의 거리로서 보통 사람 이 걷는 걸음으로 2시간 남짓 걸어야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이 거리를 왜 두 제자가 걸어가고 있을까요 그들이 제자의 그룹에 속해 있는 자라는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3년 반이나 예수님을 따 라다닌 제자들이었습니다. 오직 예수 밖에는 세상의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 고 믿고 따른 자들입니다. 본문전에 21절의 기록을 보면 그들은 예수 그 리스도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라고 완전하게 믿고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흘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위에 처형되어진 예수를 보고 자 기의 소망과 기대감이 완전히 무너져 기쁨대신 이제는 슬픔을 안고..., 소 망대신에 절망을 안고..., 능력대신 무능력을 안고서... 엠마오 길로 내려가 고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믿고 있지만 믿는 동안에 자기가 상 상할 수 없었던 어떤 일이, 믿음의 앞길에 나타나면, 이처럼 뒤돌아서서 엠마오 길로 향해 버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관과하 지 않으면 안됩니다.

실제로 세상 길로 가지 않았을 지라도, 마음으로는 엠마오의 길을 서성거 리거나 걸어보지 않은 성도는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이 두 사람은 자기가 직접 보지 않은 일은 마음 속에 믿지 못하는 약점 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 도의 부활을 목격했노라고 증거를 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믿지 못한 것입 니다.

여인들이 부활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33절 이하를 보면, 그들이 예루살 렘으로 돌아가 보니 벌써 열한 사도와,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자 들에게 또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부활이 믿어지지 않아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다는 사 실입니다.다른 사람은 은혜를 받아도 엄청나게 받았는데, 다른 성도는 내 적으로 외적으로 변화를 받아 새로운 ㅅ을 살고 있는데, 자신은 더디 믿는 마음때문에 머리로는 수긍을 하고 긍정을 하지만 마음으로는 믿을 수 없 는 자들이 바로 엠마오 길의 두제자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먼저 믿었고 남이 나중에 믿었지만 받은 은혜가 크다는 사실을 말할 때... 자신의 체면 때문에, 입술로는 긍정하지 만 마음으로는 믿어지지 않고 수긍하지 못합니까... 지금 그런 사람은 이 미 엠마오의 길로 수마일이나 걸어와 버린 자입니다.

 그들은 바로 사흘 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끔찍한 사건을 통하여 그들 가 슴 속에 분노와 비애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 습니다.

그 사건을 목격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를 끝까지 따르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가 십자가의 사건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들 마음속에는 이상한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과 연 지성의 도시, 종교의 성지 예루살렘에, 그리고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이 움직이고 있는 예루살렘 사회에 과연 양심이 살아있는 것일까 올바른 진리를 외치는 자는 저렇게 이단자가 되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를 죽이되 그것도 불법으로 침략하여 무력으로 인권과 주권을 짓밟고 있 는 로마병정들에게 자기 동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예수를 내어주어 십자 가 위에서 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이땅에 약자가 설 땅이 어디이 며, 사회정의는 어디있으며, 무엇이 신앙이며,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무엇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 하는 회의적인 신앙의 갈등과 모순이 그의 가슴 속에 느껴진 것입니다.

무엇이 애국이며, 무엇이 불법인가... 하는 가치관의 혼동이 그들의 가슴 속에서 일어났다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사소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면, 우리는 곧 "교 회가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며, 엠마오의 길로 가려는 준비를 서두르는 사 람도 적지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님이 이럴 수 있느냐, 장로님이, 권사가, 집사가 그것도 평신도도 아 닌 직분자가 그럴 수 있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혹시 엠마오의 길로 가려하는 자는 없습니까...

이와같은 마음이 이 두 사람에게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벗어나고 있 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악한 세상의 모습과 불의를 보고도 말 못하고 죽 음이 두려워 떠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의 내면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울 분과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오직 예수만이 이 세상의 소망이라는 확신마 저 포기한 채 엠마오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어떤 일이 생겼는지 살펴 보면서 우 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더욱 오래 있고 싶어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29).

본문 29절의 말씀을 보면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 이다라고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경강해 말씀 을 통해 심령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그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더 듣고 싶 어서 열정적으로 메어달리게 된 것입니다.

아직은 그가 예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말씀이 놀라워서 길을 가려하시는 것을 만류하고 강권하여 모시고 갔다는 기록 이..., 그와 함께 있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막 1장에 나오는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고, 주님과 함께 오래 있기를 원하 였습니다. 여리고 성의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그러하였습니다. 베다니에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그러하였습니다. 세금장이 삭개오 가 그러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기를 요청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눈이 밝아져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31).

오늘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생활 속에서 제일 먼저 되어져야 할 일이 있 다면, 우리의 눈이 밝아져 예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처럼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도 우리의 영안에는 하나님 보좌 우편 에 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변화산에서 기도할 때의 베 드로처럼 믿음의 눈이 열려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 그리스도가 눈에 보 여야 합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처럼 눈이 열려 불말과 불병거와 영적 군 사들이 우리 눈에 보여야 합니다.

다메섹 도상으로 나아가는 사울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처럼 우리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의 실체를, 지금 이곳에 임재해 계시는 주 님을 느껴야 합니다. 모세처럼 눈이 열려 시내산 가시덤불의 불붙은 광경 속에서 하나님의 실존을 깨달아야 합니다.

계3:18절을 보면,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 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했습니다.

뜨여지지 않는 우리의 눈을 위해 안약을 사서 발라서라도 보아야 합니다.

 셋째, 그들은 속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32).

이 두제자는 가는 길목에서 주님인줄은 몰랐으나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25절의 말씀을 보면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 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는 심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더디 믿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믿음에 이르는 속도가 너무 늦다는 말 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줘도 마음문이 열리지 않기 때 문에, 한가지를 믿는데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들의 마음이 열리고 이젠 눈이 열렸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더디 믿어지는 상 태를 벗어나 믿음에 이르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의미입니다. 뜨거운 불일수 록 물건을 태우는 속도가 빠르고 쉽게 태우듯이 쉽게 믿어지는 마음의 상 태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더 깊은 의미로 말한다면,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의심을 가져다주는 불신 앙이 완전하게 타 없어져버린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뜨거운 목욕탕이나 뜨거운 불옆에 있으면 뜨겁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 는 것처럼, 오로지 예수만이 은혜로움으로 그 심령 속에 충만해졌다는 의 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쉽게 믿지 못하는 더딘 마음이 있는데 도...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더디 믿는 자신을 향해 자기 스 스로 나는 매사에 신중하게 대하는 태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리화시키고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자신은 이성적으로 사리분별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함부로 믿 지 않는다면서 더디 믿는 일을 스스로 추켜 세우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 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져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이 귓전에 들려와도 입술로는 커녕, 마음 속으로라도 아멘의 반응이 없는 자는 분명 마음이 뜨거워져야 할 사람입니다.

 넷째, 그들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이 생겼습니다(33).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는 베드로의 예수 부활 목격과 그 외의 많은 신앙인으로부터 부활 소식을 들었으나 믿지 못하던 그들이 엠마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는 당장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자기들처럼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외치게 된 것입니 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가 분명 오후였습니다. 거의 두시간 이상을 걸어왔습니다. 그러기에 다시 밤길을 두 시간이나 걸어서 예루사렘을 향해 간다고 하는 사실은 우선 마음적으로 대단히 먼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피곤하기 때문에 집에서 쉬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밤이 지나고 다음 날, 날이 훤히 밝으면 가고자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열리고 마음이 뜨거워진 그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밤길을 걸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 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외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러한 사람들이 필요 합니다.

고후6:1절에서 주님은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하나님과 함 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받은바 은혜를 속으로만 삭이지 아니하고 나가서 외치는 은혜받은 자를 주님이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왜 이와같은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요 물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까닭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본문 속에서 우리는 몇가 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을 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모든 성경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아니라 성경전체를 통한 진 리의 흐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성경만을 받아들이는 자는 신앙이 잘못되거나 이단사설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성경은 전체적 의 미를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로 위험한 것입니다.

또한 성경전부의 흐름이 누구를 말하고 있는가를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 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어떤 사람이 보화만 사지않고 밭 전체를 샀듯이 성경전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그는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자세한 설명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대강 알고 지나가서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알아도 자세히 알고 믿어도 확신있게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가끔 이와같이 엠마오 도상에 놓인 신앙 상태에 이를 수 가 있을 것입니다.

 금년을 지나면서.. 여러분은 어디에 서 계십니까 혹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는 자들의 틈에 끼어, 나설 차비를 하고는 있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벌써 주님을 등지고, 엠마오의 길을 수십마일 걸어 오셨습니까

엠마오의 길에 서셨다면,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의 호된 꾸중을 들으셔야만 합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하 는 주님의 꾸중을 듣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걸으셨다면 말씀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야 합니 다.

비록 고난이 있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주님을 증거하며 주를 찬양하 는 삶으로 돌아 가야합니다.

 한때, 베드로도 주님을 등지고 로마를 떠나려 했습니다.

생케비취가 쓴 유명한 '쿼바디스'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위대한 업적을 이 룩한 후에네로 황제의 박해에 못이겨 또다시 약해져서 로마를 떠나 아비안 가도를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그는 발걸음을 멈췄습 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때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로마의 반역하는 백성을 위해 두번째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가노라 그런데 너는 어디로 가 느냐"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다시 한번 뉘우치면서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는 길이 어렵고 거칠어도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님의 물 음을 들어 합니다. "지금 네가 어디로 가느냐...."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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