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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요 (암 05:21-24,엡 04:25-32)

첨부 1


그리스도인들은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 성령 하느님, 이 삼위가 한 분 하느님이시고 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으로 이 세상 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들과 함께 사시고 활동하셨습니다. 예수 님이 승천하시고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동안 성령이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우리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이 존재하시는 모습은 예수님의 존 재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오셔서 존재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 시는 하느님이시지만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의 모습으로 계시는 분 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존재방식을 두고 내재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말은 '안 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는 개인의 마음 속에 와 계십니다. 그는 교회 공동체 안에도 와 계십니다. 그리도 또 중요한 사실로 성령은 이 세계 안 에서 계시면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우리 신자들과 관계에서 성령의 존재 방식에 관하여 성서는 두 가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 실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이 거룩한 집이 라면 만일 우리 속에 하느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계시다면 우리는 하느님 의 성전이다는 것이 논리적인 귀결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바울이 진지 하게 생각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다 라고 말했습니 다.

"여러분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 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고전 3:16-17)

그 다음으로 성서는 우리가 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표현도 합니다. 성령 이 우리 속에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 인간을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말한다 면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누구냐를 정의하는 데에 기준이 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 도인이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 라고 한 바울의 말은 적절하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요"라는 권면을 봅니다. 우리가 성령을 슬프게 한다는 말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이 우리 인간과 꼭 같이 희로애락을 느낄수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있는 말입 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희로애락을 느낄수 있는 인 격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시고 있는 성령을 기쁘게도, 슬프게 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못하면 성령이 슬퍼하신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 이 오늘 본문 말씀의 암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하면 기쁘시게 할까 하는데 대하여 관심하 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본문에 있는 문제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성령이 슬프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 다. 우리가 이 문제에 바르게 대답하기 위하여는 성령이 누구인신가 하는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치고 성령 이 누구신가에 대하여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령이 어떤 분인가 하는 문제를 반성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 다. 성령은 누구십니까

성령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실때 그의 제자들에게 고별의 말씀을 하실 때 그가 떠나는 대신에 다른 분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그 분을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해하기 쉬운 말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공동번역에서는 "협조자"라고 했습니 다.1) 그 다음으로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셋째로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이지만, 성령은 우리를 화해시키고 하나로 만드는 영입니다.

성령이 이러한 분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이 슬퍼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의 중요한 실마리를 찾을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 성령이 우리의 협조자라고 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슬프게 하는 것이 됩 니까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 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우리가 약하고 부족하여 그것을 따 를수 없을 때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이 그것을 바로 판 단하게 하고 우리를 힘을 주어 실천할 수 있게 도와주고 협력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그러한 성령의 도움, 지시를 받고 따르기를 거부한다면 성령을 슬프게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협력과 지도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성령 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갈 6:1)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성령을 슬프게 할 뿐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떠나는 결 과를 낳을 것입니다. 성령이 부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고, 무엇이 악마의 뜻이며, 무엇이 옳은 일이고 그른 일인가를 잘 몰라 혼란 속에 있을 때, 우리가 시련을 당해서 고난을 당하여 힘들어할 때, 우리가 슬픔을 당하여 상처를 받고 있을 때, 우리가 낙심할 때 등등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이 때 성령게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줍니다.

우리가 슬픔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슬픔을 당할 때,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위로를 거부하고 계속 슬퍼하면,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을 잃었을때 약해집니다. 우리가 이 때 정말 하느님께 매달 려서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낙심한다면 우리는 성령 을 슬프게 하고 염려케 하는 처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시련을 당했을때 성령이 우리를 힘을 북돋아주셔서 그 시 련을 이기게 합니다. 희망을 다시 붙여주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지시, 협력, 도움을 무시하고 시련에 회의에 빠지고 불신에 이른 다면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고 성령을 거스러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에베소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우리 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다"(엡 2:2)고 했습니 다. 우리가 힘으로 산다고 할 때 많은 경우에 악마의 지시대로 사는 경우 가 없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어기고, 거슬러서 사는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을때 악마가 와서 하느님께 기도하여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유혹, 높은 성전 꼭데기에서 뛰어 내리라 는 유혹, 악마에게 한번만 절하면 온 천하의 주권를 주겠다는 유혹 등이 찾아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 유혹들을 물리쳤습 니다. 이런 유혹들이 우리들에게 찾아올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성령께 기도하여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합니까 우리 자신의 목전의 이해관계를 위해 우리 마음대로-실상은 악마의 뜻대로-결정하는 때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지시대로가 아니라 악 령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이 됩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이 아예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기 조차하지 않는 사 람들도 많은것 같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자신의 판단, 경험, 지식, 지혜, 힘으로 판단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 다. 우리가 정말 오늘 이길수 없는 상황, 시련을 맞아서 우리가 기도하여 성령의 도우심과 '상담'을 구하지 않는다면 성령은 슬퍼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기 전에는 악령의 지시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그의 지시에 따라서 살 아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슬픔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처 해서 '이 산 저 산을 쳐다볼 때 아무데서도 도움이 오지 않는다'(시 121) 는 시편 표현과 같이 우리가 슬픔에 처해서 정말로 위로를 어디에서도 얻 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그런데 오직 하늘과 땅을 지으신 야 훼 하느님께로 부터 도움과 위로가 온다는 것입니다. 성령에게서 도움과 위로가 온다는 말입니다. 그가 위로자인데 우리가 그 위로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우리는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의 영이 슬퍼합니까 진리의 영이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 리스도의 진리를 기억나게 하는 일, 깨닫게 하는 일, 그것을 행하도록 충 동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성령이 기억 나게 하고 깨우쳐 주는 진리를 무시하고 등한시하며 거스런다면 슬퍼하실 것입니다.

진리에 반하는 말을 하고 행동하는 것이 성령을 기쁘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예수님의 구언의 진리입니다. 해방의 진리라고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진리를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진실, 참 등 을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말하 고 행동하고 진리를 따라 산다고 할 때 그것은 진실된 말, 참된 말, 사실 을 말하고 행동하고 그것에 따라 산다고 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직이라는 것은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의례히 거짓말하는 것이 상 식이 되어 있는 듯 합니다. 특히 장사를 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거짓 말을 하지 않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동네에 늘 오시는 채소과일 장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은 예수를 잘 믿는 기독교인입니다. 전에 고등학교 교사를 지낸분으로서 훌륭한 인격자이고 저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분 입니다. 그런데 제가 과일을 사러가면 이 분은 늘 '목사님게는 값을 다 받을수 없으니까 가져온 값보다 밑지고 팝니다' 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분의 호의는 고마와하지만 그의 말을 믿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런 말이 늘 부담스럽게 여겨져서 부르는 값보다 더 얹어주곤 합니다.

1세기대의 쿰란의 문서에 의하면, 성도들이 거룩한 영이 악한 혀로 더 렵혀져 있다(contaminated)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영과 정신이 악한 말, 불의하고 더러운 말, 폭력적인 말로 물들어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살벌합니까 우리의 언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 니다. 우리는 언어의 폭력이란 문제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경 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형제자매에게 바보라고 욕하는 것만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교훈하지 않았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시다고 할 때 우리가 과연 나쁜 말을 할 수 있을 까요 제가 며칠전에 택시를 탄일이 있습니다. 그 기사가 나를 돌아보면 서 '목사님이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내가 목사인것을 아는가 하고 저는 잠시 의아했는데, 그것은 제가 휴대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전화 대화에서 짐작했으리라고 금방 풀렸습니다. 그런데 분이이 조금전에 어 떤 자가용 운전자와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건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 던 모양입니다. "저도 교회에 나가는데 교인이면 친절한 말을 하고 다른 사람과 싸워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싸웠습니다. 그렇게 하 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처음부터 욕을 하고 대들었습니다. 그 래서 저는 차를 세우고 내려서 한 바탕 했습니다 그 사람이 덩치도 크고 힘도 세어 보여서 더 이상 싸울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잘못 했다고 사과 를 하고 말았습미다만, 사실 제가 잘못한게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지요 이렇게 물었습니다. 정말 도움을 달라는 질문으로 들려서 제가 이렇게 말 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특히 서울 같은 곳에 살다보면 짜증도 많이 납니다. 별의별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정말 화를 내 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키가 작아서 그런지 성질도 급하고 화를 잘 내는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 게 성질을 잘내는 것은 확실히 기독교인에게 어울리지 않고 덕스럽지 못 합니다. 미국의 '퀘이커'신도들은 '화가나면 속으로 천천히 열번을 헤아 려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러는 사이에 화가 가라앉게 되고 감정에 사로 잡혀 실수하는 말을 하지 않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해 주었더니 그 사람이 정말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진실만을 말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진실을 왜곡해서 말하 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 중에는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 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요즘 매스컴에서는 사실을 많이 왜곡해서 보도합니다. 언론뿐만 아닙니다. 성직자이자 대학 총장이 라는 사람도 사실을 왜곡하는 말을 하여 우리사회에 큰 물의를 빚고 있습 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줄줄이 잡혀가게 하고 있습니다. 증거를 대라고 하니까 고해성사에서 들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고해성사에서 나온 이야기 를 성직자가 어떻게 공개할 수 있습니까 그런 성직자는 교회법으로 처벌 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북한 김정일 비서에게 방학금을 받은 교수가 있다 고 했습니다. 그가 그런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김정일이 장학 금을 주는걸 현장에서 목격하였거나 둘 중에 하나가 아닐까 의아하게 생 각되었습니다. 제가 주일학교 선생이었을 때 기도 끝나고 나서 어떤 아이 가 "선생님 저 아이가 기도할 때 눈떴어요." 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 가 '너 어떻게 아니' 하고 물었더니 "제가 봤어요."하더군요. 기도할 때 눈을 뜬 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도 기도중에 눈을 드고 봤기 때문이죠. 성 직자는 현행범이라도 받아주고, 감싸주며, 도피 시켜주고 보호해 줄 책 임이 있습니다. 교회가 도피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직자가 증거도 제 시하지 못하는 말을 해서 그렇지 않아도 고립무원으로 주사파로 몰려 체 포되고 있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 신부총 장이 증거도 없이 말하는 것을 사실 왜곡이라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성직 자는 참말을 해야하고,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욕설, 거짓, 비방, 싸움 등 이런 것들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고 참말이 아니 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화해시키고 하나되게 하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이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 대로 보존토록 노력하라"(엡 4:3)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이 하 나되게 하는 일을 하시는 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떨때 성령이 슬퍼 하실까요 우리가 싸우고 분열되고 원수 맺고 할 때 성령은 슬퍼하시게 됩니다. 매우 불행하고 역설적인 것은 사랑의 공동체라는 교회 안에서 파 당이 생기고 싸우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에만, 한국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 고린도 교회 안에서 분쟁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교리 문제로 싸움이 있을수 있습 니다. 또 교회 안에서 목사파, 장로파, 등등으로 나누어 져서 싸울 수 있 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바울파, 게바파, 바나바파, 그리스도파 등등 여러파로 나누어져서 서로 불신, 반목, 비난, 싸움을 했 던 것 같습니다. 현대판 고린도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많 은 그리스도인들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보다는 먼저 성 령을 슬퍼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의 두가지가 개인의 내면에서 개인적 삶에서 성령을 슬프게 하는 문 제에 관한 것이라면, 마지막 것은 사회적, 공동체적 삶에서 성령을 슬프 게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로 만드는 것, 화해시키 는 것, 일치시키는 것,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서 하나가 되는 행동 의 윤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서 살던지 하 나로 만드는 사람들, 화해시키는고, 중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 하고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라 지고 싸운다면, 성령을 아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화해시 키고 하나가 되게 하지 못할때 성령은 슬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한 몸 의 지체들입니다. 그런데 이 지체를 분열시키고 해칠때 성령은 슬퍼하게 됩니다. 남을 헤치는 말, 화내는 일 등은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욕설, 격정, 분노, 고함소리, 온갖 악의의 말, 이런 것들 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을 버려야 하는 이유는 물론 그런 말들 이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것이 공동체를 해치고 같은 성도들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 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는 여러가지 회의들을 많이 합니다. 교 회가 민주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좋은 회의문화 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회의의 매너가 좋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고 실망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말을 하기 전에, 회의에서 발언을 하 기 전에 내가 하는 이 말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냐, 유익하게 하는 것이 냐, 이 말을 듣는사람에게 상처를 줄 것인가 상처를 싸메주는 말인가 하 는 질문을 묻고 말을 한다면 그 회의는 질서정연하게, 화기애애하게 잘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회의가 싸움으로 발전하고 고함소리가 나오고 심지어는 욕설도 나오고 회의가 무질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이 평소에 우리 자신이 하느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다라고 의식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 우리가 얼마나 이 말을 진 지하게 여기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 성령을 우리가 모시고 살고 있다는 것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 자신의 존재를 아주 소중하 게, 아주 거룩하게 여기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함부러 우 리 마음대로 아무 일에나 내맡길 수 있습니까 우리 몸을 욕망에나 세상 의 허영같은 데에 함부러 내 맡길 수 있습니까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 거짓, 불의, 악, 온갖 술수를 말하고 행하는것, 술취함, 방탕, 음란, 등등 이런 것들은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이 틀림없는 일입니다. 우리 자 신이 성령의 전이라는 것을 의식한다면 우리가 정말 함부로 자신을 취급 하지 못함은 물론 우리가 함부로 나쁜 말을 하지도 못하고 함부로 행동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슬프게 하기 보다 기쁘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맙시다. 오히려 그 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힘씁시다.

-- 설교를 듣고 응답하는 기도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절망으로 흘리는 눈물 닦아주시고  거짓 진리에 흔들리는 심령 잡아주시며  분쟁으로 갈라진 마음 하나되게 엮어주시는  성부 성자 성령 일체로 역사하시는 주님께 슬픔 아닌 기쁨만을 드릴 수 있는 삶을 묵상하며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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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옛날에는 영어로는 상담자(counselor)라고 하고 우리 개역성서에 는 보혜사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요즘은 대체로 협조자라고 번역하고 있습 니다. 이 말은 한 단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말로서 여러가지 의미로 번역 될 수 있습니다. 조력자, 상담자, 보호자, 변호자, 지지자, 위로자 등으 로 변역할 수 있는데, 권위있는 현대 영어번역성경에서는 "변호자" (Advocate)라고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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