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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 (계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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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헬라의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우스 신에게 아주 예쁜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딸을 가리켜서 새벽의 신 혹은 에우스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에우스가 트로이 왕자였던 티토니우스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이 둘은 결혼을 약속을 하고 아버지 제우스에게 결혼 승낙을 얻었습니다. 사랑스런 딸의 결혼을 맞이한 아버지는 딸에게 결혼 선물을 하나 줄려고 마음 속에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딸에게 “얘야! 내가 네 결혼 선물을 주려고 하는데 네가 무엇이든 청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딸이 한참을 생각한 후에 아버지에게 “아버지! 이왕 선물을 주실려고 하면 좀 어려운 청이지만 이렇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냐” “다름이 아니오라 저는 신이기 때문에 오래 살수 있지만 그러나 티토니우스는 사람이기 때문에 60년 80년 많이 살아야 100년밖에 더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남편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도록 해 주세요” 요청을 했습니다. 땅의 간청을 아버지는 쾌히 허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티토니우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둘은 결혼해서 재미있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우스는 신이기 때문에 늙지 않았지만 티토니우스는 사람이기 때문에 점점 늙어갔습니다. 40년 50년 60년이 흐르면서 얼굴에 흰 머리카락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굵은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허리가 굽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움직이지 못하고 뒷 방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에우스는 후회를 하엿습니다. 아버지에게 소원을 말할 때 한가지를 빠뜨린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이 오래 사는 것만 소원했지 병들지 아니하고 늙지 아니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부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에우스는 남편의 시중을 드느라 말할 수 없는 고생만 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사람들의 욕망을 나타내는 이야기 입니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영원히 살고픈 인간의 욕망이 이런 신화로 나타난 것입니다.

1. 지상생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마지막은 영원히 사는 것으로 마감을 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삶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표현을 함으로써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축복이나 치유나 능력의 고백이 아니라 영생의 고백으로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역시 생명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생명, 이웃들의 생명, 피조물들의 생명에 대해서 아주 귀하게 여깁니다. 전 9:4은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사도신경은 영원한 삶을 고백하므로 삶과 생명에 대해서 적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먼저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는 만약 영원한 삶을 이렇게 중요시 여긴다면 흔히 우리가 말하는 지상에서의 삶과 죽음 저편의 영원한 삶을 이중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하므로 죽음 저편의 영원한 삶은 값지고 의미있게 생각하지만, 이 지상에서의 삶은 별로 가치 있는 삶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생각들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경에서 말하는 가르침과 거리가 멀며,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으로도 결코 받아들이 수 없는 것입니다.

희랍어에는 삶을 표현하는 두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상적인, 제한적인,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표현되는 ‘비오스’가 있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삶을 의미하는 ‘조에’가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의미를 볼 때는 ‘조에’를 사용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한복판에서 생명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상의 한계상황에서 살고 있으며, 삶의 많은 도전을 받고 있지만 그 속에서 영원한 삶, 생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영생의 삶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을 동경하고 그 영원을 희망하는 우리의 현재적인 삶을 경멸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현재의 삶은 곧 미래의 삶과 연속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세상이 너무나 괴롭고 억울해서 어서 죽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참지 못하여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죽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죽음은 생의 종결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생처럼 허무한 것이 없으며, 무가치한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인간의 생이 가치있는 것은 그것이 곧 영생으로 가는 발판이기 때문입니다.
눅 18:18에 어떤 관원이 예수께 와서 묻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는 갖출 것을 다 갖춘 부러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는 영생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불란서의 위대한 사상가 볼테르는 천국과 지옥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병들어 죽기 전에 병상에서 의사에게 “나를 6개월만 더 살게 해주시오. 그러면 전 재산의 반을 드리겠소. 나는 죽어 지옥밖에 갈곳이 없소”라고 하엿습니다. 불후의 명저를 남기고 사상가로도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 영생을 동정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영생은 이와같이 사람에게 절실한 문제입니다.

2. 영생의 내용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예수님은 아무리 천하 영광을 얻어도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세계 종교는 제각기 이 문제에 대하여 정확한 해답을 줄려고 노력을 합니다. 옛날 애굽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저 나라로 간다고 해서 배를 만들어서 무덤에 넣은 것을 비롯해서, 헬라 사람들은 죽으면 입을 벌려서 돌을 한 입 넣어서 매장하였는데 죽어서 저 세상 갈 때 배를 타고 가는 배삯을 하라고 행하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왕릉을 발굴해보면 제왕이 죽으면 매장을 하고, 사후에도 살아생전과 같이 생활한다고해서 살아있을 때 쓰던 물건을 다 그대로 매장하였습니다. 이와같은 모든 현상은 인간이 얼마나 죽음 이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불교는 죽음 이후의 인간을 어디에 맡깁니까 동물에 맡깁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닭도 되고, 돼지도 되고, 소도 되고, 쥐도 됩니다. 사람의 영혼을 동물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생을 금하는 것입니다. 돼지가 할아버지도 되고, 증조 할아버지도 되고, 개가 고조 할아버지도 될테니 함부로 살생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길에 나가면 증조 할아버지인지, 고조 할아버지인지 잘 살펴서 다녀야 합니다.
자기 집에 들어온 쥐 새끼나 뱀을 해쳐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집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 집과 연관된 식구나 친척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는 죽음 이후에 인간을 어디에 맡깁니까 사람에게 맡깁니다.
죽음을 앞에 둔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유언을 합니다. “큰 아들아 내개 내 재산을 전부 물려줄테니 내 제사를 잘 지내라.” 그리고 한년에 한 번씩 얻어먹으러 옵니다. 그것도 한 대를 넘기기 힘듭니다. 겨우 30년 얻어먹으면 잊혀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자기의 영혼을 맡기시겠습니까

기독교는 죽음 이후의 인간을 어디에 맡깁니까 하나님께 맡깁니다.
영생이란 말 그대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는 영원전부터 하나님이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그리고 영원히 계실분입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영원한 분이 없습니다.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사죄와 부활이 전재된 영생입니다. 죄된 영생은 참된 영생이 아닙니다. 영원히 죄의 형벌과 죄책감에 짓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주와 진노 아래 있는 영생은 영생이 아닙니다. 고통과 슬픔과 눈물이 있는 영생은 영생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영벌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부활하여 하나님과 일체가 되며, 그의 나라에서 삶을 누리게 되는 상태를 영생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세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이 땅에서 가장 값진 것들을 동원하여 천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은 단지 추상적인 곳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영과 육이 영원히 영광을 누리는 곳입니다.

이 축복된 영생은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 얻어야 되고 그리고 죽어서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습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서 얻었다는 말은 과거사입니다. 이미 얻었다는 말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서 얻는다는 말은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가 현재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에 즉시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세세무궁토록 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소망인 영생이 분명히 있습니다. 참되시고, 진실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영생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다면 여러분은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해도 교회 안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주저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성경이 말하는 죽도록 충성하는 일군이 되실 것입니다. 만일 영생의 확신이 없다고 한다면 구원도 의심스럽고 교회 출석이나 교회봉사나 성도의 교제도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영생을 믿고 확신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요 희미하지요 지금 사랑하는 분을 만날 수가 없지요 고전 13:12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지금은 우리가 주님을 볼 수 없고, 안다고 해도 희미합니다. 그 분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주님을 얼굴을 대하고 볼것이며, 주님께서 나에 대하여 아는 것처럼 나도 주님에 대하여 아는 날이 바로 그날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신경의 마지막이 영생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이렇게 끝맺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무한한 사랑과 은총으로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종착역입니다. 최대의 목표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은 성도는 영육이 함께 구원을 받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영생이 분명한 성도는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 겁없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핍박과 어떤 고난도 그들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복음을 전했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몸에 7가지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5세에 그가 죽을 때에 롬 8:18을 암송하였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유명한 부흥사 무디는 마지막 죽을 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보라! 땅은 물러가고 이제 하늘이 내게 열리는구나!”
김활란 여사는 “내가 죽을 때 울지 말고 승리의 찬송을 불러달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영원히 삽니다. “아멘”. 아멘하면 그대로 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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